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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Aug 02. 2016

한국 사람들은 왜 '허수아비 공격'을 많이 할까?

남이 실제 한 것이 아닌, 자신의 짐작과 생각으로 서로 공격하고 비판하기

'어, 저 사람은 왜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을 내가 했다고 하며 흥분하고 날 공격하지?'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우리가 곧잘 경험하는 경우이다. 무척 억울한 상황이다. 내가 한 말에 대해서 그 뜻이 아니거나 혹은 주된 의도가 아닌 부분을 트집 잡듯이 붙잡고 나에게 흥분하거나 공격하는 것이다. 나도 또한 상대방들에게 그렇게 하곤 한다.


이런 경우를 간단히 말해 '허수아비 공격'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서로 말과 생각을 나누거나 논쟁, 토론 등을 할 때 상대방이 실제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짐작하고 생각한 것으로 서로 공격하거나 반론하는 경우를 말한다. 즉 허수아비를 세워 놓고 그걸 공격하는 것이다. 말과 생각만이 아니라 느낌과 감정, 행동에 대해서도 행해질 수 있다. 때로는 가상의 상대를 실존 대상인양 세워서 하기도 한다.


위키백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허수아비 때리기(straw man fallacy)란 논증의 한 종류이며, 동시에 상대방의 입장을 곡해함으로써 발생하는 비형식적 오류이다". 허수아비 논법(straw man argument)이라는 말도 쓰인다.


꼭 상대방이 한 말만이 그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그냥 평소의 여러 개인이나 집단의 주장이나 사회적 상황에 대해서 나름대로 뭔가 생각을 하고 공격이나 반대를 하는 경우에도 허수아비 공격은 얼마든지 행해질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이 이 허수아비 공격을 서로 많이 한다. 아마 이 글의 제목과 처음 문장을 보는 순간 많이 이들이 공감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실제 계속 서로 당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제목으로 쓴 "한국 사람들은 서로 허수아비 공격을 많이 한다"도 엄격히 말하면 이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 이 말이 엄격한 리서치나 연구가 아니라 일상이나 SNS 등에서의 경험치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경우라면 말이다. 이것이 어느 정도 객관적인 말이 되려면 동일한 사안이나 논쟁을 가지고 외국 몇 나라들과 한국 사람들이 실제 나누는 대화 케이스나 여러 토론 프로그램 등의 어느 정도 이상의 양과 질로 분석해서 그 자료를 바탕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실제 더 많이 하고 있는 지, 한다면 어느 정도로 많이 하는 지 등이다.


이 글은 그 정도의 글은 아니다. 그러므로 주제 자체가 허수아비 공격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미리 인정하고 글을 쓴다.




한국 사람들이 허수아비 공격을 서로 많이 하는 원인


아마 가장 큰 원인은 어릴 적부터 제대로 논쟁, 토론, 대화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부분일 것이다. 인간이라면 모두 생각이나 말로 언어를 사용하지만 언어 사용도 명백히 하나의 기술이다. 그러므로 훈련되지 않으면, 배우지 않으면 서투를 수밖에 없다.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좀 더 세분화하면 '생각하는 힘'과 '말하는 힘'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물론 둘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 '실행하는 힘'은, 관계는 있지만 조금 별도의 경우가 되는데 생각, 말, 행동 어느 것이든 서로 영향을 미친다.


위에서 '제대로 논쟁, 토론, 대화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했지만 다른 말로 하면 '제대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다. 아마 가장 크게는 책을 읽음으로써 얻어지는 능력이겠고 그리고 또래와 선생들, 어른들과 꾸준히 대화하며 관계를 나누며 얻어지고 익혀지는 것이리라.


한국 사회에서는 모두가 알다시피 초중고 교육에서 해당 부분이 빠져 있다. 주로 점수와 순위를 매기기 위한 암기와 영어, 수학, 국어 학습이 위주가 되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물론 암기 과목, 과학, 영수국을 하면서 어느 정도 이상의 기본기는 익혀질 것이다. 생각과 말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 '어느 정도 이상'의 수준 이상이 관건인 것이다. 그런 부분이 훈련되거나 학습되지 않는 것이다. 대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특히 '생각하는 힘'의 가장 큰 핵심은 '다양한 측면을 능동적으로 보는 능력'이다. 여기서 요한 것은 '다양한 측면'과 '능동적으로 봄'이다. 보통은 자신에게 이미 있던 관점, 기존의 느낌과 생각, 첫 느낌, 옳다고 여겼던 무엇을 먼저 잡는다. 아니 그것에 수동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잡힌다'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유일하게 옳은 것으로 여긴다. 이것은 '무엇을 더 생각해야 할지 몰라서' 그런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관점, 다른 측면이 애초에 느껴지지도 떠오르지도 않는 것이다. 혹은 떠올라도 그 생각을 하기 싫어서 그냥 거부해 버린다. 그러므로 계속하던 생각만 하고 그리고 자기 생각으로 상대방의 생각과 의도도 덮어씌워 버린다.


상대가 나와 다른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리고 나와 다르게 어디까지 생각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자신에게 느껴지는 느낌과 떠오르는 생각 이외의 것을 느끼고 떠올리는 것은 그냥 되는 게 아니다. 어느 정도 이상의 훈련과 연습과 경험치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뇌 신경망에 그러한 회로가 생겨야 한다. 과거 어느 기사에서 본 내용이 있다. 미국 한 대학의 사회학 교수의 이야기이다. 그 교수는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어 줄 때 항상 학생 자신의 견해에 대해 다른 관점의 견해를 5가지 정도 적어오라고 했다 한다. 예를 들어 그 학생이 정부의 어떤 정책에 대해서 반대를 한다면, 그러면 찬성을 할 5가지 이유도 함께 작성해서 제출해야 했던 것이다. 혹은 찬반과 상관 없이 한 사안에 대해 10가지 정도의 다른 관점을 스스로 만들어 보는 것이다.


이러한 습관을 어릴 때부터 기르는 것이 좋다. 독서가 그 한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요즘은 유튜브 시대이고 동영상 시대이니, 유용한 동영상도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혹은 학교에서든 다른 곳에서든 위와 같은 인위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그룹 활동이나 토론, 대화 시간들을 많이 가지는 것도 도움이 되겠다. 여하튼 자신의 생각과 그 틀만 가지고 타인과 세상을 마냥 대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다른 생각도 함께 떠올 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것도 억지로나 수동적으로가 아니고 '능동적'으로, '저절로' 말이다. 사실 이건 재밌는 것인데 어릴 때부터 습관이 되지 않아 힘든 게 되는 것이다.


혹은 자기 생각에 대한 절대시, 전부시를 깨는 것도 도움이 된다. 또 자기가 하는 생각이 '절대 사실이다'는 믿음도 깨면 좋다. 자기 생각과 자신의 동일시를 눈치채는 것도 필요하다. 즉 자기의 생각은 생각일 뿐 어떤 '절대 사실'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전부와 절대로 여기지 않는 것, 자신의 생각과 자기를 자동적으로 동일시하는 기제를 눈치채고, 필요할 때 멈출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은 이러한 눈치챔, 통찰, 인식의 전환이 더 본질적이고 필수적이다.


혹시 이렇게 하면 자신의 의견, 주장, 생각을 선명히 가질 수 없게 되는 것 아닌가 하고 걱정할 수도 있겠다. 또 항상 너무 상대방의 관점, 의사, 주장을 우선시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하고 걱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러한 '다양한 측면을 능동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당사자에게 좋은 이유는, 인간은 어떻게 되든 자신이 선호하는 느낌과 생각, 관점들을 가지게 되어 있는데 '오직 자기 생각'만을 바탕으로 뭔가를 보고 대응하는 것과 여러 가능성, 관점을 다 고려하면서 보고 대응하는 것은 분명 후자가 좀 더 유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더 적절한 통찰과 대응책을 만들어낼 수 있다.


모두가 짐작하고 있겠지만 현재까지의 한국에서의 유치원과 초중고대 교육은 이런 부분이 거의 가르쳐지지 않는다. 암기하고, 영어와 수학을 하고, 점수를 얻고, 스펙을 쌓는 것에만 거의 모든 시간이 투자되고 있다. 사회에서의 관계나 교육도 마찬가지다. 직장이나 일터에서, 여러 공동체에서도 비슷하다. 지극히 제한되는 것이다.


'생각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 인문학은 다름 아닌 '생각하는 힘을 키우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이다. 특히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이어야 한다. 자발적으로. 특정 관점과 견해만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 아무리 나는 나대로의 고유하고 확실한 생각이 있다 하더라도 그와 관계없이 여전히 다양한 측면을 떠올리고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옳음'을 빨리, 먼저 확보하고 싶음
'나의 존재 가치, 존재 의의'를 상대의 틀림과 잘못에 의존하려 함


'허수아비 공격'의 큰 원인 중 하나는,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바로 상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디까지 생각하는지 모른다는 부분이다. 그런 것을 스스로 느껴보고 떠올려 볼 수 있는 경험치와 연습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상대방은 혹은 상황은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다르게 하고 있는데 나는 나의 생각으로만 파악하고 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정말 상대방의 본래 의도나 생각을 모르고 할 수도 있고, 혹은 알면서도 논쟁이나 토론에서 공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허수아비 공격'을 할 수도 있다. 후자는 어차피 의도적인 경우이므로 사실 이런 경우엔 그 사람에게 직접 말로 "지금 허수아비 공격을 하고 계십니다. 그건 제가 말한 관점, 내용, 주장이 아니라 본인이 설정한 본인의 관점, 내용, 주장입니다. 저에게도 그리고 본인에게도 시간과 노력을 낭비시키는 일이니 그만두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는 식으로 하는 게 좋은 대처법 중 하나이다.(이렇게 대처해도 상대방은 여전히 그 방법을 사용할 것이지만, 어쨌든 이렇게 밝혀 드러내는 게 필요하다)


문제는 정말 '모르고' 하는 경우들이다. 내가 모르고 상대에게 할 수도 있고 상대방이 나를 모르고 나에게 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에 허투르게 허수아비 공격을 하게 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나의 옮음'을 빨리 주장하고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정말 상대방이 한 말 내용의 진의, 본래 의도를 제대로 아는 것이 목적이라면 사실은 허수아비 공격을 하기 전에 먼저 물어볼 것이다. "지금 말씀하신 게 이러저러한 의도나 관점이십니까?"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나의 옳음, 내가 옳다'가 나의 의식적, 무의식적 목표가 된다면 뭔가 모르게 서두르게 된다. 그의 말 중에 일부 내용만을 트집 잡거나 혹은 강조해서 "이러저러한 말을 했으므로 당신의 의도는 이러저러하다."라고 단정을 내려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나의 옳음'을 서둘러 확보하려는 이유는 바로 '나의 존재 가치, 나의 존재 의의'를 상대의 틀림과 상대의 잘못 즉 상대의 약한 존재성에 의존하려 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그냥 나 자체로 당당하고, 온전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뭔가 틀리고, 못나고, 정의롭지 못해야 내가 그리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순수한 환상이자 설정이고, 스스로의 가치를 타인의 상태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함께 뭔가를 논의하면서 뭔가 더 바람직하고 지혜로운 것을 만들고 찾는 것이지 '내가 옳다, 네가 옳다'는 서둘러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누가 옳은 가의 확정은, 정말 필요할 때 외에는 거의 쓸모가 없는 부분이다.




때로는 감정적인 허수아비 공격도 있다. 이런 경우는 내가 기분 나쁘고,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내가 만족되지 않으므로 상대를 그냥 공격하는 것이다. 사인이나 상황을 그냥 공격하는 것이다. 상대도 나에게 그럴 수 있다. 보통 '부당하거나 과도한 감정 요소'가 들어가면 대부분은 자신도 모르게 허수아비 공격을 하게 될 수밖에 없다. 감정의 뇌인 변연계에서 쏟아져 나오는 신호가 이성의 뇌인 전전두엽과 대뇌 피질에서 나오는 신호보다 훨씬 더 강하고 많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그 사용하는 단어들을 잘 보면 알 수 있다. 주로 감정적 단어를 많이 쓴다. 그리고 부정적이거나 격한 부사, 형용사 등도 많이 쓴다. 혹은 명사라도 좀 더 치우치고 편향된 단어를 쓰게 된다. 내가 그런 단어들을 쓰든 상대방이 쓰든 여하튼 그런 게 많이 보이면 일단 지금 그 사람은 다분히 '감정적'이 된 것인데, 그러면 아무래도 허수아비 공격이 많이 나오게 된다. 그걸 눈치채고 너무 상대의 그 감정적 공격에 잡히지 말고, 가볍게 비켜 재껴 주면서 적절히 대응하면 된다.


허수아비 공격 시 사용되는 대부분은 말하는 이의 생각이 아니고 듣는 이의 생각이다. 즉 듣는 이가 화자에 대해서 너무 미성숙하다고 여기거나, 부정적이라고 여기거나, 시야가 좁다고 여기거나, 유치하다고 여기거나, 제한적이라고 여기는 생각이 사실은 '청자의 생각'인 것이다. 이런 부분을 눈치채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실제 말하는 이가 그런 부정적이거나 미성숙한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잘 구분해서 하는 게 좋다.




그럼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실 그렇다고 해서 대화나 논쟁, 토론 등을 할 때 일체 허수아비 공격을 하면 안 된다는 건 아니다. 그러면 좋겠지만 실제론 불가능하다. 우리가 텔레파시 등이 되지 않는 이상은 어쨌든 상대방이 한 말이나 상황에 대한 나의 느낌, 생각, 견해, 추측, 경험치 등으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즉 어쩔 수 없이 허수아비를 세우게 될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때로는 적절한 판단을 내리겠지만 때로는 빗나갈 수도 있다. 본의 아니게 허수아비 공격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우리가 항상 조심조심 위축되어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게 아니라 오히려 언제든지 나든 상대방이든 '허수아비 공격의 가능성'이 있음을 쿨하게 인식하고 인정하면서 하는 것이다. 이게 답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허수아비 공격에 대해선 그냥 드라이하게 "어, 그거 허수아비 공격이네요."라고 이야기해 주고, 그리고 내가 말하다가도 스스로 '어, 이거 혹시 나의 허수아비 공격 오류가 아닐까?'하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에게 과도하게 화 내거나, 흥분하거나, 억울함을 느끼거나 하지 말고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스스로 위축되거나 쫄거나 얼지 말고 호쾌하고 당당하고 드라이하게 말을 듣고 또 하는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 저절로 정리되고 구축되는 것이다.


이게 쉽다는 말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자율신경적 반응은 우리의 이성이 반응하기 전에 먼저 일어난다. 그래서 내가 당하면 당장에 억울하고, 화가 나고, 슬프고, 기운 빠지고, 삐지고, 당황하게 된다. 또 내가 그렇게 해서 상대방에게서 격한 반응이 나와도 그렇게 된다.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는 계속 그런 반응들이 계속 일어나면서 진행되다.


'허수아비 공격'의 정체와 특징을 잘 파악하고, 그리고 나든 상대방이든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인정하면서, 실제 일어날 때는 적절하게 대응하고 다루어주기를 계속 진행하다 보면 점점 더 여유로워지고 시야가 넓어진 자신을 보게 된다.


허수아비 공격이 있느냐 없느냐는 관건이 아닌 것이다. 물론 최소한으로 주리는 것이 하나의 바람직한 목표는 되겠지만, 그게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어떤 상황에서도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다면 사실은 일어나도 아무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좀 답답하긴 하겠지만.




말하는 사람의 책임 부분


허수아비 공격을 말하게 되면 주로 그 공격을 하는 사람을 이야기하게 되지만 애초에 그 공격을 야기한 사람 즉 '말한 사람'의 책임 부분도 보긴 보아야 한다.


기본적으론 허수아비 공격은 어디까지나 그 공격을 행하는 이의 오류가 크지만, 그의 그 공격도 그 앞에 말한 사람의 말이나 의도 등을 근거로 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는 사람도 분명 자신의 말에 대한 일정 책임은 있을 수밖에 없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그렇다고 해서 말하는 내내 조심하고 위축될 필요는 당연히 없다. 그리고 항상 상대방의 입장, 관점 등을 너무 고려해서만 이야기할 수도 없다. 말하는 이는 늘 당당하고 떳떳하게 자신이 해야 할 말, 주장, 관점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확실하게 문제가 되는 혐오 발언, 차별 발언, 범죄적 발언 등이 아닌 한에는 말이다.


말을 할 때 항상 자신의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 혹은 자신의 말에 의한 상대방의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생각해서 계속 부연 설명이나 사전 변명 같은 말들을 덧붙이는 것도 그리 권장 사항은 아니다. 좀 말이 지지부진해지고 지리멸렬해 진다. 물론 어느 정도까지는 그러한 일종의 '배려'는 가미하면 좋다. 그래서 상대방도 덜 불쾌하게 되고 나도 불필요한 공격 등을 받지 않게도 되고 말이다. 하지만 '말을 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표현자로서의 표현이 우선이다. 즉, 듣는 자들을 너무 지나치게 고려해서 혹은 내가 지나치게 방어적이 되어 이야기하기보다는, 내 표현을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하는 게 더 좋다는 말이다. 그래야 서로가 서로의 생각을 더 잘 알게 된다. 이게 우선이다. 만약 아니면 쿨하게 미안하다, 오해했다, 착각했다라고 하는 것이다.


다만 그러는 와중에도 늘 내 말이 허수아비 공격이 될 가능성, 그리고 상대방의 허수아비 공격을 일으킬 가능성은 또 함께 고려하면 좋다는 말이다. 당당하게 할 말은 다 하면서 동시에 고려하기. 고려하지만 굳이 위축되거나 부연 설명, 사전 변명에 매몰되지 않기. 이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품는 것이다.




정리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것이 아닌 너무 심한 허수아비 공격은 서로의 희생과 고통을 야기한다. 의도적인 것이든 비의도적인 것이든 말이다. 그러므로 이왕이면 내 생각으로 덧씌운 상대방의 생각이 아니라, 상대방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알아주는 쪽으로 가자. 그게 나와 상대 모두를 위해 좋다. 이것을 위해 필요한 훈련, 학습, 연습 등을 최대한 취해 보자. 그것이 그 무엇이든 말이다. 사실은 꼭 어떤 특별한 훈련이 있어야만 되는 것도 아니다. 이 글에 있는 것과 같은 '허수아비 공격'에 대한 눈치챔과 알아챔, 통찰과 인식이 선명하게 되면 될수록 저절로 변화되기도 한다.


이왕 대화를 나누고, 토론하고, 논쟁을 할 때는 서로의 느낌과 생각과 표현의 자유를 상호 인정해 주며 시원하게 하자. 그리고 그러는 와중에 일어나는 허수아비 공격들은 또 그것대로 쿨하게 처리하자. 상대의 것에 대해서도, 나의 것에 대해서도.


우리의 목적은 '나의 옮음'을 서둘러 주장하거나 확립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의 오류와 틀림을 확정 지어서 나의 가치, 나의 존재감, 나의 정당성 등을 확보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적은, 나와 상대가 서로가 느끼는 것, 아는 것, 행하는 것을 충분히 표현하고 나누어서 그 과정 중에 나오는 여러 좋은 것들을 만들고 취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어떤 도덕, 윤리적 측면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게 나와 상대 모두를 위해서 제대로 이기적인 것임을, 진짜 실용적인 것임을 알기에 그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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