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데닛의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를 읽고
의식의 신비는 어려운 문제다. 그것은 ‘모든 것은 물리학 법칙의 하위 현상일 뿐이다’라는 물리학적 환원주의나, ‘영혼의 작용이나 정신적인 현상은 없으며 물질만이 작용한다’는 유물론을 가정한다면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우리가 영혼의 존재를 인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학계가 의식의 난점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rlmers)의 정의를 살펴 보면 된다. 그는 1995년에 의식 연구를 ‘쉬운 문제(Easy Problem)’와 ‘어려운 문제(Hard Problem)’로 나누었다. 쉬운 문제란, 의식의 특성 중 과학적 방법론으로 언젠가는 풀 수 있을 거라고 여겨지는 기능적인 문제를 말한다.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있다.
뇌가 어떻게 외부 자극을 처리하는가? (감각의 정보처리)
우리는 어떻게 집중하고 (주의) 기억하는가? (기억)
우리는 어떻게 언어를 배우고, 생성시키며, 말하는가? (언어)
어려운 문제는 의식의 주관적인 경험에 그 질감이 수반되어, 과학적으로 조사하거나 설명하기가 극도로 이상해지는 문제들을 말한다.
왜 우리는 빨간색을 볼 때 단순히 '파장 700nm의 빛’이라고 정보 처리를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특유의 ‘빨간 느낌’을 실제로 느끼는가?
뇌의 모든 기능적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설명했다고 해도, 왜 그것이 안에서 느껴지는(Feel like) 무언가를 만들어내는가?에 대한 답은 여전히 빠져 있다. 차머스는 물리적 현상과 의식적 경험 사이에 거대한 ‘설명의 간극’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으며, 아무리 복잡한 회로도나 신경망 지도를 가져와도 그것이 어떻게 ‘주관적 느낌’으로 변환되는지 논리적으로 도약할 수 없다고도 말했다. 바로 이 주관적 느낌을 철학자들은 감각질(Qualia)이라고 이름붙였다. 문제는 이것이 풀기 어려운 문제이면서 동시에 의식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본질적인 문제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감각질 외에도 의식의 어려운 문제에 해당하는 것들이 더 있다. 주관성은, 1인칭 관점을 느끼는 ‘나’라는 주체는 왜 항상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정교한 뉴런망이 그 감각을 정보처리하는 식으로 물리적 과정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그 주관적 느낌을 어떻게 물리적 과정에 필연적으로 따라 오는 인과관계로 어떻게 엮을 것인지, 이를 설명의 간극이라 한다. 사과를 감각적으로 사과 이미지로 인식한다 해도, ‘사과’라는 ‘의미’는 어떻게 주관성을 느끼게 따라 오는지에 대한 의미의 문제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는 따로따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얽혀 있다. 본질적으로는 이 모든 문제들은 근원적이고 단일한 원인인 ‘감각질의 주관성’에 의해 탄생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인지과학 랩의 대학원생이었다. 인간의 인지를 테스트하는 행동주의적 실험을 구상해야 하는 연구자의 입장에서, 우리의 목적은 이 어려운 문제를 실험적으로 검증하는 문제로 모아졌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웠다. 아니, 불가능했다. 그 의식의 주관성 때문에, 애초에 실험을 설계하기 불가능했다.
피험자에게 열 자극을 가하며 "0부터 10까지 통증의 정도를 숫자로 답하세요"라고 요청하거나,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점(역치)을 측정하는 실험을 구상한다. 의도는 피험자의 내면에서 느끼는 강렬한 감각질을 측정하려 한 거지만, 결과적으로 이 실험은 ‘신경계 신호 전달 강도’라는 의식의 쉬운 문제만을 측정할 뿐이다.
사람마다 감각질의 차이가 있을까? 어떤 사람은 사과를 빨간 색으로, 또 다른 사람은 파란 색으로 보지 않을까? 이런 실험 설계는 피험자에게 사과가 무슨 색인지 물어도, 그 답변은 언어적 필터에 막혀서 "빨간색임"이라는 정해진 답변만 나온다.
사람에게 완전히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감각질을 체험해 보도록 하면 어떨까?그런데...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박쥐는 초음파를 이용한 반향정위로 공간을 느낀다. 그러나 초음파를 느끼는 감각 기관을 수술로써 뇌에 이식하는 기술은 없다. 색깔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을 찾아 아예 경험해 보지 못한 색깔 감각질을 만들어 주는 건? 그런데 전 세계의 어떤 인간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인지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의식의 어려운 문제를 검증하는 실험을 구상하는 일에 끊임없이 실패한 후에, 아인슈타인 등 물리학자들이 상상해 보던 ‘사고 실험’ 방법론까지 손대기 시작했다. 아래는 상상력을 발휘해 위의 실험들을 사고 실험의 영역까지 확장시킨 버전이다.
철학적 좀비
바로 데이비드 차머스가 만들어 낸 악명 높은 사고 실험. 철학적 좀비란, 감각질과 주관성이 결여되어 있으나 의식의 쉬운 문제들, 즉 정보처리적 의식은 존재하는 인간을 말한다. 피험자가 ‘철학적 좀비’라면, 위의 통증의 역치 실험에서 일반적인 감각질을 가진 사람과 완전히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감각질이 없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좀비 피험자는 정보의 역치를 검출하여 (if pain>100) 언어적 신호("아파요!")나 행동적 신호(움찔거림)을 출력으로 내보낸다. 감각질의 보유 여부에 관계없이 좀비 피험자는 일반인과 같은 행동 측정치를 보이므로, 감각질을 검출하려던 우리의 실험은 실패하고 만다.
역전된 스펙트럼
사과의 빨간색이라는 감각질을 언어적으로 말해 보라는 실험이 실패할 이유를 만들어 내는 사고실험. 모든 사람은 제각기의 감각질 색상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빨간색에서 보라색으로 이어지는 색상 스펙트럼이 거꾸로 뒤집혀 있는 사람도 있을 지도 모른다는 가설이다. 그러나 그렇게 거꾸로 된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도, 어릴 적부터 파란색의 감각질을 ‘빨강’이라는 단어로 배워 왔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파랑의 감각질을 말해 보라 만다면 그는 배워 왔던 대로 "빨강"이라고 답할 뿐이다.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What is it like to be a bat?)
토머스 네이글(Thomas Nagel)이 1974년에 발표한 논문의 제목이자 동시에 유명한 사고 실험이다. 박쥐는 눈이 아니라 초음파를 쏘고 그 반향을 들어서(반향 정위) 3차원 공간을 인식한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 박쥐의 음파 탐지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분석할 수 있고, 심지어 똑같이 작동하는 기계 레이더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박쥐 자체가 되어 반향 정위를 감각질로 가지게 되면 레이더로 음파를 탐지하는 기계를 이용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질적 경험을 가질 것이다.
메리의 방 (Mary's Room)
철학자 프랭크 잭슨(Frank Jackson)이 1982년에 제안한 감각질 관련한 사고 실험이다. 역전된 스펙트럼이나 네이글 박쥐 사고실험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네이글의 박쥐나 철학적 좀비보다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사고실험이다. (다만 한 인간의 인생을 통째로 실험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기에, 당연히 구상 수준에만 머물러 있다.) 천재적인 신경과학자 메리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이 흑백으로만 칠해진 방에서 살도록 길러 졌다. 그녀는 흑백 모니터를 통해 광학, 뇌과학, 물리학 등 색채에 관한 세상의 모든 물리적 지식을 완벽하게 학습했다. 빨간색 파장이 어떻게 망막을 자극하고 뇌의 어떤 시냅스를 점화시키는지 100% 알고 있다. 어느 날, 방문이 열리고 메리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짜 빨간 사과를 보게 된다. 메리는 이 순간 "아하, 빨간색을 본다는 건 바로 이런 느낌이었구나!"라며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운다. 이 실험이 주장하는 바는, 모든 물리적 지식을 다 알아도 결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뜻이며, 그 남겨진 무언가가 바로 주관적 느낌인 ‘감각질’이라는 것이다.
데이비드 차머스는 철학적 좀비 논증을 통해 환원론적 물리주의는 틀렸으며, 의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물질 이외에 의식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기본 요소’가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데이비드 차머스는 이원론자이자 범심론자이다.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원론자와는 좀 다르다고는 하지만.) 글쎄, 우리가 이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대니얼 데넷의 책을 리뷰한 저번 글에서도 밝히긴 했지만,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라는 책은 내가 의식을 연구하던 대학원생으로서 수없이 많은 논문과 책에서 인용되던 전설적인 책이었다. 원제는 ‘Consciousness Explained’라는 제목으로. ‘의식은 설명되었다’ 정도로 번역되 수 있는 제목이며, 그 뉘앙스란 "의식은 이미 설명되었으며, 굳이 더 설명할 건덕지가 별로 없다"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의식의 문제는 설명하기 어렵다’라는 관점이 지배적이던 데이비드 차머스의 관점이 지배하던 학계에 그 제목만으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대학원생인 나로서는 원서를 읽어보려고도 했으나, 특유의 철학적이고 현학적인 문체와 나의 저열한 영어 실력의 이중 장벽으로 책의 제대로 된 이해는 쉽지 않았다. 나는 2012년 학계를 떠났으며, 1년 후에 번역서가 출간되었다.
대니얼 데닛의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는 데이비드 차머스의 철학, 즉 ’어려운 문제가 따로 있다‘는 관점과 함께, 감각질, 주관성, 설명의 간극, 기타 학계와 일반 상식에서 통용되는 ‘의식은 신비롭다’는 편견, 그리고 의식과 관련한 사고실험들까지 전부 깨부수는 결정적인 책이다. 대니얼 데닛은 철저히 물리주의자이자 유물론자의 입장으로 의식과 감각질이 환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사고 실험의 허상
수많은 사고 실험의 난립에 대해 데닛은 이렇게 생각했다. "철학자들의 사고 실험은 엄밀한 논리적 증명이 아니라, 사람들의 머릿속에 특정한 결론을 펌프질해 넣기 위해 교묘하게 설계된 설득의 도구에 불과하다." 역전된 스펙트럼, 철학적 좀비, 네이글의 박쥐, 메리의 방 같은 사고 실험들은 우리의 인지적 한계나 상상력의 한계를 교묘하게 자극하여, "거봐, 물리적인 설명만으로는 뭔가 부족하게 느껴지지?"라는 직관적 느낌을 진리인 것처럼 포장한다. 데닛의 생각에, 인지과학의 사고 실험은 아인슈타인의 사고 실험처럼 우주의 근원이나 지식의 본질을 탐구하는 적절한 도구라기보다는 궤변에 가까운 주장을 늘어 놓는 철학자들의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느껴진 모양이다.
타자현상학
그러나 궤변적 사고 실험을 타파하더라도 의식의 주관성은 여전히 연구하기 까다롭다. 데닛은 ‘타자현상학’이라는 새로운 룰을 설정한다. 1인칭의 주관적 감각질을 3인칭의 과학으로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다. ‘현상학’이란 인지과학 이전에 철학자들(특히 에드문드 후설)이 확립한, 감각질을 탐구하는 방법론이다. 후설은 "내가 지금 빨간색을 느끼고 있다"는 내면의 1인칭 고백을 절대적인 진실로 믿고 거기서부터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데닛은 피험자의 1인칭 보고를 소설가의 텍스트처럼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험자가 "내 머릿속에 빨간색의 생생한 느낌이 있어요!"라고 말할 때, 과학자가 믿어야 할 사실은 "그 사람 내면에 진짜 빨간 감각질이 있다"가 아니라,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뇌의 정보 처리 과정이 존재한다"는 사실뿐이다. 즉, 주관적 경험 자체를 지워버리고, 오직 밖으로 출력된 텍스트와 행동만을 데이터로 삼겠다는 선언이다.
데카르트의 극장
현대 과학자들은 "시각 피질을 거친 정보가 결국 어딘가에 모여서 주관적 경험으로 통합된다"고 은연중에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데닛은 이러한 설명의 심각한 헛점을 지적한다. ‘어딘가 모여서 주관성을 획득하는 뇌의 한 지점’이란 곧 영혼의 존재(이원론)를 가정하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과학자들이 영혼의 존재를 믿을 리 없다. 하지만 위의 사고 실험이나 감각질 같은 주장은 뇌 안에 정보가 상영되는 '데카르트의 극장'이 존재한다고 무의식적으로 가정하는 인지적 기만이다.
이에 따라 네 가지 감각질 사고실험 (철학적 좀비, 역전된 스펙트럼, 네이글의 박쥐, 메리의 방)을 데닛 식으로 비판해 볼 수 있다.
데이비드 차머스의 철학적 좀비
좀비 사고 실험은 우리와 똑같이 행동하는 존재를 상상한다. 극장의 비유로 치면, 극장의 건물(육체)도 완벽하고,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신경망의 정보 처리)도 완벽하며, 밖으로 송출되는 방송(행동과 언어)도 인간과 똑같다. 단지 'VIP석에 앉아 무대를 감상하는 관객(주관적 경험)'만 쏙 빠져나간 상태를 가정한다. 데닛은 "극장에 관객석이라는 특권적인 위치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박하기에, 정보가 처리되고(배우들이 연기하고) 그것이 행동으로 출력되면(방송되면) 그것으로 의식의 전 과정은 끝날 뿐이다. 감상하는 자아를 따로 떼어낼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데카르트적 극장의 환상이며, 따라서 속은 텅 비고 겉만 똑같이 작동하는 '좀비'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역전된 스펙트럼
이 사고실험은 중간에 위치한 밀폐된 영사실의 '컬러 필터(감각질)'만 남몰래 바꿔치기할 수 있다는 전형적인 데카르트적 극장 모델이다. 데닛은 "출력과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내면의 색깔 필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색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수많은 기억, 연상, 감정 네트워크가 동시에 점화되는 수평적 과정이다. 만약 빨강과 초록의 주관적 스펙트럼이 뒤집혔다면, 필연적으로 온도를 느끼는 연상(빨강=따뜻함)이나 뇌의 정보 처리 속도, 반응 패턴 등 물리적 기능 어딘가에 반드시 차이가 발생할 것이다. 기능과 완전히 분리된 채 스크린에만 맺히는 '순수한 감각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토마스 네이글의 박쥐
우리가 박쥐의 뇌파나 음파 탐지 기술(대본과 무대 장치)을 아무리 잘 알아도, 박쥐 전용 VIP석에 앉아보지 않는 한 그 1인칭의 느낌을 알 수 없다다. 즉, 네이글의 박쥐 사고 실험은 물리적 데이터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특권적인 관찰자의 시점'이 내면에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내면에서 그 상황을 감상하는, 뇌 안의 박쥐 호문쿨루스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박쥐의 기능적, 생태적, 신경학적 메커니즘을 완벽히 파악한다면, 우리는 이미 박쥐의 의식을 남김없이 파악한 것이다.
프랭크 잭슨의 메리의 방
가정에 따르면 메리는 흑백 방에서 시각 피질의 정보 처리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학습했다. 즉, 극장 뒤편의 복잡한 배선도와 영사기의 물리적 원리를 100% 알고 있다. 하지만 메리가 방을 나서는 순간, 그녀의 내면 극장에서 처음으로 '빨간색 스크린(감각질)'이 켜지며 새로운 충격을 받는다. 물리적 지식과 스크린에 맺히는 상이 철저히 분리된 전형적인 데카르트의 극장 모델이다. 데닛에 따르면 뇌의 반응과 연결망 자체가 바로 경험이며, 그 외 다른 것은 없다. 메리가 정말로 뇌의 모든 물리적 지식을 가졌다면, 그녀는 빨간색을 보았을 때 자신의 뇌가 어떤 반응을 일으키고 어떤 신경이 점화될지 이미 완벽히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데닛의 ‘데카르트의 극장’ 비판은 이 모든 감각질 사고 실험을 논파할 정도로 강력하다. 이러한 설명을 들으면 모든 사고 실험의 헛점을 제대로 깨닫는다. 지금까지 의식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의식과 감각질이 설명되지 않으니, 뇌 안의 어느 부위에다가 그 ‘설명되지 않는 모든 것’을 쑤셔넣어서 한 곳에 집중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부분은 마치 데카르트가 가정했던 ‘영혼의 통로’라고 불렀던 송과선처럼, 이원론적인 분위기를 띠게 된다. 여기엔 영혼을 집어넣어도 되고, ‘호문쿨루스’라는, 뇌 안에서 우리의 의식과 완벽히 동일한 기능을 가진 작은 꼬마가 탑재되어 있다고 가정해도 된다. 데닛은 물리학적 환원론자이자 심신일원론자로서 이러한 설명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이제 데카르트의 극장 모델이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 자리엔 공백만이 있다. ‘그래서 의식이 도대체 뭔데?’라는 질문에 답할 시간이다. 데닛은 데카르트 극장의 대안 의식 모델로 다음과 같은, 완전히 반대로 작동하면서도 현대적인 유물론이나 정보 처리 이론에 어긋남이 없는 모델을 제안한다. 이른바 ‘다중 원고 모델(Multiple Draft Model)‘이다.
최종판은 없다
데카르트적 극장에서는 편집장이 도장을 찍는 '최종 인쇄본(결승선)'이 있어야 비로소 의식이 된다고 본다. 하지만 데닛은 "뇌에는 결승선이나 최종 상영관 같은 건 없다"고 말한다. 뇌에는 수많은 초고(Draft)들이 끊임없이 흐르고 덧칠될 뿐이다. 뇌는 마치 거대한 신문사의 편집국과 같아서, 동시다발적인 취재 (병렬 처리)가 계속해서 일어난다. 눈, 귀, 피부 등 다양한 감각 기관에서 들어온 정보들은 뇌의 각기 다른 부위에서 동시에 처리된다. 마치 여러 기자가 각자의 데스크에서 기사 초고(Draft)를 쏟아내는 것과 같다. 결코 완성되지 않은 초고들은 뇌 안에서 끊임없이 서로 교차하고, 과거의 기억이나 감정과 결합하며 실시간으로 수정된다.
뇌내 유명세(Cerebral Celebrity)
수많은 무의식적 초고들 중에서 무엇이 우리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의식'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원리. 데닛은 무의식이 의식으로 넘어가는 특정한 '문턱(Threshold)'이나 신비한 장소는 없다고 말하며. 대신 ‘유명세’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뇌 안의 여러 초고들은 시스템 전체를 장악하기 위해 끊임없이 경합하고, 어떤 초고가 뇌의 다른 신경망들을 강하게 자극해서, 우리가 입 밖으로 말을 내뱉게 만들거나, 근육을 움직이게 하거나, 장기 기억에 뚜렷하게 저장되도록 만들면, 그 정보는 뇌 안에서 유명세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의식되었다"는 것은 어떤 정보가 내면의 스크린에 비추어졌다는 뜻(데카르트의 극장)이 아니라, 단순히 뇌의 수많은 하위 시스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상태로 솟아올랐다는 기능적 결과다.
데닛은 ‘다중 원고 모델’의 결정적인 증거로 여러 심리학 실험의 결과를 재해석한다. 그 중 가장 충격적이고도 잘 알려진 벤자민 리벳의 실험을 살펴볼까 한다.
리벳은 인간이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고 느끼는 순간과, 실제 뇌가 '움직일 준비를 하는' 순간 사이의 시간차를 측정하려 했다. 피험자의 머리에는 뇌파(EEG) 측정기를, 손목에는 근육 움직임(EMG) 측정기를 단 채로, 아주 빠르게 도는 점이 있는 시계 화면을 보게 한다. 피험자는 “원할 때 언제든지 손목을 꺾으세요. 단, 당신의 내면에서 '손목을 꺾어야겠다'는 충동(의도)이 처음 든 바로 그 순간, 시계의 점이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하세요.”라는 지시를 받는다.
측정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500ms: 피험자는 아직 아무 생각도 없는데, 뇌의 운동 피질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일 준비를 시작하며 뇌파가 발생한다. 리벳은 이를 ’준비 전위(Readiness Potential)‘라고 명명했다.
-200ms: 피험자가 "아, 지금 손목을 꺾어야지!"라고 주관적인 의도를 느끼는 시점. 하지만 실험은 ‘의도’보다 300ms 전에 이미 뇌파를 관측했다.
0ms (실제 움직임): 손목 근육이 수축한다.
리벳의 해석은 이랬다. 내 의식(자아)이 결정을 내리기 300ms 전에, 내 뇌(무의식)가 이미 결정을 내려버렸다. 즉, 우리의 '자유의지'는 무의식이 이미 결정해 놓은 행동을 사후에 "내가 결정했다"고 통보받는 대리인에 불과하다.
데닛은 리벳의 해석 또한 ‘데카르트 극장’의 관점에 갇혔다고 비판하며, 역시 다중 원고 모델로 설명한다. 데넷은 리벳이 "무의식이 먼저 출발하고, 의식이 나중에 결승선을 통과했다"고 생각하는 지점을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리벳은 뇌 안 어딘가에 정보가 도달하면 비로소 "자, 지금부터 의식이다"라고 선언되는 특정한 시공간적 지점(결승선)이 있다고 가정했다. -200ms라는 시간이 바로 의식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다중 원고 모델에 따르면, 시각 정보(시계의 점 위치)를 처리하는 원고와 손목 근육을 준비하는 원고(준비 전위)는 뇌 전체에서 병렬적으로 돌아간다. 두 가지의 정보들이 경합하다가 "내가 시계가 여기 있을 때 의도했다"라는 하나의 매끄러운 서사(원고)로 묶여 유명세를 얻기까지 추가로 물리적인 시간(수백 밀리초)이 걸리게 된다. 그리하여 피험자가 "이때 의도했다"고 보고하는 주관적 시간(-200ms)과, 뇌의 물리적 프로세스 시간(-500ms)을 매칭시켜 "뇌가 의식보다 빠르다"고 잘못된 결론을내게 된다.
이제 ‘다중 원고 모델’이 감각질과 주관성을 어떻게 해체하는지를 감상해 볼 시간이다.
감각질(Qualia)의 해체: "느낌은 성향들의 다발일 뿐이다"
데닛은 다중 원고 모델을 통해 '순수한 단일 감각질'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수많은 하위 초고들의 경합 결과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식이다.
반응들의 네트워크: 사과의 붉은 빛이 망막에 닿으면, 뇌 안에서는 수많은 병렬적 초고들이 동시에 작성된다.
초고 A: "따뜻한 색이다."
초고 B: "과거에 먹었던 달콤한 기억."
초고 C: "입에 침을 고이게 하라."
초고 D: "'빨갛다'라는 단어를 발음할 준비를 하라."
이 수많은 무의식적 반응(초고)들이 뇌 안에서 경합하다가 퍼져나가며 어떤 것이 유명세를 얻는다. "이 모든 반응과 정보 처리 과정을 다 빼고 남는 '순수한 붉은 느낌'이라는 게 진짜로 존재할까?" 데넷에게 감각질이란, 뇌가 수많은 병렬적 정보들을 효율적으로 묶어서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아이콘' 같은 착각이다. 컴퓨터 바탕화면의 폴더 아이콘이 실제 물리적 폴더가 아니라 복잡한 코드를 숨겨둔 시각적 환상이듯, 감각질도 수많은 물리적 신경 반응들의 복합체를 뭉뚱그려 부르는 환상에 불과하다.
주관성(Subjectivity)의 해체: "서사적 무게중심"
그 감각질의 환상을 느끼는 주체(나)는 누구인가? 데닛은 서사적 무게중심 (Center of Narrative Gravity)이라는 비유를 든다. 물리학에서 어떤 물체의 '무게중심'은 계산을 돕기 위해 도입한 수학적이고 추상적인 점(Point)일 뿐, 그 위치를 핀셋으로 집어낼 수 있는 물리적 원자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아(Self)나 주관성도 뇌가 만들어낸 '추상적인 무게중심'일 뿐이다. 우리의 뇌는 다중 초고 모델에 따라 쉴 새 없이 파편화된 정보와 행동을 출력하는데, 인간의 뇌(특히 언어를 담당하는 좌뇌 해석기)는 이 산발적인 파편들이 "왜 일어났는지" 일관된 이야기를 꾸며낸다. 그 중 하나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을 수 있다.
“나는 사과를 먹고 싶어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나(자아)’라는 주관적 실체가 주체적으로 초고를 쓴 것이 아니다. 정반대로, "뇌 안에서 끊임없이 승리하고 출력되는 다중 원고(이야기)들이 뭉쳐서 '나'라는 가상의 작가를 사후적으로 발명해 낸 것"일 뿐이다. 이 놀라운 이야기는 ’감각질을 느끼는 나‘라는 주관성의 문제 따윈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내가 감각질을 느끼는 게 아니고, 그런 허상의 이야기가 다중 원고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어떤가? 이러한 주장이 정말로 감각질의 신비를 해결했다고 생각하는가?
감각질에 대한 데닛의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왜냐하면 데닛의 설명은 ‘감각질은 설명할 것이 별로 없다’는 내용이니까.
이 결론은 물리학적 환원주의로서는 당연한 결론이다. 왜냐하면, 물리학 법칙만이 이 우주를 설명할 수 있다면 영혼이나 ‘호문쿨루스’ 따위의 편법을 배제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설명해 온 방식은 모두 ‘데카르트의 극장’ 식 이원론적 설명 뿐이었는데, 그러한 이원론을 철저히 배제하고 일원론적인 입장을 주의깊게 견지하며 차근차근 논리를 쌓아 나간다면 최종적으로 깨닫는 사실은, 감각질이라는 개념 자체가 데카르트의 극장‘으로부터 나왔다는 것 뿐이다. 즉, 감각질을 이원론이나 일원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감각질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원론적 허구다.
데이비드 차머스는 당연히 이런 설명에 반대한다. 다중 원고 모델은 뇌가 시각 정보를 어떻게 병렬로 처리하고 입으로 "빨갛네"라고 말하게 만드는지, 그 쉬운 문제는 잘 설명할 뿐이지만, "왜 그 복잡한 정보 처리가 기계적 연산으로 끝나지 않고, 내면의 감각질(어려운 문제)을 동반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설명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우리 또한 이러한 비판의 행렬에 동참할 수 있다. 여전히 우리는 사과의 빨감을 눈으로 보고, 바늘 손등에 찌르며 말한다. “지금 내가 아프다고 느끼는 그 느낌 자체는 진짜이지 않은가?"
이에 대해 나, 김필산의 관점을 설명할 시간이다. 그런데 글이 길어졌으니, 다음 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