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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May 18. 2016

"지금, 저에게 무엇을 투사하고 계신 겁니까?"

상대방의 감정적 혹은 부정적 투사를 멈추게 하는 방법

일상에서의 대화든 SNS 등 온라인 상에서의 대화든 동일하게 경험되는 게 있다. 바로 '상대방들의 이상한 반응'이다. 여기서 '이상하다'고 하는 것은, 상대의 반응이 내 말의 의도나 내용과 전혀 상관없이 보이는 때를 말한다. 혹은 뭔가 연결은 된 듯 하지만 여전히 나는 이해가 안 되는 반응도 해당된다. 그런 경우 거의 대부분은 상대방이 나와 나의 말에 뭔가 '자기만의 투사'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내가 부주의하게 한 부분들이 상대에게 자극이 되어 뜻밖의 반응이 나올 수도 있다. 이런 경우는 무조건 상대방의 투사만이라 할 수는 없다. 내가 원인을 어느 정도 제공했기 때문이다. 


혹은 내가 한 말이 여러 가지로 해석되거나 받아들여질 수 있기에 상대의 알 수 없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다. 이런 경우는 해석의 다양성, 표현의 다양성의 문제이기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상대의 반등이 다소 뜬금없더라도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것임을 미리 예측하거나 혹은 수용할 수 있다.


그런데 과도한 투사의 경우는 좀 다르다. 이 경우엔 상대방의 원인이 크다. 내가 한 말을 오독한 경우도 있겠지만 그 역시 그 사람 안에 있는 어떤 요소에 의해 일어나는 오독이므로 투사에 포함된다. 이런 경우 상대방의 반응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선은 애초에 발설자인 내가 그 반응에 걸맞은 뭔가를 의도하거나 표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방은 내면에서 뭔가가 건드려졌다. 그래서 그것을 밖으로 즉 나에게로 투사하는 것이다.


물론 내 말과 표현에 대한 상대방의 모든 반응이 투사인 것은 아니다. 우린 어느 정도까지는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반응을 서로 주고받는다. 또 건강하게 그렇게 주고받는 것이 관계를 더 풍부하게 하고 여러 가지 효과도 만들어낸다. 사실은 이런 '주고받음'이 본래의 것이고 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거나 망설이거나 주저하거나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다. 건강한 나눔을 말이다.




문제는 부정적, 병적, 감정적 투사이다


사실 대화에서 '투사'는 필수이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외부의 것을 '그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감각으로 받아들인 그 어떤 정보도 내부에서 만들어진 인식에 의해 덧씌워져 자각하게 된다. 뇌과학적으로도 외부물의 정보가 들어오는 경로와 그에 대해서 내부적으로 인식하는 경로가 별개인 것으로 연구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확장해서 말하면 외부에 대한 인간의 모든 인식은 '투사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다. '외부 그 자체'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투사 문제를 다룰 때는 이렇게 확장해서 할 필요는 없다. 모든 게 투사일 수는 있지만 그중에 병적인 투사와 건강한 투사를 구분하면 된다. 혹은 부정적 투사와 긍정적 투사의 구분도 좋다. 우리가 처리해야 할 것은 병적인 투사, 부정적 투사인 것이다.


이 두 가지 투사에는 부정적 감정 반응이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물론 모든 부정적 감정 반응이 나쁜 건 아니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오히려 서로 간에 정당한, 건강한 감정 반응이 있어야 관계 나눔도 건강해진다. 문제는 '과도하거나 불필요한' 감정 반응이 되겠다. 거의 아무런 효과와 효능이 없으며 오히려 관계와 나눔에 해만 되는 감정 반응이다.




상대의 투사에 당황하게 되는 이유


나의 말이나 표현에 상대가 부정적 투사를 해 오게 되며 보통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우선은 그게 그런 투사인 줄 미처 눈치를 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대화나 관계에서 상대의 반응을 '정상적인 반응'으로 우선 여기게 되어 있다. 그래야 서로가 상식적인 관계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대의 과도한 반응, 감정적이 부정 반응 등이 있을 땐 우선은 나도 모르게 '내가 뭘 잘못했나?'라고 느끼고 생각하게 되어 있다. 사실 이게 정상이다. 말하고 표현한 사람이 상대의 반응에 대해 자기 쪽의 원인을 먼저 생각해 보게 되는 건 당연하다는 말이다.


아직 투사인 줄 모른 상황에서 상대의 반응에 당황하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과도한 반응이 상대방의 투사이든 아니든 우리 안에도 항상 여러 가지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즉, 비록 상대의 투사 반응이 뭔가 뜬근없는 것이라 해도 그와 별개로 내 안에도 모종의 요소들이 있을 수 있는데, 상대의 투사 반응에 의해 그게 건드려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게 건드려져서 당황하는 부분도 있고, 상대의 투사가 글자 그대로 잘못된 것이어서 당황하게 되는 부분도 있는 것이다.




상대의 부정적, 병적, 감정적 투사를 멈추게 하는 방법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에 의한 소통이 아니라 과도한 투사가 들어간 경우는 굳이 그것을 계속 받아줄 이유는 없다. 나에게만이 아니라 상대에게도 좋을 게 없다. 그런데 보통은 한쪽의 과도한 투사 반응에 대해서 당황하거나 화를 내거나 하면서 제대로 대처를 못하곤 한다. 그래서 뭔가 어수선하고 혼란한 상황으로 그냥 미봉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서로 앙금이 남고 차후의 대화나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적당히 멈추게 하는 게 나와 상대 모두를 위해 좋다.


상대의 과도한 투사를 멈추게 하는 첫 번째 단계는, 내가 우선 그것이 상대의 부정적, 병적, 감정적 투사임을 눈치채는 것이다. 그걸 인식하는 것이다. '아, 뭔가 과도한 투사가 일어나고 있네'라고 말이다.


물론 이 말이 상대들의 반응을 모두 문제 있는 투사로 여기라는 말은 아니다. 구분을 잘 해야 한다. 그냥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투사인지 아니면 과도한 투사인지 말이다. 어느 측면에서는 이것은 나의 책임이기도 하다. 혹은 말하는 자, 표현하는 자의 책임인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거나 들은 것에 반응을 할 때 스스로도 자신의 투사의 양태와 질 등을 잘 포착하지 못한다. 그리고 잘 조절하지 못한다. 대부분은 그냥 자동으로 느끼고 반응하면서, 그 느낌과 반응이 정당하고 합당하며 사실이라고 여긴다. 이 또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 양태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자신의 반응에 대해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우리의 반응은 다분히 무의식적인 측면, 자동적인 측면. 무작위적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투사 반응을 받는 나는 또 나대로 상대의 투사의 양태, 질을 잘 파악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일방의 책임이 아니라 서로의 의무와 책임이다. 그러므로 꾸준하게 상대의 반응 혹은 투사를 잘 구분하는 훈련을 하자. 이 구분의 정확도는 훈련하면 할수록 높아질 수 있다.


여하튼 우리는 각 수준에서 상대의 투사를 최선을 다해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부정적 투사, 감정적 투사가 있을 때는 그것을 눈치채는 것이다. 일단 이렇게 알아채면 이전처럼 무조건 당황하거나 화를 내지 않게 된다. 물론 처음에는 당연히 관성에 의해 과거의 반응이 계속 나오겠지만 그러나 점점 더 알아챔이 선명해질수록 줄어든다.


만약 내 반응의 변화가 없다면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나의 알아챔이 아직 선명하지 않은 것이다. 이론적으론 어느 정도 알지만 아직은 부정적 투사, 감정적 투사에 대한 자각이 약한 것이다. 그냥 나의 말과 표현에 대한 상대의 정상적 반응으로 여긴다. 그리고 화를 내거나 당황한다. 또 하나는, '나의 투사' 부분이다. 즉 상대방의 투사만 있는 게 아니다. 상대의 투사에 대한 나의 투사도 있다. 그런데 정작 나의 투사 부분을 인식하지 못하면 나도 어쩔 수 없이 투사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 부분은 미묘하면서도 상당히 중요하다.


상대의 과도한 투사를 멈추게 하는 두 번째 단계는, 실제 상대방에게 투사 반응에 대한 적절한 말을 해 주는 것이다. 즉 상대의 부정적, 감정적 투사에 대해서 그걸 드라이하게, 중립적으로 알려 주는 것이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이 글의 제목으로 쓰인 문장이다.


"지금, 저에게 무엇을 투사하고 계신 겁니까?"


물론 이 한 문장만이 유용한 게 아니다. 얼마든지 상황과 상대에 따라 다른 문장을 만들어 말할 수 있다. 요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투사성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지금 보이시는 반응은 적합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한 것은 그런 의도나 내용이 아닙니다. 그런데 당신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마도 내부에서 제 의도나 내용과 별도의 무엇이 자극되어서 그런 듯합니다. 그게 뭔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본인에게 그런 요소가 있다면 그런 반응이 나올 순 있겠습니다. 그건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반응은 저와 혹은 제가 말한 것과는 상관없는 것임은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저는 그 투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 투사를 받지 않겠습니다."


이 문장을 그대로 말하라는 게 아니다. 이러한 요지를 전달할 수 있도록 적절히 만들어 말해 주는 것이다. 나아가 위 문장에는 없지만, 내가 어느 정도 추론을 해서 "혹시, 저의 말이나 표현과는 상관없는 이러저러한 부분 때문에 그렇게 반응하시는 것 아닐까요?"라고 질문성 확인을 해 볼 수도 있다. 물론 이 경우엔 내 짐작이나 추론이 맞다 아니다를 따지는 게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그냥 상대방도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 투사 부분을 함께 찾아보는 맥락이어야 한다. 즉 상대를 돕고자 함이 목적인 것이다.


또한 주의할 것은, 상대방의 투사에 대해 내가 이런 말을 하거나 반응할 때 자칫 공격적으로 혹은 무례하게 하는 부분이다. 그럴 필요가 없다. 애초에 투사란 누구의 잘못도 아닌다. 그냥 우리 인간의 인식과 반응의 기제에서 자연스레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그게 좀 과도하게 일어나는 경우가 문제가 될 뿐이다. 그래서 그것을 서로가 한 번씩 짚어주며 인지하고 멈추게 되는 게 우리의 목적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투사성에 대해


이 글에서는 주로 상대방의 투사성에 대해 썼지만 사실 투사에선 나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상대의 투사에 대한 나의 투사 반응'도 있을 수 있고, 더 본질적으론 애초에 내가 말을 하고 글을 쓰면서 혹은 어떤 표현을 하면서 그 안에 '나만의 과도한 투사 요소'가 담길 수도 있다. 사실은 종종 그렇다.


상대들의 과도한 투사 반응의 책임도 항상 상대가 100%가 아니다. 엄중히 말하면 나와 상대의 과도한 투사성의 책임 점수는 경우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내 쪽의 점수가 높을 때도 있고 상대 쪽의 점수가 높을 때도 있다. 거의 반반일 때도 있다.


상대의 투사에 대해서 내가 취할 적절한 반응은 그것대로 취하돼, 나의 과도한 투사 즉 부정적, 병적, 감정적이 투사 요소의 정도를 항상 살펴야 하겠다. 이 부분에서 나의 투사성이 건강하면 건강할수록 상대들의 과도한 투사도 줄어들게 되어 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론 그렇다.


마지막으로 '상대들에 대해 가지는 나의 투사'도 살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건강한 투사가 아닌 과도한 투사이다. 내 안의 어떤 요소 즉 과거의 경험, 상처, 분노, 강박, 편견, 편협되거나 고정된 생각, 오해, 차별 의식, 관성 등에 의해 존재하는 부정적이거나 감정적이거나 병적인 느낌과 생각이 상대나 상대의 말, 글, 표현, 행동에 투사되는 게 아닌지 항상 잘 보아야 한다.


조절되지 못한 과도한 투사는 우선은 상대를 힘들게 하지만 결국엔 나에게도 손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투사를 함부로 하는 타인에 내가 거부감을 가지듯이, 그렇게 하는 나에게 상대도 거부감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나를 자꾸만 회피하거나 무시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온전한 대화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우리, 인간의 자연스러운 의식 기능인 투사에 대해서, 내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그에 매몰되거나 자동 반응하기만 하진 말자. 능동적으로 잘 조절하고 잘 사용하는 투사의 주인이 되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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