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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부분 없이 구의 안팎을 뒤집(을수없)었던 초딩

스티븐 스트로가츠의 『X의 즐거움』을 읽고

『재미있는 수학여행』이라는 전설적인 책을 아는가? 수많은 초딩들을 이공계와 대학원생이라는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는 초딩 타깃 전설의 레전드 교양수학책. 나 역시 이 책에 영향받아 물리학과에 가버리고 말았던, 예언의 석판과도 같았던 그 책. 김용운 교수라는 우리나라 노 수학자의 책으로, 김용운 교수는 수학뿐만 아니라 인류학과 문명 비평 쪽에 있어서도 많은 저서를 남겼다.


재미있는 수학여행 1, 2, 3, 4 - 김용운, 김용국

『재미있는 수학여행』의 어떤 내용이 기억에 특히 남는다. 구를 '뾰족한 부분이 남지 않도록 안팎을 뒤집는 방법'에 대한 증명이었다. (위상수학이라 구의 표면은 다른 표면을 통과할 수 있다는 가정이 있고, 또 '뾰족한 부분'이라는 뭔가 허술하게 들리지만 수학적으로 엄밀한 정의도 있다.) 일찍이 몇 년간 증명되지 않은 상태로 수학자들을 괴롭히다가 1957년 스티븐 스메일이라는 대학원생이 추상적인(=시각화되지 않은) 증명을 발표하고, 몇 년 후 Kuiper & Shapiro가 도식적으로(=시각적으로) '실제로 이렇게 뒤집는다'는 것을 보인 유명한 문제이다. 실질적으로는 위상수학이라는 분야로 현실세계에 아무 도움도 안 되고 어렵기만 한 그 문제일 뿐이고, 그거 말고도 초딩들이 알아야 할 만한 더 중요한 수학 문제가 있을 텐데 김용운 교수는 어찌하여 이 수학책에 실어 놓은 것일까. 김용운 교수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초딩들을 도발하기까지 했다. "이 그림이 한 번에 이해된다면 천재가 분명하다!"


Kuiper & Shapiro의 구 뒤집기 도식화

내가 천재가 아니라는 쓰라린 감정을 겪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낸 후, (재미있는 수학여행의 영향으로) 물리학과에 진학하고 그 후 유튜브의 시대가 열렸다. 투박하고 이해 안 되는 저화질 흑백 그림 대신 실제로 부드럽게 동작하는 3D 그래픽으로 설명한 (자그마치 240p 화질의 유려한 동영상) 유명한 동영상 클립 'sphere inside out'를 볼 수 있었다. 단번에 이해가 되는 것이었다. 물론 이 동영상은 유튜브 용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고, 아마 유튜브라는 플랫폼이 나타나기 훨씬 전에 교육용으로 비싼 돈 들여 3D 콤퓨-타 그래픽스로 제작된 것이다. 그걸 유튜브 시대가 와서야 한국에 살고 있는 한 물리학 학부생이 감상할 수 있게 된 것.

Sphere inside out - youtube 동영상


스탠퍼드 대학교 수학과 출신 Grant Sanderson이 운영하는, 내가 요새 즐겨 보는 유튜브 '3blue1brown' 채널은 이런 '애니메이션화'된 고급수학을 마음껏 감상하며 짜릿한 기하학적 쾌감을 즐길 수 있는 강추 채널이다. (내 아내는 3blue1brown과 '우왁굳의 게임방송'을 번갈아가면서 보는 내 취향에 기겁하지만, 취향이란 존중되어야 하는 것.) 'Steven Strogatz(스티븐 스트로가츠)'라는 수학자와의 대담 비디오를 올린 적이 있는데, Brachistochrone(브라키스토크론)이라는, 발음하기조차 힘든 유명한 수학 문제를 단번에 이해되게 풀어준다. (궁금하실까 봐, 이 문제는 중력이 있는 상황에서 공이 어떤 곡선에서 가장 빨리 떨어질지를 푸는 문제로, 자그마치 뉴턴이 관여했던 문제이다. 정답은 현수선.)

The Brachistochrone, with Steven Strogatz (3blue1brown)


스티븐 스트로가츠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여기까지였으나, 이번 책을 읽어보고 연관 고리가 하나 더 생겼다. 카오스와 복잡계를 연구하는 수학자지만 책은 그런 내용은 아니고 기초 수학에 대한 내용이다. 굳이 아쉬움에 한소리 하자면, 네 권으로 이루어진 전설의 갓띵작 『재미있는 수학여행』의 방대한 볼륨에 비해, 『X의 즐거움』은 수학의 즐거움을 제대로 즐겨보기엔 좀 부족한 볼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 주제 한 주제 다 감질난다.


The Joy of X: A guided tour of Math, from one to infinity - Steven Strogatz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걸 나도 안다. 책의 구성이 칼럼이라는 사실을 알고 보면 어쩔 수 없는 구성이라는 걸 이해한다. 3blue1brown의 20분짜리 동영상을 집중해서 보다 보면 나도 때때로 지친다. (그래서 우왁굳을 좀 섞어 줘야 한다) 인간이 여흥으로서 글을 읽을 때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는 한계선이 있을 것이다. 한 3분 정도? 그런데 3분 분량의 글로 수학의 그 방대함을 표현할 수 있나? 불가능하다.


다시금 초딩에게 위상수학적 구 뒤집기를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그 경험을 초딩의 머릿속에 각인시킨 김용운 교수님의 전설적인 업적에 찬사를 보낸다. 스티븐 스트로가츠의 이 책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수학여행』보다는 한 수 아래지 않냐는 책의 평가를 내린다. 물론 현재의 내가 어떤 지식이나 쑥쑥 빨아먹던 그때의 그 초딩이 아니라는 시대적 차이점도 잊어먹지는 않았으니, 나쁜 평가는 절대 아니다. 어쩌면 2010년 이후 태어난 미래의 이공계 초딩들 또한 이 책을 찾아보고, 또 스티븐 스트로가츠의 유튜브도 찾아보고, 이어서 3blue1brown까지 섭렵하려 할지 모르겠다. 이번에 오랜만에 생각나 김용운 교수에 대해 찾아보았는데, 그 이후에도 많은 책들을 집필하시고 2020년 5월에 영면하셨다고 한다.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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