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산의 「감각 차이 벡터공간」 이론
이전 글에서 나는 대니얼 데닛의 '다중 원고 모델'을 지지하는 한편, 그의 설명이 '감각질은 허상'이라는 급진적인 주장을 충분히 뒷받침할 만큼 명쾌한지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남겨두었다. 나는 당연히 데닛의 이론을 지지하며, 특히 감각질이 허상이며 물리학적 환원주의적으로 전부 설명될 수 있다는 그의 말에 완전히 동의한다. 나는 내 관점을 소개하며 감각질의 허상을 철학적 용어에 의존하지 않고, 선형대수학적 개념만 갖추고 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해의 틀을 제공해 보고자 한다.
내 아이디어는 세 가지 명제들로 나눠서 설명할 수 있다.
1. [양적 구조로의 환원] 감각질의 질적 공간은 수학적인 벡터 공간과 잘 사상(mapping/morphism)되며, 이는 ‘질적인 특성’이 ‘양적인 특성’으로 손쉽게 환원될 수 있음을 뜻한다.
2. [학습을 통한 기저의 은폐] 감각 공간의 기저는 생물학적 세포에 기원하나, 뇌는 후천적 학습으로 개별 기저의 인지를 지우고 압축된 단일한 ‘질적 느낌’이라는 덩어리(chunk)로 묶는다.
3. [차이를 통해 설명되는 감각질] 감각질이란 무엇과 다르고, 무엇과 다르고.... 루프의 최종적인 결과물이다.
각각에 대해 말해 보겠다.
감각질의 질적 공간은 수학적인 벡터 공간과 잘 사상(morphism)되며, 이는 ‘질적인 특성’이 ‘양적인 특성’으로 손쉽게 환원될 수 있음을 뜻한다.
감각질의 신비를 논할 때, “순수한 질적 느낌”이라는 식의 표현이 사용된다. 그런데 나는 빨갛다는 감각질에 ‘반대’라는 성질이 있고 그에 해당하는 색깔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나 뿐만 아니라 누구나 그 사실을 잘 안다. 그것은 초록이라는 감각질이다. 또한 덜 빨갛다 혹은 더 빨갛다는 성질과 그에 해당하는 감각질도 알고 있다. 오렌지의 색은 사과의 색보다 덜 빨갛고, 그 반대는 더 빨갛다.
만약 감각질이 순수한 질적 느낌이라면, ‘반대’라거나 ‘덜하다’ 혹은 ‘더하다’라는 느낌이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런데 이러한 성질이 있다는 사실은 색깔의 성질이 ‘양’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우리는 색깔이 ‘색 공간’이라는 벡터 공간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색에 대한 벡터 공간은 여러 가지 식으로 정의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모든 공간들은 사상되어도 ‘차이’와 ‘반대’를 보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각질의 벡터 공간(우리가 느끼는 ‘질적’ 느낌의 공간)도 역시 이 색 공간이 가진 차이와 반대를 제대로 보존한다. 수학에서 이렇게 어떤 양을 보존하면서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매핑하는 걸 ‘사상(morphism)’이라고 한다. 차이와 반대를 보존한다는 측면에서 이 사상은 ‘동형사상(isomorphism)’일 것이다.
이제부터는 이러한 공간이 질적인 측면이 양적인 측면으로 환원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자 감각질 공간이 아닌 ‘감각 공간’이라 칭할 것이다.
감각 공간의 기저는 생물학적 세포에 기원하나, 뇌는 후천적 학습으로 개별 기저의 인지를 지우고 압축된 단일한 ‘질적 느낌’이라는 덩어리(chunk)로 묶는다.
수학적으로 벡터 공간은 기저 벡터의 선형 결합으로 정의된다. x축 단위벡터 i, y축 단위벡터 j, z축 단위벡터 k라는 세 개의 기저 벡터만 갖춰져 있다면 3차원 벡터 공간이 정의될 수 있다.
감각 공간에도 기저가 있으며, 어쩌면 그건 생물학적 지각 세포와 관련있을 지도 모른다. 색에 대한 감각 공간에서, 그 세포는 L 원추세포, M 원추세포, S 원추세포이다. 각각의 세포는 가장 활발하게 발화되는 특정 영역의 파장대가 있며, 그 특성을 통해 각자 단독으로도 '감각질'이라고 하는 주관적 느낌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색깔에 대한 감각은 세 가지 원추세포 모두의 발화와 연관이 있고, 그 특유의 감각질은 각자의 발화의 양, 세기, 타이밍이 연합되어 이루어진다. 그것은 바로 “벡터 공간은 기저의 선형 결합으로 정의된다”는 선형대수학의 명제와 일치한다.
하지만 벡터 기저가 반드시 생물학적 특성과 관련되어 있을 필요는 없을 지도 모른다. 원래 벡터 공간에서, 하나의 벡터는 무한히 많은 방식의 선형 결합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감각 벡터도 ‘기저’란 게 꼭 생물학적 세포와 1대1 대응한다고 할 필요는 없다.
또한 각 감각 공간은 '멀티모달' 적으로 합쳐질 수도 있다. ‘맛’에 대한 감각은 다섯~여섯 가지 정도(짠맛, 단맛, 신맛, 쓴맛, 감칠맛 등)만 있다고 알려져 있다. 즉, 5차원 감각 공간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요리에서 느끼는 복합적인 맛이란, 300차원 이상의 후각 공간과 심지어 촉각 공간(캡사이신의 통증, 탄산의 따가움, 낮은 온도의 시원함)까지 병합해서 표현되는 멀티모달 5차원+300차원+... 이상의 벡터 공간이다.
왜 우리는 이 양적인 공간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선형결합으로 생성된 감각 벡터를 ‘질적인 느낌’으로 받는 것일까? 우리가 감각 벡터를 ‘양적인 느낌’으로 받는다는 건 각 기저 세포의 발화를 양적으로 느낀다는 말과 같다. 예를 들어, 우리가 노란색을 양적으로 느낀다면, 우리는 “55%의 L세포 발화와 45%의 M세포 발화”라는 식으로 느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느끼지 않는 건, 아마도 여러 가지의 세포 발화의 조합이 '청킹(chunk)'되어 학습 완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청킹이란 기억을 설명하는 심리학 이론에서 625815311225 라는 숫자를 외우기보다, 6.25 / 8.15 / 3.1 / 12.25를 외우기 쉬운 이유를 설명해 주는 이론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학습을 통해 기저 세포의 발화를 청킹할 지도 모른다. 노란색을 빨간색 55%와 초록색 45%의 혼합'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그냥 청킹된 하나의 질적 느낌으로 받아들여 학습하는 게 인지적으로 효율적일 테니까.
최초로 새로운 감각을 경험할 때, 그 낯선 감각은 초기에는 여러 기저 감각의 복합으로 인식된다. 대니얼 데닛은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에서, “맥주를 처음 먹었을 때의 경험”에 대해 얘기한다. 우리가 처음 맥주를 마실 때는 쓴맛(미각), 보리의 향(후각), 탄산의 따가움, 온도의 차가움(촉각) 등 여러 기저 감각들의 복잡한 조합을 날것 그대로 느낀다. 하지만 뇌는 정보 처리의 효율성을 위해 반복을 통해 점차 그 개별 기저들을 인식하지 않도록 ‘학습’하며, 최종적으로는 기저는 은폐되고 압축되어 단일한 ‘질적 느낌’만을 경험하게 된다. 맥주의 복합적인 미각/후각/촉각 기저들이 반복적으로 노출되어 학습하고 나면, 우리는 더 이상 기저 벡터들을 하나하나 인식하지 않고 그냥 이 맛을 ‘맥주의 맛’이라고 의식한다.
감각질이란 ‘무엇과 다르고, 무엇과 다르고....’ 루프의 최종적인 결과물이다.
감각질의 ‘빨간 느낌’을 정의하는 데,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주관적이고 질적인 느낌’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이제 감각 공간과 함께, 양적 공간으로의 동형 사상을 정의했으므로 감각질은, 아니 감각의 '질적인 느낌'은 더이상 ‘질’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빨간 느낌이란 “파란 느낌과의 차이”, “초록 느낌과의 차이”, 노란 느낌과의 차이”, “분홍 느낌과의 차이”... 등등의 모든 벡터 뺄셈 연산 루프로 설명하며, 그 설명을 끝마치고 나면 더 이상 설명할 것이 남지 않는다.
데이비드 차머스 같은 학자들은 감각질이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를 맺지 않는, 그 자체로 고유한 ‘순수한 느낌(내재적 속성)’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빨강이라는 색 만으로 단독으로 그 느낌을 정의하려니 발생하는 실패가 데이비드 차머스의 ‘어려운 문제’이다. 감각질이란 환상이고, 만약에 우리가 느끼는 그 질적 감각을 ‘감각질’이라 부르고 싶다면, 그것은 어쨌든 양적인 문제, 상대적 감각 차이의 문제로 환원할 수 있다. 감각질이란 사실 감각 공간 안에서 위치한 모든 색과의 상대적 차이에 따라 느껴지는 무엇이다.
이원론자들은 뇌의 정보 처리 과정을 다 설명하고 나면 "그래도 설명되지 않고 남는 찌꺼기(순수한 느낌)"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데닛은 "다양한 차이를 구별하는 기능, 반응하는 성향, 기억과 연결되는 구조 등을 모두 설명하고 나면 남는 것은 없다"라고 했다. 이렇게 설명하는 방식이 바로 데닛의 ‘소거주의 (Eliminativism)’ 이다.
앞선 글에 나는 ‘의미의 문제’를 간략히 언급했었는데, 이 ‘벡터의 뺄셈을 통한 차이’와 ‘공간 내에서의 상대적 위치’를 이용하면 의미 문제도 손쉽게 해결한다. ‘사과’의 의미란, 배와도 다르고, 딸기와도 다르고, 포도와도 다르고... 이 모든 벡터 뺄셈 루프의 최종적인 결과물이다. 그렇게 상대적인 모든 루프의 총합이 의미의 정의이며, 이렇게 정의하고 나면 추가로 정의해야 할 남는 것은 없다. 이는 언어학자 소쉬르가 말한, “언어에는 오직 긍정적 항(본질)이 없는 차이(Difference)만 존재한다”라며 언어의 상대적 차이를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제 이 세 가지 정의를 이용해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네 가지 사고실험을 반박해 보자.
3번 명제, ‘차이를 통해 설명되는 감각질’은 바로 이 역전된 스펙트럼을 반박하기 위해 준비되었다. 역전된 스펙트럼이 머리 속에 있기 때문에 누구는 사과를 빨간 색으로 보고, 누구는 사과를 푸른 색으로 본다는 설명은 가정부터 잘못되었다. '빨강'이라는 감각질은 파랑과도 다르고, 초록과도 다르고, 이 세상 어떤 색깔과도 다르다는 감각 벡터의 상대성에 의해 정의되기에, 스펙트럼이 거꾸로 되어 있을 수는 없다. 모든 색깔이 상대적이라면, 스펙트럼은 거꾸로 될 수 없다. 상대성이 곧 색깔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1번 명제, ‘양적 구조로의 환원’이 바로 메리의 방을 위해 준비된 명제이다. 메리가 그 벡터 공간의 선형성과 동형 사상을 선형대수학적으로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빨간색’이라는 감각질은 곧 다른 색깔들 간의 차이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3번 명제에 의해, 그 차이와 상대성이 곧 감각질을 정의한다. 그리고 그렇게 감각질을 설명하고 나면 더 설명할 게 남지 않는다.
네이글은 우리가 박쥐의 느낌을 상상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각질 때문이라고 말했다. 2번 명제, ‘학습을 통한 기저의 은폐’에 의해 우리가 박쥐의 감각질을 모르는 이유가 밝혀진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학습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은 시각 같은 생물학적 감각 기저를 은폐하고 압축된 결과값만을 받도록 배선되어 있다. 반면 박쥐의 뇌는 초음파의 반사 시간, 도플러 효과로 인한 주파수 변이 등을 새로운 생물학적 기저로 삼아 벡터를 생성한다. 인간이 박쥐의 느낌을 알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뇌 안에 저 초음파라는 기저 세포 자체가 없고, 그 연산을 압축해 본 ‘학습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위의 '메리의 방'에서와 같이 박쥐의 반향정위 감각질은 신비로운 이원론을 배제하고도 100% 설명 가능하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네이글의 박쥐 사고 실험에서는 한 가지 더 이야기할 것이 있다. 우리가 반향 정위를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이다. 반향 정위의 기저 벡터에 대한 섬세한 정의 후(그 벡터 공간이 2차원이나 3차원일 수도, 아니면 후각과 같은 300차원일 수도 있겠다), 그 반향 정위 기저 벡터가 우리가 가진 통상적인 감각 세포가 반응하는 감각으로 '감각 컨버팅'을 한다면 어떨까? 만약 반향 정위로 동굴의 깊이를 느끼는 감각을 'L 원추세포'로 컨버팅한다는 건, 깊이를 측정하는 센서(이미 현대의 기술로 구현 가능하다)를 우리가 익숙한 색깔인 ‘빨간색’에 매핑하는 모니터에 연결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모니터에서 빨간 색과 덜 빨간 색 (아마도 초록색)이 가득한 이미지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처음엔 혼란스럽게 빨간 색과 초록 색이 얼룩덜룩한 이미지들을 볼 테지만, 그것이 깊이와 관련 있다는 것을 충분히 학습하고 나면(청킹) 우리는 '빨간색'을 보면서 동시에 깊이를 보는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사실상 이것이 반향정위이며 박쥐의 감각질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도달하고 난 후엔, 우리는 박쥐의 반향정위를 100% 이해하고 느끼게 된 것이며, 이후에 추가로 설명해야 할 이론 같은 건 없다.
차머스의 철학적 좀비 논증은 근본적으로 '구조(기능)와 질감은 분리될 수 있다'는 착각에 기대고 있다. 기계적인 정보 처리는 다 복제해도, 그 위에 덧칠해지는 '감각질'이 복제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철학적 좀비이다.
1번 명제(동형사상)와 3번 명제(차이의 루프)는 이에 정면으로 맞선다. 만약 철학적 좀비가 인간과 물리적으로 100% 동일하게 정보 처리를 한다면, 그 좀비의 뇌 안에도 완벽하게 동일한 '차이의 루프'와 '수학적 벡터 공간 사상'이 돌아가고 있어야 한다. 구조가 똑같다면 수학적으로 동형(Isomorphic)이므로, 당연히 감각질도 100% 동일하게 존재한다. "동형사상의 벡터 구조는 완벽히 복제했는데 감각질만 빼놓을" 수는 없다.
좀비의 내면은 정말 텅 비어 있을까? 물리적으로 똑같이 복제된 좀비라면, 그 좀비의 뇌 역시 정보 처리 효율성을 위해 생물학적 기저를 은폐하고, 압축된 단일한 벡터값(Q)만을 상위 모듈로 넘기는 학습(2번 명제)을 똑같이 수행해야 한다. 이 기저의 은폐가 일어나는 순간, 좀비의 상위 인지 모듈(언어, 기억 중추)은 하위 계산 과정을 알지 못한 채 뚝 떨어져 나온 Q값을 마주하게 되며, 인간과 완벽하게 똑같이 "이 쪼갤 수 없는 순수하고 붉은 느낌이 있구나"라는 착각(질적 느낌)에 빠져들 것이다. 이 과정은 감각 벡터들의 상대적인 차이 루프에 의한 감각질 정보를 산출해 냄에도 불구하고 순수히 정보처리적 과정이고, 정보처리 기능이 탑재된 철학적 좀비라도 능히 해낼 수 있다.
데닛의 주장대로, 나는 감각질을 둘러싼 오랜 철학적 난제들은 우리가 감각을 '순수한 질적 느낌'이라는 신비로운 영역에 가두어 두었기 때문에 발생한 착각이라고 믿는다. 감각 공간을 수학적 벡터 공간으로 사상(morphism)하고, 기저 세포의 선형 결합이 어떻게 인지적으로 은폐(청킹)되는지, 그리고 그 압축된 결과물들이 어떻게 서로 간의 '차이의 루프'를 형성하는지 이해하고 나면, 데이비드 차머스의 '의식의 어려운 문제'는 필연적으로 해체된다.
다시 한 번 대니얼 데닛의 날카로운 통찰, '데카르트의 극장'과 '다중 원고 모델'을 생각해 본다. 우리의 내면에는 감각의 질감을 감상하는 영혼의 스크린은 없고, 의식이란 여러 시간선에서 만들어지는 '초고'들의 연합이라는 관점은 감각질과 '의식의 어려운 문제'가 단지 허상일 뿐이며, 이 세상은 물리주의로 전부 설명할 수 있다는 당연한 믿음에 확신을 가져다 주었다. 오직 효율적으로 압축된 정보들의 기하학적 관계망만이 뇌 안을 흐르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