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종류의 '생명과 존재성'에 대한 차별 없는 배려와 존중
개인적으로, 여건이 되면 오래도록 전하고픈 캠페인성 주제가 하나 있다.
바로 '인간도 동물이다'이다.
부정, 긍정의 뜻이 미리 들어 있지 않은 드라이한, 하지만 가슴 따뜻한 언급으로서의 말이다. 엄중한 통찰로서의 것이기도 하다.
보통 잔인함을 말할 때 동물들의 그것을 가져와 비유하곤 한다. 그러나 동물들은 생명 유지를 위한 선에서 자연스러운 행동으로서 행하는 것일 뿐 인간처럼 의도적인 잔인함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포식 행위 등을 '잔인'하다고 할 수는 없다.(범고래 등에서 생존을 위한 포식 행위가 아닌 유흥으로서의 피식 동물 괴롭힘 현상 등이 관찰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극히 예외의 경우라 볼 수 있다)
반면 동물들이 지니지 못한 좀 더 보편적이고 의도적인 선함과 그 행동을 인간은 할 수 있다. 물론 동물들도 기본적인 상호 부조와 협력은 하고 있지만 인간은 그에 더 해서 좀 더 확장된 의미의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은 '인간은 동물과 달라'라고 많이들 느끼며 생각하고, 또 그런 측면이 분명 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다시 '인간도 동물이다'를 선명히 명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항상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일까?
비록 동물종 중에 인간종이 언어 기능을 진화시켰고 그리고 정교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줄 알기에 여타 동물들과 다른 조건에 있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조건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동물이다.
동물이기 때문에 여전히 어떤 미성숙과 원시적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이 경우엔 그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다. 그래서 직시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숱한 개인 간, 집단 간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직시해야 하고 또 점점 극복해야 한다. 이건 하나의 당위이다.
하지만 '인간도 동물이다'는 언급은, 오히려 뭔가 가슴 따뜻해지고 마음이 열리는 것과 관련된 말이다.
우선은 다른 동물들과의 건강한 유대감과 그들에 대한 존중이다
비록 인간이 식용으로 수많은 동물을 도살하고 또 먹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생존을 위해 하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과도한 측면이 있으므로 줄일 것은 줄여야 한다. 채식주의 운동 같은 경우가 그런 측면에 대한 인간 스스로의 움직임일 것이다.(여기서는 채식을 해야 한다, 아니다 혹은 채식주의가 옳다, 그르다를 말하진 않는다. 각자 자신의 판단에 의해 선택을 하면 될 일이다.)
비록 하나의 가능성이지만, 아마도 미래에 세포배양 등의 기술로 어디서든 인공 고기를 저렴하고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면 지금과 같은 도살 문명은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구글의 CEO와 빌 게이츠 등도 이 영역의 사업에 투자를 하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도 이 방향이 바람직하다고 보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생명 존중과 환경을 위해 무조건 동물을 일체 먹지 말아야 한다'거나, 반대로 '위선이다. 살기 위한 것인데 먹으면 어떤가. 식물은 생명이 아닌가' 하는 식의 논점은 아니다. 사실 고기를 먹는다고 또 안 먹는다고 해서 어떤 문제가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 행위 이전의, 행위와 별도로, 그 바탕 인식의 문제가 더 핵심인 것이다.(물론 당장의 실천, 실행의 요소를 중시하고 싶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우선 생존을 위한 식용 외의 영역에서는 인간은 동물에 대한 모든 잔인한 행위와 착취와 해끼침을 멈추어야 한다. 왜? 인간도 그들과 같은 동물이기 때문이다. 무슨 완전히 다른 별 개의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겸손' 같은 것도 필요 없다. 같은 동물이므로 존중이 당연한 것이다.
이와 관련된 것이 '동물권'의 주제이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므로 이 글의 마지막 장에서 '인권' 주제와 함께 다룰 것이다. 바로 '모든 종류의 생명과 존재성에 대한 공정한 배려와 존중'의 주제이다. 우리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동물권과 인권은 같이 간다.
또 하나의 것은, 인간 스스로에 대한 통찰의 측면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동물임을 항상 알아채고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미성숙성이나 원시성의 존재를 포기하고 받아들이라거나, 동물적 잔인함이나 욕심, 욕구 등을 정당화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다.
'동물임을 알아챈다'는 것은, 스스로의 한계를 객관적으로 자각한다는 의미이다. 한계를 자각하므로 망연자실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떠어떠한 한계가 분명 있으므로 그런 측면을 선명히 잘 보고, 스스로 그리고 서로서로 좀 더 책임지고 성숙하게 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드라이한 측정과 그에 바탕한 적절한 대처'로서의 의미이다.
동물성이 있으므로 스스로 실망하거나 상대방을 손가락질하거나 하는 게 아니라, 또 있는 것을 없는 양 하거나 모른 척하거나 억압 및 회피, 정당화하지 말고, "아직 너와 나, 우리에게 이러저러한 한계와 현실과 특성이 있으므로, 우리 좀 더 잘 살기 위해서, 좀 더 함께 행복해 지기 위해서 이러저러한 점을 잘 보고, 조심하고, 유의하고, 함께 품고 그리고 넘어서 갑시다!"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숙한 대응이다.
세 번째는, 인간성의 왜곡을 극복하고 그 원형성을 다시 찾는 것이다
보통은 '동물성'이라고 하면 뭔가 미성숙한 측면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동물성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던 그리고 잃어버리고 있는 어떤 원형성이기도 하다. '원형성'은 인간들이 스스로의 왜곡이나 미성숙성으로 놓치고 있는 본연의 어떤 '자연성'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은 인간성도 본래는 그 자연성, 원형성, 동물성을 떠날 수 없다. 같은 것이다. 벗어나는 게 오히려 불가능하다.
다만 인간 특유의 사유 능력이, '동물적 생존 본능, 동물적 보호 본능, 동물적 이익 추구 본능'에 더해져서 다른 동물들보다 훨씬 더 왜곡되고 확장되고 빗나가게 된 측면이 있다. 일반 동물들도 물론 그런 왜곡성을 지닌다. 동물이라고 완전히 순수하기만 한 게 결코 아니다. 다만 그 정도가 인간에 비해 훨씬 약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곧잘 한탄하곤 하는 '타락한 인간성'의 그 문제이기도 하다. 타락했다고 느끼고 여긴다는 말은, 타락하기 전의 그것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또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도 동물이다'는 통찰은, 인간이 그 본래의 자연적, 원형적 동물성에서 벗어나는 것을 스스로 눈치채고 스스로 경계하게 만든다. 인간이라고 무슨 특별하고 어마어마한 존재가 아니다. 무슨 별스런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 여기는 '만물의 영장이니, 특별하니' 하는 건 사실 인간들 자신의 사유 기능이 만들어낸 순전한 자기 착각에 불과하다. 인간도 그저 자연 안에서 살고, 그 흐름을 타며 사는 한 존재일 뿐이다.
단, 여기서 말하는 '자연'은 숲이나 강 등의 좁은 의미의 자연만을 말하는 건 아닌다. 그런 것들조차도 자연의 작은 한 일부일 뿐이다. 실제 자연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그 흐름'을 말한다. 우주 전체로서의 자연.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으로서의 자연.
흔히들 인간이 만든 어떤 인위적인 것이나 인공물들은 자연이 아니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건 오해이고 오히려 교만이다. 응? 인공을 자연이 아니라고 하는 게 교만이라고? 무슨 말이지?
인간도 그냥 자연 속의 한 요소이다. 혹은 자연 자체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슨 짓을 하든, 무엇을 만들든 모두 자연의 일부가 될 뿐이다. 약간 낯설겠지만 이것은 '자연'이라는 개념에 대한 하나의 확장된 관점이기도 하다. 그러면 질문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무엇을 만들어 내어도, 파괴해도 괜찮다는 말인가?
물론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다. 같은 자연이라도 좀 더 순일하고 순연한 자연이 있다면 좀 더 혼란스럽고 격렬한 자연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게 자연이지만 이왕이면 좀 더 순하고 질서 정연한 자연을 만들고 누리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게 인간 자신에게도 좋다.
그런 의미에서 '왜곡된 인간성'을 극복하고 그 원형성을 다시 찾는 것이 가능하고 또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위한 하나의 좋은 방편이 바로 '인간도 동물이다'는 통찰이다.
네 번째는, 인간 사이의 차별과 혐오 등을 넘어서게 되는 효과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도 차별하지만 같은 인간끼리도 차별하고 혐오하려는 습성이 있기도 하다. 다행히도 인간의 역사는 부단히 그러한 인간 간 차별과 혐오, 충돌 등을 극복하고 없애가는 쪽으로 발전해 왔다. 현대에서는 성숙한 사회일수록 부당한 차별과 혐오가 적다.
첫 번째 장에서도 말했지만, '동물권'이라는 게 있다. 동물들의 권리를 말한다. 인간에게 함부로 대접받지 않게 하는 것, 인간이 함부로 동물을 해치지 못하게 하고 잔인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 함부로 착취를 하지 못하게 하는 측면에서의 권리이다. 옛날에는 인권만 있었지 동물권은 아주 낯선 개념이었지만 지금은 많이들 인식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아직 그 인식에 있어 초기 단계이다. 하지만 동물보호법 등이 점점 더 구체적인 모양새와 실행력을 갖추어 가고 있다.
보통 동물권을 말하면 "아니, 사람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데 무슨 동물의 권리야. 인권부터 챙기고 사람부터 챙겨라."라고 반응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사람의 문제 때문에 동물권에 대한 인식과 그 실행이 필요한 것이다.(또한 동물권과 인권을 따로 챙길 필요가 없다. 두 가지 모두 중요하고 의의가 크므로 두 권리를 동시에 챙기는 것이 가장 좋다.)
동물권은, 단순히 동물의 권리에 대한 게 아닌다. '생명과 존재에 대한 권리'의 주제이다. 그리고 그 생명과 존재엔 당연히 인간도 포함된다. 그런데 만약 같은 생명과 존재의 권리를 지니고 있는 동물들이 아무런 권리가 없다고 하고, 그래서 인간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함부로 할 수 있다고 하자(사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 무슨 일이 발생할까?
바로 '생명과 존재' 자체에 대한 경시와 무시, 차별과 혐오, 착취와 죽임으로 연결되게 된다.
인간도 동물이다. 주의할 것은 '인간도 동물이다'는 이 말은 "그렇게 인식해 주세요. 그렇게 받아들여 주세요."라고 사정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고 진실이다. 아무도 피할 수 없고 예외가 안 된다. 그걸 앞서서 계속 말했던 것이다. 이건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모두에게 인식되고 있는 엄연한 본래 상태이다.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고통을 가하는 경우를 보자. 인간이 다른 인간들을 부당하게 차별하고 혐오하고, 착취하고 죽이는 것은 그를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그냥 다른 '동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조차도 제대로 존중하고 배려한다면 같은 인간은 더더욱 그리되는 것이기도 하다. 약간은 추상적인 연동이지만 그렇게 연결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누구든, 사람이든 동물이든 '생명과 존재'로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의식은 그것을 인식하고 있다. 이 부분이 핵심이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동물권과 인권은 같이 간다.
동물에 대한 무책임한 모든 인식과 행위는 그대로 다른 인간들에게로 향하게 된다. 의식적으로. 더 무서운 건 많은 경우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경시, 무시, 차별, 혐오, 착취, 죽임이 이제 타인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향하게도 된다는 것이다. 이 경우는 다분히 무의식적으로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인간 경시, 인간 차별, 인간 착취, 인간 생명 경시 등이 되겠지만 개별적으론 자기혐오, 자기 착취, 자기 생명 경시, 자기 존재 경시 등으로 가는 것이다. 그냥 이론이나 생각일 것 같은가? 아니다. 지금 우리 인간들이 실제 그렇게 하고 있다. 상대에 대해 그리고 스스로에 대해.
'인간도 동물이다'를 통해, 우선은 타 동물들의 생명과 존재성에 대한 부당한 폭력을 점점 멈추게 된다. 동물권 등의 개념도 도구로 사용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명과 존재성에 대한 원형적 존중을 바탕으로, 이제 같은 인간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게 되어야 한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곳이라면 더욱더 성숙하게, 아직 부족한 곳이라면 인식과 법과 사회 구조를 발전시켜서 말이다.
다섯 번째는, 인간이 인간에게 가지는 과도한 환상을 잦아들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인간은, 자신의 동물됨과 동물성에도 불구하고 언어로의 사유 기능과 도구의 사용으로 인간 스스로를 동물 이상의 어떤 존재로 보려는 습성에 있다. 사실은 착각이다.
물론 그런 측면이 완전히 없는 건 아니지만, 지나치게 자신과 상대들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러한 환상은 때로 정확한 판단을 흐리게 한다. 또한 환상이 깨짐으로 크게 실망하게도 된다. 환상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작용들이 문제라 하겠다.
이 환상성에는 플러스, 마이너스적인 게 모두 포함된다. 즉 인간을 불필요하게 악마화 하는 것은 마이너스적 환상이겠다. 그냥 하나의 동물적, 본능적 행동의 일환인데 거기에 온갖 망념을 덧 붙여서 상대를 혹은 자기 자신을 악마화 하는 경우들이다. 이것은 환상이므로 강하면 강할수록 부작용들도 커지게 된다. 반대 환상은 인간에 대한 과도한 미화, 신격화, 숭배화 등이다. 꼭 사이비 종교 등만의 문제가 아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착각들이다. 이 경우도 역시 '본래대로의 것'이 아니므로 여러 부작용들이 생겨나게 된다. 플러스든 마이너스든 환상을 품는 이와 그 환상의 대상이 되는 이들 모두가 고통과 혼란에 빠지게 된다.
자신과 타인 모두의 '인간의 동물됨'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면 이런 환상의 문제에서 많이 자유로울 수 있다.
조금 일찍 이런 측면을 깨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10대와 20대에는 이 환상을 많이 품는다. 아니, 환상을 품는다기 보다는 '인간 자체'의 속성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른과 사회가 잘 알려주지 않아서도 그렇고 본인도 스스로 세밀히 탐구하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살아온 세월이 많아진다고 해서 또 다 잘 파악되는 것도 아니다. 본인이 여전히 그 환상성을 눈치채지 못하고, 넘지 못하고, 깨치지 못하면 크게 다를 바 없게 되기도 한다.
'인간의 동물됨'을 파악한다는 것은, 인간에 대해 미리 실망하거나 포기하거나 '안 돼'라고 여기라는 말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인간이 아무리 스스로 날고 긴다고 해도 그것과 상관 없이 여전히 동물성과 함께 존재한다는 현실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객관적 인정을 바탕으로 이제 좀 더 효율적이고 적절하고 지혜로운 대응과 대처를 하는 것이다.
동물성이란, 나쁜 게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특성이다. 대뇌 피질이, 전전두엽이 아무리 발달했다 해도 인간성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여전히 동물성이다. 이러한 측면 때문에 종종 실망들도 하게 되지만 반대로 존재하는 동물성을 기꺼이 품어 주는 것 그리고 품으며 넘어서는 것이 우리에게 더 좋다.
그것에 매몰되고나 반대로 거부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말이다.
가장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자기존중'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라는 존재, 그 생명성에 대한 인식과 존중이다. 이기적이 되어 자기 이익만을 챙기고 그것을 위해 다른 존재와 생명을 이용하고 착취하라는 말이 아니다. 자기와 다른 모든 것들의 생명성과 존재성, 그 자체의 본래성, 소중성을 '동시에' 자각하고 인식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게 같은 것임을 아는 것이다. 나와 너, 자기와 타기가 모두 동일한 대상이자 주체임을 자각하는 것을 말한다. 같이 적용되고 같이 움직이는 구조임을 알아채는 것이다.
결어로 말해 보자면, 물론 '인간도 동물이다'라는 이 하나의 인식이 인간성의 원형적 회복을 위한 유일한 방편은 아닐 것이다. 그 외에도 유용한 여러 접근과 방편이 있을 것이다. '인간도 동물이다'는 그 중에서도 일종의 '객관적 자가 인식'의 방법론이다. 자신의 위치, 입장, 처지를 스스로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알아채고 눈치채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에 대해서 되도록 '본래 그대로의 것으로' 인식하는 것과 '본래가 아닌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큰 차이를 만들기 때문이다. 전자일수록 좀 더 적절하고 건강한 인식과 그에 따른 대처가 가능하게 된다. 후자일수록 왜곡되게 인식하고 잘못된 대처를 하게 된다. 당연히 전자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