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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Aug 05. 2016

우리 밖과 안의 '근본주의'에 대해

인간의 동물적 본능인 '근본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기

꼭 종교만이 아니라 삶에서 근본주의 혹은 원리주의적 성향을 가진 이들이 있다. 자신이 생각하거나 믿는 걸 '절대'로 여기는 성향이 큰 경우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어야 세상이 좀 더 원리적(?)으로 돌아가기에 필요한 기질이기도 하지만, 그걸 적용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나 대상, 상황에조차 무분별하게 적용하는 경우는 사실 버겁고 귀찮다. 또 많은 고통을 야기한다.




근본주의 혹은 원리주의라 불리는 것이 있다.


"원리주의(근본주의, Fundamentalism)란 용어는 본래 개신교 원리주의(Protestant Fundamentalism)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좀 더 구체적으로는 1910년에서 1915년 사이 미국에서 2명의 부유한 사업가들의 지원을 받아, 3백만 부나 출판된 《The Fundamentals》란 책 제목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종교의 교리에 충실하려는 운동이며 경전의 내용에 대한 문자 그대로 절대적 준수를 지향한다고 한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당시 미국 성공회, 미국 장로교, 미국 감리교 내에서 주류를 차지하던 자유주의 신학 이론과 성서비평학에 대항한 보수반동적인 이데올로기였다 한다."(이상 위키 백과 참조)


그런데 현재는 이러한 의미가 확장되어 기독교만이 아니라 웬만한 종교들 내에서 교리나 전통에 충실하면서 뭔가 극단적인 양태를 보이는 경우를 공통적으로 근본주의, 원리주의, 정통주의라 칭하기도 한단다. 예를 들어 이슬람 근본주의, 힌두교 민족주의, 유대교 근본주의, 불교 정통주의 등이다.


이 글에서는 좀 더 확장해서 지칭할 것이다. 즉 종교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활동 영역에서 뭔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 만든 것, 물려받은 것, 답이라고 생각하는 것, 특정 원리나 이론 등 만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고집하는, 집착하는 모든 경우를 근본주의적 경향이라 칭하는 것이다.




꼭 종교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각 영역에서 근본주의 혹은 원리주의적 성향을 가진 이들이 있다. 즉 자신이 생각하거나 믿는 걸 '절대'로 여기는 성향이 큰 것이다. 그렇게 타고난 이들도 있고 사회와 문화의 영향에 의해 그런 성향이 형성된 이들도 있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근본주의적 성향이 무조건 악이라거나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이 또한 하나의 성향이며 이를 잘 이용하기에 여러 가지 일이나, 과업, 사업 등을 잘 완수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뭔가 고집스럽게 고수하고 밀어붙이는 측면도 있어야 세상과 세상 이들도 좀 더 원리적(?)으로 돌아가게도 되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무척 필요한 기질이기도 한 것이다.


아마 우리 인간에게 근본주의적 성향이 아예 없다면 많은 일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꾸준함'은 그 일의 완성에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다. 물론 꾸준함과 근본주의적 성향이 꼭 일치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전혀 다른 성향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목표나 내용, 대상, 원칙을 정한 후에 그것이 될 때까지 최대한 유지를 한다는 측면에서는 분명 겹치는 부분이 있다. 충분히 활용성과 효용성이 있는 부분인 것이다.


만약 반대로 항상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의 마인드라면 여유와 여지는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 일의 지행과 완수에서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할 것이다. 추진력과 실행력 등에서도 말이다. 모든 기질에는 각각의 장단이 있게 마련이며 어느 기질이 절대적으로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얼마나 상황에 맞추어 적절히 활용하느냐가 관건이겠다.


근본주의적 성향의 사람이나 우리 안의 근본주의적 성향의 문제점은, 그걸 적용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나 대상, 상황에조차 무분별하게 적용하는 때에 발생한다. 그런 경우는 솔직히 버겁고 귀찮다. 나아가 많은 고통을 야기하기도 한다. 즉, 사람들과 사회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할 것이 그 기질 자체, 그 기질을 가진 사람 자체를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만약 그 적절성이 떨어진다면 당연히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게 되며 전체 상황도 좋지 않게 되는 게 당연하다.




물론 근본주의적 성향이 있으면서도 인격적으로 훌륭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보통 좋은 이념이나 사상, 운동, 정치 등을 강력한 의지력으로 진행하는 경우이다. 이럴 경우엔 그 뜻이 좋고 또 그 뜻의 성취의 결과가 되도록 많은 사람과 사회 전체를 위해 좋으므로 좋은 대우를 받는다. 보통 기존이 독재나 나쁜 정치에 맞서 싸우는 이들의 경우엔 민주 투사, 인권 변호사, 부패 세력과 대결하는 정치인이나 공무원 등이 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강한 정신력, 강한 의지 등이 된다. 종교계에서도 있을 수 있다. 문화, 예술, 산업 등 다양한 영역에서도 가능하다. 기본의 미성숙한 구조와 프로세스, 인간적 요소 등에 맞서 싸우면 그것을 일소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전체 시스템의 성숙을 가져오며 좀 더 많은 이들이 혜택을 받게 된다.


근본주의적 성향이 잘 사용된 경우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사실 본인의 근본주의적 성향에 본인이 매몰되지 않고, 그것을 필요한 곳에 잘 사용하되 끊임없이 다른 배려와 통찰과 사유를 멈추지 않았기에 가능한 것이었을 것이다. 즉 '근본주의자였기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근본주의자임에도 성공한 것'이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전체를 살피는 본인의 끝없는 노력과 애씀에 의해서 말이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근본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보통은 악하게 표현되거나 독재자나 독단적인 사람으로 여겨진다. '나만이 옳고, 내가 하는 것만이 맞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개인만이 아니라 그러한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가 하는 것만이 옳거나 맞을 순 없다. 불가능하다. 하지만 성향상 혹은 문화상 그걸 고집하는 것이다. 근본주의 성향이 큰 사람은 어찌보면 무척 순진하거나 순박하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어떤 것을 생각할 때 '한 가지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교활하면 이것저것 다 따지거나 고려할 것인데 이 사람들은 오직 하나만 떠오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경우에 따라 장단이 있다. 그래서 종교, 신념, 사상 등 집단적 흐름에서 쉽게 말려들기도 하고, 자신이 맞다고 여긴 사안이나 사람의 권위에 쉽게 복종하기도 한다. 자신이 선택한 후에는 완전히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종교 영역에서 특히 그렇지만 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학문의 계파, 예술적 경향, 철학이나 사상의 흐름 심지어는 과학과 기술에서조차도 존재하는 문제이다. 즉 크고 작을 지언정 인간에게는 그런 경향성이 있는 것이다. 일종의 동물적 본능이랄까.




"아니, 근본주의적 경향은 인간의 어떤 고집이나 특성 아닌가? 이게 어떻게 해서 '동물적 본능'이라는 거지?"라고 의문이 들 수 있다. 한번 가만히 보자.


'나만이 옳다. 나만이 맞다'는 것은 생각이기 이전에 일종의 '감(느낌)'이다. 그러한 느낌이 먼저 있고 그러고 나서 그 느낌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가지 생각적인 근거를 갖다 붙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 우리는 그 생각이 맞기 때문에 그에 따라서 '맞다'라고 하는 느낌이 붙는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반대인 것이다. 뇌과학의 몇몇 연구에서도 이러한 측면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있기도 하다. 물론 완전히 그렇다기보다는 상당 부분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나만이 옳다. 나만이 맞다'는 이런 감(느낌)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떤 부분이 동물적 본능일까?


여기 한 마리의 동물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무슨 동물이든 상관없다. 그가 초원에 있다. 자, 이제 이렇게 초원에 있는 그는 특별한 일이나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은 자기가 제대로 있다고 느낄 것이다. 상황도 제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뭔가 불안해하며 어쩔 줄 모르며 있을 것이다. 만약 밖에서 그 동물을 본다면 안절부절, 왔다 갔다 하며 끽끽 대는 게 보일 수도 있다. 물론 실제 포식자나 어떤 위험 상황이 발생하면 자기보호본능에 의해 경계 모드로 들어갈 것이고, 긴장의 교감신경이 발동하면서 '싸우기-도망가기' 모드로 바뀌어 행동을 취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자 않는 한 보통 동물들은 그냥 '아, 좋다. 이제 맞다. 모든 게 좋다'는 감으로 있을 것이다.


야생에서와 달리 비정상적 스트레스를 받는 동물원의 동물들 중에서는 상당 수가 마치 인간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신경질 적인 모습이나 불안증, 우울증의 상태를 보여 준다고 한다. 인간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야생에서 정상적으로 사는 동물들은, 평상 상태에서는 늘 '모든 상황이 정상이다. 내가 맞다. 내가 옳다'는 감으로 있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게 우리 인간이 가지는 '내가 맞다. 내가 옳다'는 동물적 본능으로서의 감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즉, 이렇게 보면 필요한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이다.


심지어 포식자가 나타나거나 지진이나 화재 같은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 급박한 순간에 해당 동물은 비록 본능적이고 감각적으로 움직인다고 해도 결국엔 '이렇게 움직이고 반응하는 게 맞다'는 느낌 위에서 움직일 것이다. 만약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아예 모르고 또 자신의 급박한 반응이 뭔가 틀린 것이라고 느낀다면 우왕좌왕하여 얼어붙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보통 공포증, 불안증, 공황 장애증이 있는 사람들의 상태가 그렇다). 하지만 야생의 동물은 무의식적으로 '맞다'는 느낌에 기반해서 그 위험을 빠져나가는 여러 선택과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물론 막다른 곳에서 뱀 앞의 쥐나 사자 앞의 사슴 등처럼, 어떤 포식자 앞에서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는 상황에서의 피식자는 더 이상 도망가는 것을 포기하고 가만히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상황적으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그렇게 하는 또 하나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위 글을 비교적 길게 쓴 이유는, 우리 인간이 가지는 근본주의적 성향의 기저가 바로 '내가 옳다. 내가 맞다'의 본능적 느낌에 기반한 것일 수 있음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 '나만이 옳다. 나만이 맞다'는 것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가 더 붙는다. 바로 인간 특유의 언어적 '개념, 분별, 앎'의 기능이다. 즉 인간이 지닌 '관념, 생각, 사유를 절대 사실화하는 기능'이다. 언어적 사유 기능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주의할 것은 이때의 언어에는 '언어적 언어'와 '비언어적 언어'가 모두 포함된다는 것이다. 혹은 '언어적 앎'과 '비언어적 앎'이라 할 수도 있다. 모두가 인간적 앎의 영역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언어 혹은 '인간적 앎'은 사실이 아니라 '사실이다'라는 믿음이다.


인간이 내부와 외부에 대해 가지는 모든 앎, 모든 파악은 '사실 그대로'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사실 그대로' 대해 인간의 오감과 그 오감에 대한 감지와 그에 덧붙여진 모든 언어(개념, 분별, 구분)에 불과하다.

(사실은 '사실'과 '사실 그대로'라는 말 조차도 인간이 만든 언어, 개념이기에 이것을 이용하는 것 마치 의자 위에 앉아서 의자를 들려는 행위와 똑같게 되는 근본적 한계는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임시로 빌려서 사용해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근본주의적 성향이 큰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라면 모두 이 기제에 빠져 있다. 하나도 예외가 없다. 그래서 '우리 안의 근본주의적 성향'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종의 근본 특성 혹은 한계로서, 내부와 외부의 모든 것을 인간적 오감으로 감각하며, 여기에 인간적 앎(언어적, 비언어적 모두 포함)을 가져다 붙이는 이 벗어날 수 없는 구조. 그리고 그렇게 갖다 붙인 모든 언어적 앎을 '단지 앎이 아니라 절대 사실'이라고 믿는 이 믿음의 행위. 일종의 '근본적 근본주의'인 셈이다. 이것을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아무 방법이 없는 것인가? 개인적 성향이든 인간종으로서의 특성화 한계이든 이러한 틀은 인간의 존재 양태 그 자체이므로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다는 말일까?


사실 우리 대부분은 이에 대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게 보통이다. 이건 그냥 너무 당연한 것이고, 내가 아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당연히 '사실'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그 사실에 기반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또 대응을 한다. "여기에 무슨 잘못이 있나?" 보통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항상 우리 안의 그 '본능적 근본주의'의 감옥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다. 눈치채지 못하므로 벗어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한 성향이 좀 강한 이들은 일상과 삶에서도 좀 더 강하게 표현하고 행동하며 살아갈 것이고, 약한 이들은 약하게나마 발동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 성향 창리와 별개로 모두가 품고 있기에, 상황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근본주의적 성향이 발동되는 상황이 되면 모두가 함께 매몰되는 것이다. 주로 집단적 흐름에서 그렇게 된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러한 성향 혹은 본능은 결코 잘못이라거나 죄악 등이 아니다. 그냥 하나의 필요 기능일 뿐이다. 진화의 과정 상 그게 효용성 있고 유리하니까 생겨난. 그러므로 이것 즉 '관념의 절대 사실화' 그리고 '내가 옳음'의 이러한 현상들을 없애려 하거나 멈추려 하는 건 실패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도 또한 또 하나의 근본주의적 시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근본주의적 느낌이 맞다'는 것과 '근본주의적 느낌이 틀렸다'는 것은, 내용상으로 반대이지만 결국 동일한 현상이다. 즉 극성만 다를 뿐 같은 몸체의 두 현상이란 말이다.


그래서 이 사안에 있어선 '다양성'도 최종의 답은 아니다. 다양성의 추구는 어느 정도는 일방향적 근본주의를 치유하고 수정하는 효능은 분명 있다. 그러므로 '다양성의 존중, 활성화, 확대'는 아주 유용한 시도이자 전략이 되며 장려할수록 좋다. 그러나 만약 '다양성을 절대화' 하면 또 하나의 근본주의가 될 수 있게 된다. 근본주의도 다양성도 모두 잘 사용되어야 하는 도구이다. 이렇게 접근해야 한다.




정리하면 이렇다.


우리 인간에게는 모두 '근본주의적 경향성'이 존재한다. 그 모든 다양한 내용과 상관없이 그것의 정체는 사실 '나만이 옳다. 나만이 맞다'는 느낌일 뿐이다. 종교, 사상, 이념, 철학, 윤리, 문화, 문학, 예술, 기술 등 인간의 모든 영역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그런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름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효용성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분히 항상 자신의 정상성, 옮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어떤 동물적 본능으로서의 느낌일 수 있다. 즉, '나는 제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원초적 감인 것이며 이것은 누구에게라도 필요한 기본적 느낌이다. 동물원의 동물이나 인간이 아닌 한에는, 그리고 특별한 경우들을 빼곤 자연스러운 야생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에게선 이러한 기본 '자기 확인 느낌'이 항상 존재하게 된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 일종의 뇌의 '디폴트 상태'인 것이다.


인간은, 여기에 특유의 '언어 기능, 앎의 기능'이 합쳐지면서 이제 '내가 옳다'만이 아니라 '나만이 옳다. 내가 느끼는 것만이, 내가 생각하는 것만이, 내가 행동하는 것만이 옳다'로 확장된다. 즉 자신이 가지는 생각, 분별, 앎, 관념 등을 '사실화' 시켜서 그것을 '절대 사실'로 여기며 나아가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믿는 종교와 그 종교의 교리, 자신이 강하게 실현하고자 하는 신념과 이상, 철학적이거나 윤리적인 가치관, 문화적이거나 예술적인 흐름, 인간관, 세계관, 간단한 삶과 일상에서의 법칙이나 원리, 가장 간단한 생각 하나 등까지 모두 포함해서 우리는 모두 '나름의 근본주의자'들이 되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실은 모두가 같다. 예외가 없다.




그래서? 그래서 뭘 어쩌자는 말인가?


그러면, 우리 모두가 어쩔 수 없는 근본주의자이고 그 무엇을 해도 모두 근본주의의 카테고리에 속한다면 이제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이런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왜냐하면 아무리 이러한 식으로 본다고 해도 이것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뭔가를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아니 아예 신경 조차도 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든가 말든가 우리는 그냥 계속 살아갈 것이다. 생각할 것이고, 행동할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할 것이고 또 때로는 상황과 조건에 의해 하고 싶어도 못하며 살 것이다. 뭔가 차이이고 뭐가 문제인가?


사실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우리 인간의 기본 존재 양태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자연'이다. 그러나 자연도 말하자면 거친 자연이 있고 좀 더 순일한 자연이 있기도 하다. 우리 인간이, 어쩔 수 없는 본능적 반응과 개념의 절대 사실화 반응, 그것과의 동일시 반응 등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해도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사는 것과, '그것이 전부와 절대가 아님'을 눈치채고 사는 것은 분명 차이를 만들어 낸다. 그것도 아주 큰 차이를 말이다.


그러므로 핵심은, 근본주의 경향을 모두 없애거나 무시하거나 멈추는 게 아니다. 그게 아니라 이 전체 구조, 구도, 프로세스의 정체를 눈치채는 것이다. 제대로 눈치채고 나면 그러면 그다음은 또 그에 맞추어 다름 프로세스들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 뭔가 모르던 것을 눈치채면 자연스레 그 이전과는 다르게 반응하고 행동하게 되듯이 말이다.


인간은, 어떤 경우든 계속 지금까지 해 왔듯이 자신의 옳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믿을 것이고, 자신의 생각을 절대 사실화할 것이고, 그 절대 사실화된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살 것이다. 이러한 모든 과정과 흐름은 최대한 잘 사용되면 된다. 그 자체에 아무 문제가 없다. 우리가 하여야 할 것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근본주의'에 대해서 어디까지만 근본주의이고 그 이하는 아니다라거나, 너는 근본주의이고 나는 아니다라거나, 이것은 근본주의이고 저것은 아니다라는 접근은 한계가 있음을 보아야 한다. 물론 상대적인 차이는 분명 있으며, 좀 더 심각하고 경직된 근본주의는(종교에서든 그 어디에서든) 많은 사람과 사회에 불필요한 고통을 야기시킬 수 있으므로 되도록이면 점점 더 없애가거나 멈추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우리의 '근본주의'에 대한 대응책이 되어선 안 된다.


필요한 곳에선, 필요한 근본주의를 계속 활용해야 한다. 과거의 독재나 인간 문명 속의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근본주의가 필요하다면 그것을 지혜롭게 차고, 세우고, 실행하면 된다. 다만, 그것은 그것대로 진행하면서도 그 기저에는 나와 너의 공통된 이 인간적 근본주의 성향, 우리 안의 근본주의에 대해서는 항상 눈치채고,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특정한 것만이 근본주의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빠져 있는 본질적 근본주의를 눈치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모든 것이 근본주의이므로 어쩔 수 없다 등이 아니라, 제대로 알고 제대로 대처하는 것이다.


사실 눈치챔과 자각은 노력이나 의식적으로 애써서 늘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한 번 제대로 확실하게 눈치채는 것이 필요하며, 그 순간 그것으로 끝이긴 하다. 하지만 그 전이라도 의도적으로 유념하는 것은 분명 도움은 된다. 그러므로 포기하거나 멈추지 않으면 된다.


물론 이러한 접근은 건물이 기초와 같은 영역으로서의 접근 혹은 수학에서의 기본 공리와 같은 의미의 접근이며, 세부적이고 실제적인 적용에서는 또 여러 가지 응용, 적용, 활용을 능동적이고 지혜롭게 만들어 내야 한다. 큰 나무들이 있으면 집이든 다리든 무엇이든 만들 순 있지만 나무 그대로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세부적인 공작과 제작을 해야 하듯이 말이다. 디테일한 부분은 각자의 눈치챔과 자각과 통찰과 애씀에 따라서 추가로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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