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왓챠」라는 영화 평가 앱이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본 모든 영화에 대해 별점을 매기고 그걸 바탕으로 취향에 맞는 영화를 추천해 주는, 한때 ‘취향추천 알고리즘’이라는 빅데이터 분석법이 유행했을 때 출시되었던 앱이다. (물론 지금도 있다. 별점평가 「왓챠」는 「왓챠피디아」가 되었고, 현재 「왓챠」라는 이름은 넷플릭스 같은 OTT 서비스가 된 후, 장렬하게 사업 정리 수순을 밟고 있다.)
나는 ‘정규분포’라는, 수학과 통계학에서 정의된 곡선의 아름다움을 탐닉한다. 식은 꽤 복잡하고 아름답지 않게 보이지만 (1/(σ√(2π)) exp[-(x-μ)^2/(2σ^2)]), 그 아름다움은 그래프를 눈으로 볼 때 드러난다. 그 아름다움은 수학적 추상화에 대한 아름다움이기 때문에 표현하는 데에는 언어적 한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굳이 표현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좌우대칭이다.
평균과 최빈값과 중앙값이 같다.
그래서 곡선을 정의하는 변수가 단 두 개뿐이다. (평균, 표준편차)
무작위로 어떤 집단의 표본을 추출했을 때, 표본의 크기가 커질 수록 그 표본 평균의 분포는 정규분포에 가까워진다. (중심극한정리)
그래서 나는 내 왓챠 별점 평가의 분포가 정규분포가 되기를 희망했다.
영화의 별점 평가를 정규분포가 되도록 매기는 방식은 이렇다.
규칙 1. 평균 수준, 그러니까 ‘약간 재미있는 정도의 영화’는 별점 3점을 준다.
규칙 2. 정규분포의 면적 분포에 따라, 별점 2와 별점 4는 별점 3보다 희귀하게 준다. 마찬가지로, 별점 1과 별점 5는 이들보다 더 희귀하게 준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나의 별점 평가의 분포는 다음과 같은 모습을 띤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별점 정규 분포
이 규칙에 대한 사전 합의점들이 존재하는데, 이 합의점들에 대해 합의하지 못한다면 나의 이 노력이 뻘짓이 될 것이다.
합의 1. 이 세계는 재미없는 영화와 재미있는 영화가 있으나, 그 정도는 극도로 다양하다.
당연한 얘기가 될 것이다. 사실상 평작과 인생의 마스터피스 작품이 가지는 그 내 인생에서의 영향력은 그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즉 “모든 영화가 다 가치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 합의는 매우 중요한 함의를 지녔는데, 졸작의 존재와 그 다양성이야말로 극도의 명작이 존재하게 만드는 작동 원리이기 때문이다. 모든 영화가 극도의 명작이라면, 비교 대상을 잃고 미학은 평평해질 것이다.
합의 2. 이 세계 모든 영화의 재미 정도를 평균내면, 약간 재미있는 쪽으로 기울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의 평균이 재미있지도, 재미없지도 않은 보통의 수준이라면, (아무리 좋은 영화 있어도 그와 똑같은 정도로 나쁜 영화가 있기 때문에) 영화감상의 기대값은 0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인류는 영화라는 예술에 별로 기대할 것이 없어 인류는 영화감상이라는 취미를 아예 가지지 않게 될 지도 모른다.
합의 1과 합의 2로부터 ‘규칙 1’이 도출된다. 즉, 약간 재미있는 영화들은 평균적이므로 별점 3점은 ‘평균적인 재미를 지닌 영화’를 매기는 수치가 될 것이다.
합의 3. 극도의 명작이나 극악의 졸작은 극도로 희귀하다.
우리는 누구나 인생의 명작을 쉽게 만날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지 않는가? 이렇다면 자연스럽게 별점 평가는 중앙이 두껍고 양 극단으로 갈 수록 희귀해지는 정규 분포를 그릴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규칙 2’가 도출된다. 영화의 가치에 대한 분포는 정규분포를 그린다.
이런 나의 행위를 변태적인 미학이나 수학에 대한 너드적인 집착으로 보면 안된다. 이 행위는 분명히 아름다움을 관찰하며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미학의 본질에 근거해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미와 추가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는 세계가 약간은 볼만하다고 느낀다. 그 이유는 추의 총합보다 미의 총합이 어느 정도는 더 많다는 통계적 결론을 방증한다. (이 세계가 이렇게 통계적으로 약간의 아름다움을 보인다는 사실은, 애초에 우주가 그렇게 만들어졌을 수도, 아니면 인간이 이 우주에서 약간의 아름다움을 보는 편향성을 가지게 진화했을 수도, 그것도 아니라면 인간이 진화한 후에 계속해서 아름다움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 과정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기로 하겠다.) 그러므로 미와 추의 분포의 평균값은 플러스(+)값이다.
하지만 여기서 별점 분포가 꼭 정규분포여야함을 설명하는 데 이걸로 그치진 않는다. 평균의 아름다움, 그러니까 ‘약간 아름다운 정도’에서 좀 더 아름다운 것들은 희귀해지며, 끝으로 가면 갈 수록 극도로 희귀해진다. 요는, 궁극의 아름다움이란 진정으로 도달하기 힘든 것이다. 이 관점이야말로 내가 가진 미학의 궁극이다. 졸작의 존재, 평균적인 미의 다양성과 탄탄한 두께야말로 극도의 명작이 존재하게 만드는 작동 원리이다. 모든 영화가 극도의 명작이라면, 비교 대상을 잃고 미학은 평평해질 것이다. 어떤 문학작품이든, 어떤 영화예술이나 음악이든, 어떤 자연 풍경이든, 어떤 NFT든간에, 그것이 진정으로 미적으로 가치있으려면, 그것은 희귀해야 하고 아무나 도달할 수 없는 극도로 어려운 경지에 있어야 한다. 추가로 말하자면, 극도의 아름다움의 반대편, 극추(極醜)의 영역 또한 희귀하고 극미(極美)의 영역과 대칭이다. 그렇게 해서 완벽히 좌우가 대칭적인 정규분포 곡선이 미-추 분포를 나타내는 데에 알맞다.
그런 점에서 나는 배달 앱이나 음식 리뷰 앱, 기타 모든 별점 평가를 소비자에게 시도하는 앱들에 대해 불만이 있다. 기본적으로 배달 앱 등의 리뷰 시스템은 다섯 개의 별점 분포 중에서 5점이 극단적으로 빈번하게 분포하는, 그리고 그보다 훨씬 작은 빈도의 1점이 분포하는 기괴한 분포 형상을 띠고 있다. 미학적으로 아름답지 않을 뿐더러, 그 효용이나 사용자 경험(UX)에도 의심이 간다.
문제는 소비자들이 별점 평가를 미학적 평가의 척도로 사용하려 하지 않고, “나를 이렇게 나쁘게 대한 점주에 대한 복수”의 용도로 별점을 사용하려 한다는 점이다. 별점을 1점으로 매긴다는 건 이 음식점이 나에게 뭔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불쾌한 접객을 제공했다는 이야기와 같은데, 고객은 점주를 처벌할 합법적 수단으로 플랫폼 콘텐츠 설계자가 쥐어준 ‘처벌의 몽둥이’ 별점 1점을 당연하게 거리낌없이 쓰려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점주들은 이에 민감하게 반응해 비단 진상 고객이 아닌 불특정 다수의 사용자에게도 5점이 아닌 4점이나 3점조차 고객이 매기길 거부한다. 그러므로 진상도 아니고 그저 그런 익명으로 남고 싶어 하는 사용자에게조차 ‘점주를 좆되게 할 게 아니라면’ 남은 선택지는 별점 5점 뿐이다.
이건 내 미학의 원칙과 매우 어긋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미학이 다양하고, 세계가 어느 정도 평균적으로 즐겁고, 명작이 희귀하길 바란다. 미식 또한 미학이 아니던가? 요리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즐거움과 아름다움이 다양하지 않다면, 몇 년만에 만나는 맛있는 음식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지 않는다면, 요리는 즐거울 리가 없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점주가 나에게 못된 짓을 했다며 구구절절 하소연하는 진상 고객의 별점 1점과, 그에 답변하며 진상의 모함에 자신의 식당이 좀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무조건 별점 5점을 달라고 하소연하는 점주들의 애잔한 읍소가 플랫폼 앱 내부에서 시끌시끌 들려온다. 이 모든 것이 짜증나는 소음이다. 그리하여 완성된 분포는 대다수의 5점과 약간의 1점을 가진 기괴한 분포다.
나는 1점을 주는 진상들에게 ‘더 이상 1점을 주지 말자’고 말하려고 하는 건 아니다. 점주들에게도 ‘3점도 좋은 평가니까 이걸로 만족하시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이건 전적으로 UX의 문제다. 이 평가에서 5점이나 되는 별점의 종류가 굳이 필요없다. 그런데도 기업은 다섯 개의 별점 정책을 유지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본능적으로 사용자가 별점을 매기는 행위가 빅데이터의 원천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정보나 데이터든간에 중립적인 것들만 모아 놓으면 쓸 데가 없다. 거기에 ‘가치평가’가 적용되어야 데이터가 나눠지고, 머신러닝이 학습을 하고, 취향추천 시스템이 다음 콘텐츠를 제시하고, AI가 말문이 트인다. 그래서 그들은 ‘다양한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다섯 개의 별점 시스템을 유지한다.
하지만 사용자는 그 중 세 개의 척도를 사용하지 않는다. 2점, 3점, 4점은 사용자에게 정해지지 않은 선택지다. 5점과 1점으로 별점이 양분된다면, 그냥 ‘좋아요’와 ‘싫어요’로만 평가 척도를 만들면 된다. 이건 내 미학에 대한 철칙과는 별 상관 없다. 기업은 더 좋은 방식이 있다면 그 방식을 써서 사용자의 경험을 디자인해야 한다. '좋아요’와 ‘싫어요’ 평가척도에서는, 중간점수를 주냐마냐를 전혀 고민하지 않고 좋았으면 ‘좋아요’를, 뭔가 기분 나쁘거나 점주를 처벌하고 싶다고 느끼면 ‘싫어요’를 매기면 된다.
이 별점 UX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모든 별점 평가에서조차 나를 망설이게 한다는 점이다. 점주가 완전한 개새끼가 아니면 ‘웬만해서는 별점 5점이 예의’인 세상에 살면, 내가 좋은 평가를 내리기 위해 별점 4점 주는 것조차 상도덕도 없는 나쁜 소비자로 매도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결국 난 세상과 타협했다. 나의 미학에 대한 고집은 허공에 읊는 메아리로 전락해 버렸다. 나는 오늘도 온 세상 모든 곳에 별점 5점을 준다.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그렇게 ‘모든 것이 좋아져 아무 느낌도 없는’ 이 세계의 미학은 평평해진다. 그들이 축적하고자 하는 빅데이터는 가치 없는 가비지 데이터가 된다. 나는 진상짓을 전혀 하지 않는 예의바른 소비자로 거듭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