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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May 08. 2017

'생각을 믿지 않기'가 마지막이 아닌 이유

'생각을 믿지 않기'를 좀 더 잘 하게 되는 방법

'생각은 생각일 뿐 사실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은 '생각은 사실이다'라고 여겨서, 그 믿음 때문에 '다만 생각'일 뿐인 것을 '절대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여러 고통이 생기게 되어서 나온 말이겠습니다. 


줄여서 이야기하면 '생각을 믿지 않기'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위는 '생각을 무조건 사실로 믿기'입니다. 


가령 나를 괴롭히는 생각이 하나 있는데, 그게 다만 생각일 뿐인데 그 생각을 이제 믿으면, 즉 그 생각대로 뭔가 절대적으로 그러하다고 믿으면 그에 수반해서 여러 가지 부정적 후속 현상이 생기게 됩니다. 


유용할 때는 괜찮을 수 있습니다. 생각에 대한 믿음이 말이지요. 오히려 그 유용성 덕분에 인간은 여러 잇점을 누려 오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그렇지 않을 때입니다. 즉 특정 생각이,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그 생각을 믿고 절대화 하면 그게 나에게 손해가 되거나 나를 괴롭히는 게 명확한 경우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을 경우에 그렇게 한다면 이제 '생각에 대한 믿음'은 더 이상 유용한 도구가 아니라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주: 이 경우 '어떤 생각은 사실이고 어떤 생각은 사실이 아니다'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각은 '모든 생각'입니다. Some이 아니라 All입니다. 즉 '생각을 사실로 믿지 않는다'는 말은 '모든 생각이 사실이 아님을 믿는다'와 같은 말입니다. 특히 '사실'이라는 것조차도 생각일 뿐임을 눈치채야 합니다. 물론 '생각 믿지 않기'도 다만 하나의 생각일 뿐입니다.

만약 '어떤 생각은 사실이고 어떤 생각은 사실이 아니어서, 그 사실이 아닌 생각을 믿지 않는다'라고 하면 이 방법론 자체가 효과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실'이라는 것부터 생각에 불과함으로, 생각에 불과한 '사실 '의 여부를 정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생각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사실이 아닌지 말이지요.

여기서는 상세히 쓰지 않습니다만, 보통 우리는 '사실 여부를 결정짓는 것'이 아주 간단하다고 여기지만 조금만 질문을 하며 파고 들어가 보면 결코 간단치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 결국 이 모호함으로 인해 '내 생각은 무조건 사실이다'는 생각이 다시 전체를 오염시키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처음과 같게 됩니다. 즉 '생각은, 그것이 무엇이든 절대 사실이다. 나는 내 생각을 무조건 믿는다'로 가게 됩니다. 이것은 다분히 무의식적인 의식의 흐름이므로 굉장히 주의해서 봐야 합니다.

심지어, '내 생각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결국 '내 생각이 사실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사실로 믿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결국 같은 행위이고, 계속 의자 위에서 의자를 들려고 하는 것 뿐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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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하나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있습니다. '생각을 믿는 것'과 '생각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의 차이입니다. 사실상 거의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앞의 문장이 뒤의 문장을 포함합니다. 왜 그러냐면 '무엇이 사실이다' 혹은 '사실이란 것이 있다'는 것도 하나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사실'이라는 것도 하나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사실이란 것도 하나의 생각일 뿐이라는 것'은 쉽게들 눈치채기 힘듭니다. '아니, 사실이 있고 허구가 있고 해서 구분이 되는 것이지. '사실'이란 것 자체가 생각이라구?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렇게 여길 경우가 많겠습니다.


그러나 엄중이 이야기하면 '사실(그 역인 허구도)'이라는 구분 자체는 만들어진 생각일 뿐입니다. 인간이 이 개념을 만들기 전에는 애초엔 없는 것입니다. 이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중에도 없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하지만 모든 개념은, 비록 만들어진 것이라 해서 허무하거나 무용한 게 아니라 나름의 유용성이 있습니다. 그 유용성 때문에 도구로 사용되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언어적, 비언어적인 모든 '개념'이 그러하다 하겠습니다.(참고로 '비언어적 개념'은 일종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직 언어화 되기 전이지만 거의 언어처럼 인간에게는 잡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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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주제로 돌아가서, 그래서 여기 하나의 솔루션으로 '생각을 믿지 않기'가 있게 됩니다. 


내게 떠오른 생각이란 것이 절대 사실이 아니라 다만 하나의 '설정'일 뿐임을 눈치챔으로써 즉 생각의 정체, 생각의 본래 모습, 생각의 본질을 눈치챔으로써, 나에게 생각이 떠오른다고 해서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만 생각일 뿐임'을 실시간으로 눈치채는 것입니다.(사실 '생각을 믿는다, 안 믿는다'는 말보다도 '생각의 정체를 눈치챈다'가 더 적절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생각이, 그 생각을 믿는 것이, 그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 생각을 허용하는 것이 유용하다면 그렇게 합니다. 잘 이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에게 떠올랐다고 해도 그것이 나를 괴롭히기만 할 뿐이고, 효용성도 없고, 심지어 타인까지도 괴롭히는 것이라면 이제 그 생각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절대화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사실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굳이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과거에 나의 그 생각에 부여했던 무의식적 '절대 사실의 자격'을 박탈해 버리는 것입니다. 무조건 그 생각, 내 생각, 특정 생각은 맞을 수 밖에 없다고 했던 그 자동 과정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각 때문에 겪는 불필요한 고통, 고민, 불안, 걱정, 두려움, 우울, 무기력, 슬픔, 분노 등을 겪지 않는 것입니다.(나아가 설사 그런 것을 겪는다 해도, 그 모든 겪음과 경험 역시 '다만 생각'에 불과함은 동일함을!)


사실 '생각을 믿지 않기'는 아주 바람직하고 훌륭한 관점이고 방법론입니다. 잘 되기만 한다면 많은 마음의 고통 그리고 현실의 고통을 없앨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되는 한은 잘 하면 좋습니다. 충분히 권고될 방법론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거나 이것만으론 뭔가 부족하게 되는 경우가 있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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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아주 미묘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눈치채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함께 살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미묘한 부분은 바로 '생각을 믿지 않기'를 할 때 여전히 '내가 그 생각을 믿는다, 믿지 않는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전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가.


'어, 내가 생각을 믿는 것,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럼 누가 한다는 말인가?'라고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는 누군가'란 게 과연 무엇일까요?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만들어진 하나의 개념인가요? 


자, 이제 '누구'를 설정할 때 생기는 이상한 부분을 잘 살펴 보십시요. 


'생각을 믿는 내가 있다'도 역시 하나의 생각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생각을 한다. 내가 생각을 믿는다' 역시 하나의 생각이란 말입니다. 즉, 우리는 무심결에 '여전히 어떤 주체가 있어서 그 주체인 내가 생각을 믿기도 하고 안 믿기도 한다'는 것을 절대 사실로 전제하는 데, 이 자체가 이미 하나의 생각을 믿는 것이 되기 때문에 결국 본래 하고자 하는 '생각을 믿지 않기'가 궁극적으론 실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보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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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우 가장 큰 문턱이, '나'도 생각이라는 것에 대한 눈치챔입니다. 


이것은 쉽게 눈치채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말도 안 되는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각이든 무엇이든 이 모든 것을 하는 행위의 주체인데 어떻게 내가 고작 생각이 돼? 내가 생각을 하는 거지. 내가 생각의 주체이고 주인이잖아.'


그러나,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나'도 생각입니다. 


'행위자, 주체'라는 것의 설정, 그러한 것이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생각입니다. '행위자, 주체'라는 것은 본래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의 언어 기능, 생각 기능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개념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그것(나)이 무엇을 한다는 것은 더더욱 개념 즉 생각에 불과하게 됩니다.


이렇듯 '주체가 있다. 행위자가 있다. 그게 '나'이다'는 것이 하나의 생각인데, 우리는 이 생각을 부정하면 뭔가 큰 일이 일어날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되니까요. 어떤 면에선 '죽음'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무의식적인 두려움일 뿐입니다. '주체, 행위자, 나'를 설정하지 않아도 우리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그렇게 해 보십시요. '나'라고 여겼던 이 무엇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어 왔는데, 지금 이 '주체 설정'을 그냥 놓아버려도, 그것을 굳이 설정하지 않아도, 의존하지 않아도, 무시해도 모든 건 그대로 흘러갑니다. 그 '주체 설정'이 없어진 것만 빼고 말이지요. 사실은 본래 항상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데, '주체 설정' 즉 '나'라는 설정이 그냥 괜히 옆에 서 있는 것 뿐입니다. 


물론 우리에겐 끝까지 일종의 자아감, 개체감, 존재감이라 할만한 어떤 원초적인 느낌은 남아 있게 됩니다. 어떤 '있음'의 느낌입니다. 그러데 이것은 그냥 느낌일 뿐입니다. 아마도 뇌 속의 어느 영역이 활성화 하면서 가지고 있는 느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냥 그런 '있음의 느낌'이라고 하면 됩니다. 이 느낌이 있다고 해서 이 느낌의 주체, 주인, 행위자, 존재자, 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연결은 그냥 하나의 설정일 뿐입니다. 그냥 '존재감의 느낌'이 있을 뿐입니다. '누가' 느끼는 게 아니라, 그냥 그 '느낌'이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 '있음의 느낌'에 '나라고 하는 주체, 행위자'라는 개념을 만들어 덧씌운 것입니다. 이게 잘못이거나 나쁘다는 게 아니라, 이러한 양태 자체를 눈치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걸 눈치채며 존재하느냐, 여전히 보면서도 못 본듯 하며 존재하는냐. 


마지막으로, 그러면 그 '마지막 있음의 느낌 혹은 그 마지막 있음'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답은, 그 '있음의 느낌'이 있을 때의 그 '있음'도 결국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있음-없음'이라는 쌍개념의 설정입니다. 인간이 '있다-없다'라는 개념을 설정하기 전에는 '있다'라는 것도 없습니다. 현재 그것을 사용하는 중에도 그것은 동시에 본래는 존재하지 않는 '다만 개념'입니다.


(단, 이 경우 이 '마지막 있음'은 비언어적 설정 혹은 개념이긴 합니다. 일종의 느낌적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언어 이전의 느낌입니다. 저는 '비언어적 언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존재감, 자아감 식으로 '감'이라고 했습니다. '있다'라는 좀 더 구체적인 언어적 이름표는 그 후에 붙여지는 것이겠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또 '주체, 행위자, 나'라는 추가 이름이 더 붙는 것이겠습니다. 이중으로 생각 혹은 설정이 붙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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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무엇을 어쩌라는 것이야?'라고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생각을 믿지 않기'가 고통을 없애는 좋은 방법론이 될 수 있는데, 그 전에 ''나'라는 것도 생각에 불과하다'는 먼저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그게 안 믿겨지면, 그게 안 받아들여지면 아무 것도 안 되는 거야?'"라는 식의 의문도 말이지요.


혹은 "좋다! '나'라는 것도 생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겠다. 믿겠다. 그런데 그래서 뭐? 그래도 변하는 건 하나도 없는데? 그걸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전과 이후가 아무 차이가 없는데, 이 짓을 왜 하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


다시 주제로 돌아갑니다. 


'생각을 믿지 않기', 이것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고통스런 생각, 불필요한 생각'을 처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그래서 필요할 때 잘 사용해서 나나 너를 괴롭히는 불필요한 생각은, 그냥 그게 생각일 뿐임을 눈치채고 보내버립니다. 그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좀 더 확실하게 하는 방법이 바로 '생각을 믿는/안 믿는 내가 있다' 혹은 '내가 생각을 믿는다/안 믿는다'도 생각임을 눈치채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 '숨겨진 생각'을 믿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생각을 믿지 않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글의 진짜 주제입니다.


'생각을 믿지 않기'를 하면서, 동시에 '행위자 혹은 주체인 내가 있어서, 그 내가 생각을 믿거나 믿지 않는 게 아님'을 눈치채는 것입니다. 그 마저도 생각임을 눈치채는 것입니다. '나' 마너도, '나'가 있다는 것 마저도. 그리고 그 나가 생각을 믿는다, 안 믿는다는 것 마저도.


하나의 요령을 더 해 본다면, 생각이 떠오를 때 이제는 '내가 생각을 한다'고 하지 마시고 '생각이 그냥 떠올라진다'고 관점을 바꾸어서 보는 것입니다. 즉 내가 주체이고, 주체인 내가 생각을 한다고 잡지 마시고 그냥 생각이 허공 중의 의식의 스크린에 쭉 흘러가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어떤 주체도 없고 행위자도 없이 말이지요. 그리고 여전히 '생각을 내가 한다'는 느낌이 있더라도 그것마저도 흘러가는 생각이라 눈치채는 것입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이 없어지거나 약해져야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생각과 느낌과 믿음이 강하고 선명하게 있어도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있어봤자 그 정체가 뭔지 알기 때문이지요.


사실은 이렇게 하든 하지 않든 생각은 본래 주체 없이, 행위자 없이 그냥 흘러가는 것입니다. 주체 없는 자각 혹은 인식의 초점에 잡히며 말이지요. 바람이 주체 없이 불고, 회오리가 주체 없이 생겼다 사라지듯이.


/


'어, 그러면 '생각을 믿지 않기'도 할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그 행위자나 주체 즉 '나'가 없다면 무엇을 하는 누구도 없다고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론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앞서의 논리나 논지를 따라간다면 말이지요. 그러나 어떤한 논리나 논지도 결국은 잘 이용하는 것이 목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굳이 '생각을 믿지 않기' 자체가 불가능하다 혹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유용하다면 잘 쓰면 될 뿐입니다.


필요할 때, 주로 부정적인 것을 처리하는 경우, 좋은 하나의 솔루션으로 '내 생각을 믿지 않기'를 실행하면 됩니다. 그냥 그 생각이 하나의 설정, 스토리, 이야기일 뿐임을 자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 자각이 선명하면 선명할수록, 그 생각이 떠오른다고 해도 절대화 하거나 사실화 하지 않게 되면 됩니다. 그래서 생각은 하지만, 그 생각에서 자유로운. 


이것이 잘 되면 잘 될수록 유용한 것입니다. 


그 과정 중에 '나'라는 것도 하나의 생각임을 동시에 유념하는 것입니다. 살펴주는 것입니다. 알아채는 것입니다. 눈치채는 것입니다. 잘 되지 않고, 선명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해 보는 것입니다. 되는만큼만 말이지요. 처음부터 꼭 선명하게 되거나 확실하게 되지 않아도 됩니다. 중간에 잘 안되더라도 멈추지 않으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필요할 때 '생각을 믿지 않기'가 점점 더 능숙하게 잘 될 것입니다.


/


이상이 '생각을 믿지 않기' 방법론에 대한 조금 더 깊은 접근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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