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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다은 Nov 06. 2023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말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무슨 뜻일까?

지난 학기 학생들과 이 명제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대학교 전공수업에서도 언어철학을 A플러스를 받았었는데. 내가 이해한 것은 그저 책에 나오는 설명을 외운 것일뿐이었구나 라고 최근 깨닫게 되었다.



지난 주말 남편과 견해차이로 긴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이게 웬 걸. 대화가 끝나고 나니. 그래서 뭐지? 하는 의문과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은 것과 같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고. 사실 대화 중에도 이미 깨달았다. 무의미한 말을 늘어놓으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것을.

비트겐슈타인은 자연과학지식처럼 명료하고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한 언어, 실제로 일어나는 사태와 일치되는 언어를 주장했다. 그 외에는 말 그대로 "무의미한" 명제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철학사에서 무수히 쏟아져나온 형이상학적 명제, 윤리적 명제, 전통 관습 규범에 관한 말들이다. 이는 참 거짓을 판별이 어렵고 검증도 불가능하다. 시대와 맥락에 따라 가치판단은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 종교, 윤리의 영역은 이제 언어의 영역이 이니다. 침묵하라는 것은 이제 말을 하지 말고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행위의 영역에서의 대화가 이뤄져야 한다.



부부간의 견해차이로 대화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본인의 살아온 방식, 가정환경, 문화, 관습, 가치관에 따른 것으로 서로의 것 중 어느 것이 옳다고 할 수 없고 그르다 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런데 그걸로 계속 대화를 하는 것은 도돌이표, 무의미,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하려다 보니 자신들도 모르게 양산되는 서로에 대한 비난과 상처의 말들이다. 그 대화의 장이 없었으면 생기지 않았을 상처들. 무의미하게 상처만을 주는 시간과 공간의 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확인한 것은 서로가 얼마나 다르고 그 간극이 얼마나 큰지 혹은 그 다름이 커서 나를 얼마나 별로인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걸 확인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즉, 애초에 말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의 유산을 되새겨야한다. 그는 침묵하라고 했다. 그것은 애초에 말로 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 주장하려면 행동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가치를. 그리고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싶다면 행동해야 한다. 무엇을? 상대의 가치를 내가 행위해야 한다.

또한 그것을 상대가 볼 수 있는 형태로 해야한다. 그럼 상대가 내 말을 잘 경청했구나라고 알아줄 것이다.  

상대를 반박하고 싶다면? 그것도 행위해야 한다. 나의 가치로 옳은 일이 이뤄지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행위로 대화를 하려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점이 있는데. 어쩌겠는가. 말이 비교적 가볍고 효율적인 수단인 것을. 자연과학의 세계가 아닌 실제 사람이 사는 세계는 참 느리고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친정엄마의 음식은 말을 하고있다. 친정엄마는 '사랑한다 우리딸'이라고 편하게 말로 하지 않는 대신에, 마트에서 장보고 부엌에 하루종일 서서 요리하고 반찬통에 담기까지 그 오랜 시간을 걸려 나에게 '사랑한다 우리딸'이라고 침묵의 한마디를 하고 있다.

사실 내가 듣고 싶었던 것은 못먹을 만큼의 음식이 아니라 그냥 말로 해주는 건데..

비트겐슈타인은 뭐라고 할까? 이렇게 철학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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