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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과 애쓰모글루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읽고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국가 빈곤의 차이

이 책의 주요 질문은 ‘왜 어떤 국가는 성공하고, 어떤 국가는 실패하는가’이다. (왜 ‘국가’는 실패하는가, 가 아니다.) 저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보는 성공과 실패의 척도는 ‘경제’이다. 어떤 국가의 대다수의 국민은 (물론 힘들게 연명하는 소수의 국민이 있을지라도) 삼시세끼 잘 챙겨먹고 좋은 사치품을 소비하며 행복한데, 어떤 국가는 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국민이 절대다수인지에 관한 것이다. 물론 어떤 국가는 가난할지라도 행복하다고들 하는데, 이런 경우는 논외로 친다. (예를 들어 네팔의 경우 가난하지만 행복지수가 전세계 1위라고 하는 조사결과가 있다. 이 조사가 진실일지에 대해선 의문의 눈초리로 바라볼 필요는 있지만, 이 책의 저자들에 의하면 이런 국가는 어쨌건 저쨌건 간에 실패한 국가라고 본다는 것이다.)


Why Nations Fail - Daron Acemoglu and James A. Robinson

저자의 논지에 따르면, 지리의 문제는 중요치 않다. (나는 이 논지에 반대하는데, 조금 이따가 얘기하겠다) 말하자면, 잘 사는 나라가 있고 국경을 맞댄 못 사는 나라가 있으며, 이 때문에 지리의 문제는 경제적 성공을 예측하는 데에 있어서 절대적인 변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민족성, 인종, 날씨, 문화 등등도 마찬가지이다. (이로 인해, 다이아몬드의 책 『총, 균, 쇠』는 실패한 가설이 된다. 지리를 가장 중요한 변수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가장 중요하게 보는 변수는 정치 제도이다. 말하자면 이 세계에는 ‘착취적 정치 제도’가 있고 ‘포용적 정치 제도’가 있으며, 이 두 정치 제도는 각각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경제 제도를 불러일으킨다. ‘착취적 정치 제도’는 ‘착취적 경제 제도’를, ‘포용적 정치 제도’는 ‘포용적 경제 제도’를. 착취적 경제 제도 하에서 어느 정도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사례가 있으나, 착취적 경제 제도는 또 다시 착취적 정치 제도를 강화함으로써 선순환의 경제 발전 구조를 이루지 못하고 가난한 옛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포용적 경제 제도는 포용적 정치 제도와 맞물려 순환하여, 장기적인 경제 발전 체제를 이루는 원동력이 된다.


좋은 얘기인가? 그렇다. ‘좋은 정치는 국가의 경제 발전을 시키는 원동력이 되고, 나쁜 정치는 국가의 경제 발전을 막는다.’ 정말로 좋은 얘기라, 독재의 여지가 있는 정치 지도자가 국가의 경제 발전도 같이 원할 때, 독재를 포기하도록 할 수 있다. 즉, 독재자로 하여금 착한 일을 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궁금한 것이 이것이던가? 책에서는 이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있었던 수 많은 국가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려 한다만, 무엇을 나타내는지 명확하지 않은 잘 정의되지 않은 명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아무리 많은 예를 들이대 봤자 아무 것도 설명되지 못한 그대로일 뿐이다. 단적으로, ‘포용적 정치 제도’와 ‘착취적 정치 제도’라는 용어만 잠깐 바꿔 봐도 이 주장이 아무 알맹이 없는 동어반복이라는 게 드러난다.


<포용적 정치 제도 → 좋은 제도> : 좋은 제도를 시행하는 국가는 성공한다.
<착취적 정치 제도 → 나쁜 제도> : 나쁜 제도를 시행하는 국가는 실패한다.
(하겠습니다. 그것이 약속이니까! - 고이즈미 신지로)

이런 거 말고 우리가 정말로 궁금한 게 무엇인지부터 살펴 보자. 실제로는 ‘왜 어떤 국가는 성공하고, 어떤 국가는 실패하는가’는 우리가 진정 궁금한 게 아니다. 당연하다. 누구는 성공할 것이고, 누구는 실패할 것이다. (적어도, ‘포용적 정치 제도를 시행해야 잘 산다’ 같은 당연한 말을 듣기 위해서 한 질문은 아니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런 것들이다.


1. 왜 잘 사는 나라는 대체로 몰려 있는가? (서유럽, 북아메리카, 동아시아 등)
2. 왜 못 사는 나라도 대체로 몰려 있는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나머지 아시아 등)


1번과 2번에 대해서 책이 답변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포용적 정치 제도는 왜 지리적으로 몰려 등장하는가? 여기에 지리적 요인을 처음부터 배제한 채 논지를 진행한 저자로서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가장 적절한 답변은 역시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일 것이다...하지만 나는 『총, 균, 쇠』에도 반대하는 입장이긴 하니,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 책에 대해서도 말할 기회가 생기면 좋겠다. 여기서, 우리의 개안적 대답은 그냥 "지정학"이라는 정도만 얘기하고 넘어가자.


다른 질문도 던져 보자. 정말로 우리가 궁금한 질문을.


3. 포용적 경제 제도를 일으키는 포용적 정치 제도는 ‘어떻게’, ‘왜’, ‘어떤 식으로’ 착취적 정치 제도 하에서 일어나는가?


저자는 ‘어떤 나라에서도, 어떤 민족에서도, 어떤 위치에서도 포용적 정치 제도가 일어날 수 있다’는 약간은 ‘정치적 올바름’이 들어간 주장을 하기 위해, 이에 대한 설명을 너무 소홀히 했다. 저자는 단지 ‘우연히’, ‘작은 사건으로’ 일어난다 했다. 내가 진짜 저자에게 묻고 싶은 건, 사실상 착취적 정치 제도가 전부인 모든 인류의 초기 역사에서, 몇몇 나라는 어떤 메커니즘으로 성공적으로 포용적 정치 제도를 만들어 나가는가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 사건 발생이 그냥 ‘우연적’으로 일어난다 했다. 그럼 또 궁금한 질문을 해 보자.


4. 어떤 착취적 정치 제도 하에서는 왜, 우연적으로 ‘포용적 정치 제도’가 발생하지 않는가?


수많은 가난한 나라는 어째서 계속해서 착취적 정치 제도 하에서 살아가는가? 가난한 나라는 착취적 정치/경제 제도의 피드백으로 인해 계속해서 가난한 나라로 남는다 한다. 그러면 성공한 나라는 어떻게 이 피드백을 ‘우연히’ 탈출할 수 있었을까? 그 작동 방식을 착취 제도로 고통받는 나라에게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다음과 같다. 이것도 질문 형식으로 해 보자.


5. 현재 경제적 발전을 이룬 나라가 ‘착취적 정치 제도’ 하에 있는지, 혹은 ‘포용적 정치 제도’ 하에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과학적인 검증 방법이 있는가?



저자는 착취적 정치 제도 하에서도 어느 정도는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경제 발전은 착취적 정치 제도로 인해 한계에 봉착하고 실패한 경제 제도로 돌아갈 것이라 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후 해석이다. 저자는 이미 실패한 나라에 대해서만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 (소련, 아르헨티나 등) 내가 진정 알고 싶은 것은 경제 발전이 진행되고 있는 어떤 나라가 미래에 계속 경제 발전을 지속할 수 있느냐는 신뢰할 만한 예측을 할 수 있느냐인데, 아마 저자는 이에 대해 대답을 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고? ‘착취적/포용적’이라는 말에 대한 명확하고 엄밀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의 초반에, 착취와 포용의 구분은 그것이 민주주의냐 아니냐에 달려있는 게 아니라 했다. 말하자면 민주주의라도 착취적인 요소가 보이면 착취적 정치이고, 공산주의라도 포용적인 요소가 발견되면 포용적 정치인 것이다. 그럼 정확한 착취/포용의 정의는? 책에서는 그런 것은 나오지 않는다. 단지 역사적 예시만 많이 들 뿐이다. 나는 정의를 원한다.


이 ‘정의 없음’의 가장 큰 문제는 사후해석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국가의 경제가 발전의 물꼬를 틀 때는 그 나라의 정치 내부의 ‘포용적 요소’를 강조하여 말한다. “역시 포용적 정치에서 경제가 발전하는군!” 그러다가 그 나라가 중진국의 벽에 막혀서 쇠퇴를 시작할 때는 사실 정치 내부에 착취적 요소가 훨씬 컸다고 얘기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우리는 저자의 사후해석에 대한 완벽한 반례를 안다. 바로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이다. 저자는 남한의 경제 발전에 대해 자신의 대표적인 예시로 언급을 하지만, 실제로 우리 나라의 경제 발전이 착취적 정치 제도 하에서 이루어졌음을 굳이 언급하지는 않는다.


이 책의 이론은 칼 포퍼의 ‘반증주의에 따른 의사과학’에 대한 적절한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착취적/포용적 정치 제도 이론은 설명이 부족하면 사후해석으로 이론의 수명을 연장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저자가 실제로는 그런 치사한 짓을 하지 않는다 해도―반증주의에 위배되어 과학이 아니다. 예를 들어, 실패한 국가의 정치 체제 중 좀 안좋은 요소만 과장하여 무조건 ‘착취적 체제’라고 잡아떼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 성공한 국가의 체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정치가 과학이 아니면 어떠냐고? 글쎄다, 그럼 저자인 James A. Robinson의 ‘정치과학자’라는 칭호도 떼어야 하겠다.


17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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