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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은 없고 우린 모두 허언증이다

닉 채터의 『생각한다는 착각』을 읽고

여기서의 무의식이란 이미 과학 분야의 영향력(심리학 포함)을 상실하고 단지 문화예술과 평론과 대중 MBTI 성격 이론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포함하여,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에서도 종종 의식의 반대 개념으로서 다루고 있는 무의식을 포함한다. 여기엔 광고 중간에 짧게 지나가는 메시지를 삽입하면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서브리미널 이론, 시끄러운 파티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들으면 문득 그 이름이 들린다는 칵테일 파티 이론, 최면으로 무의식적 감정 끌어내기 등등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을 포함한다.


프로이트식 무의식에 대해서는 언급할 가치가 없다. 우리는 이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정의상' 과학이 아님을 알고 있다.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은 이제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한, 그 너저분하고 아무 근거 없는 '무의식적 리비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꿈의 해석' 같은 이론들이 과학이 아니라는 이유로 쳐낼 수 있을 정도로 고도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에서 여전히 다뤄지고 있는 '무의식'이라는 주제는 깊다. 무의식이란 그 반대되는 단어인 '의식'의 단순한 반대 주제가 아니다. 무의식은 우리의 의식이 발휘하는 감정, 욕망, 의심, 믿음, 신념, 특히 행동의 동기를 뒤에서 컨트롤한다. 사실상 우리는 의식에 드러난 행동의 동기에 대해 잘 모르며, 그 의미는 우리도 몰랐던 '무의식'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 무의식은 넓고도 깊으며, 고도의 상징과 비유, 언어체계, 그리고 비언어적인 감정으로 이중 삼중으로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그 무의식의 세계를 무척 탐구하고 싶어하며, 특히 우리는 MBTI, 정신과의사, 상담심리학자, 그리고 뇌신경과학 이론을 통해 그 무의식의 깊고도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The Mind is Flat - Nick Charter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종류의 무의식이 없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우리의 행동의 동기를 만들어 내는 그 심도 깊은 무의식은 없다. 애초에 마음에 '숨겨진 깊이'가 있다는 생각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책에 쓰인 글자의 '표면' 아래로는 아무 것도 없듯이 (때로는 나도 그렇게 느낀다. 어떤 소설이든지, 등장인물에겐 글로 표현되지 않은 엄청나게 깊은 심연과 감정과 동기를 담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저자는 지적한다. 글자라는 게 내용물의 전부인 소설에서, 글자로 표현되지 않은 무엇인가가 과연 어디에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런 게 없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나?) 인간에게도 겉으로 드러난 의식의 심연에, 드러나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을 리가 없다.


무의식이 없다고? 그럴 리가 있나? 우리가 분명히 무의식이 '있다'고 확신했었던 건, 그 경이적일 정도로 풍부한 의식의 표현력 때문 아니던가? 그러니까, 우리의 의식이 드러내는 풍부한 표현과, 감정과, 전달력과, 상황 설명들은, 당연하게도 '의식'이라는 알고리즘만으로 설명하기 무척이나 벅찬 것 아니었겠는가? 짧은 프레임에 삽입된 메시지가 잠재의식에 각인되면, 우리는 그 잠재의식이 시키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서브리미널 이론). 그래서 우리는 마시고 싶었던 콜라가 사실 광고의 짧은 순간 삽입된 "아 콜라 맛있다"라는 메시지가 무의식에 박혀 버렸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최면술사가 시키는 대로 내 깊은 심연의 기억을 파헤치다 보면, 어떤 이는 과거 끔찍한 트라우마로 잊혀진 기억을 되살려내는 데 성공한다. 도 몰랐던 깊고 깊은 무의식엔 그가 잊었거나 그로부터 차단된 기억의 저장소가 있고, 그 저장된 끔찍한 기억들은 사실 그의 의식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MBTI 테스트를 해 보면 우리는 내가 몰랐던 내 모습이 이렇게나 명징하게 드러나는 데 놀란다. 사실상 나의 깊은 곳 무의식이 있어서, 나를 유형화하여 조종하는 것 아닌가?


의식의 풍부한 복잡함을 무의식의 깊고도 넓은 설명력으로 때우는 게 지금까지의 심리학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프로이트 정신분석학과 단절한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이 여전히 프로이트로부터 단절되지 않은 지점이 있다고도 생각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이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무의식이란 단어의 정의상, 의식이 없는 계산과정의 형태라고 한다면, 그것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 무의식은 우리의 의식에, 특히 의식이 가지는 깊고 풍부한 설명력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 무의식이란 사실, 컴퓨터의 계산 과정과 똑같은 것이다. 모니터에 등장하는 3D 게임의 화면을 출력하기 위해 컴퓨터는 수많은 계산을 수행하지만, 그 계산과정까지 모니터에 출력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무의식이란 단지 뉴런이라는 세포의 계산 과정이다. 단순한 계산과정이 의식의 설명력을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가 의식이 그렇게까지 풍부하고 다양한 의미가 있는지, 어째서 우리는 이 풍부한 의미의 특성에 '무의식의 그림자'를 느끼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면, 그건 의식이 단지 "모든 것을 꾸며내기 때문"이다. 이건 놀랍게도 심리학의 역사에서 매우 자주 밝혀진 사실이다. 분리뇌 환자에게, 우뇌에 눈더미를 보여주고 여기에 적절한 도구를 고르라 하면, 우뇌는 삽을 고른다. 하지만 좌뇌는 눈더미를 보지 못했고, 단지 닭장만 보고 있다. 좌뇌는 아무렇지도 않게 "닭장을 치우는 데 삽이 필요해서"라고 얘기한다. 좌뇌는 자기가 거짓말을 하는지 깨닫지조차 못한다. 조현병 환자가 자신의 머리 속에 FBI가 심은 칩이 숨겨져 있다고 얘기하는 이유는, 머리 속에 들리는 환청을 설명할 합당한 이유를 현대사회의 기술력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뇌로서는 당연한 사실이다. 높은 산봉우리에 설치된 구름다리에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예쁜 여자가 나눠 주는 설문지를 작성하면, 피험자는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고 해석한다. 무의식에서 진실로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리비도 같은 것이 폭발하기 때문도 아니다. 의식이 순식간에 "나대는 심장"과 여자를 연결짓고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의식이 내놓는 수많은 깊고 풍부한 설명력은 무의식의 깊은 심연으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다. 무의식은 계산과정일 뿐이며, 거기에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의미는 사실상 '순식간에' 의식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그 깊이는 완전히 얕고 대충 꾸며낸 이야기지만 그게 그럴 듯하게, 심지어 깊고 풍부하게 들리는 이유는 의식이 이런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들리게 만드는 데 선수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은 그 일을 즐기기까지 하고, 사실상 24시간 그 허언증 이야기를 꾸며내며 살아간다. 그러한 인간의 본능으로부터 스토리와 픽션, 이야기, 기승전결, 서사시, 소설과 희곡과 영화, 게임 스토리, 문화산업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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