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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과학적이어야 되는데?

데이비드 헬펀드의 『생각한다면 과학자처럼』을 읽고

왜 과학적이어야 되는데?


예상치 못한 이 질문을 받고 인생을 통째로 부정당한 기분이 느껴질 줄이야. 지금까지 과학과 진리를 위해 싸워온 나날들, 과학의 방법론에 대해 알아가던 학부 시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심리학 분야에서 '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부정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 깨달았던 반증주의와 구획 문제, 석사 때 논문을 써 보고, 피어 리뷰와 과학자 사회에 대해 알게 되고, 추리통계와 가설검증에 대해 머리싸매며 공부하던 시절, 창조과학, 지구온난화 음모론, 백신 반대운동 등 사회에 심각한 해를 가하는 비과학뿐만 아니라 혈액형 성격론, MBTI, 양육 가설 등 일견 무해해 보이는 비과학에 대해서도 가열차게 공격을 시도해 왔던 과거가 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나의 인생에 있어서 소중하고 필수적인 가치를 지니는 '직장'이라는 장소의 한가운데서,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프로젝트 리더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았던 것이다.


"어떻게 과학적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매우 잘 대답할 수 있다. 1분짜리 엘리베이터 설득법 (임원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면, 1분 안에 임원을 설득해야 되기 때문에 이런 짓들을 한다고 한다.)으로도, 15분짜리 테드 토크 방식으로도, 1시간짜리 토크로도 다 잘 대답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과학적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자신 없다. 왜냐면, 내가 이미 비과학적인 짓거리를 하면서 수입을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프로젝트를 돌릴 때, 이 건 과학적이지 않아서 안되고, 저건 반증주의에 입각해 반증불가능하기 때문에 가설설정이 안되고, 그건 2015년 미국 무슨 대학교 누구 박사 논문에 의하면 이미 반증되었기 때문에 안되고...3개월짜리 프로젝트에 이짓거리를 하다 보면 나만 "협조적이지 않고 독선적이고 고집이 세서 팀원들과 같이 일하려는 마음가짐이 없는" 업무 방식으로 인해 안좋은 고과를 받게 될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예전에 회사 선배들이 했던 비과학적인 방법론을 그대로 써서 과학적인 것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임원에게 피상적인 파워포인트 장표 만들어서 보고하는 것이다. 어짜피 선행연구라 실현되기까지는 3~5년 남았으니까, 그 5년 후 미래에 사업이 실패하고 그 실패가 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5년 전 예측할 수 있었다해도 나의 5년 전 과학적 가설 검증을 하지 않기로 한 결정에 대해 뭐라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직장에서는 굳이 과학적일 필요가 없다. 이것이 나의 직장-과학 딜레마다.

A Survival Guide to the Misinformation Age - David J. Helfand


그러니까, 우리는 왜 과학적이어야 하는가? 과학이 아니면 진리를 지킬 수 없는가? 과학이 아닌 진리도 있다. 논리철학에서 도출된 진리는 굳이 과학적 방법론이 아니더라도 진리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수학도 사실은 과학이 아니다. 실험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학은 과학보다도 훠얼씬 빡센 기준으로 진리와 비진리를 가를 수 있다. 정치학과 사회학, 경영학에서 가설설정과 반증주의 같은 과학적 방법론으로 진리를 검증하려면 너무 많은 인력과 시간의 낭비가 들기 때문에 과학적 방법론과 다른 방법론을 겸하여 연구한다. 과학적 방법론 그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칼 포퍼의 반증주의를 반박한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은 이미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과학자 사회가 겉으로는 엄청나게 빡센 반증주의 절차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설 검증 절차, 피어 리뷰, 컨퍼런스 등)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근 심리과학에서 이슈되고 있는 'p-해킹'이라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p<0.05, 즉 5%의 확률로 틀릴 가능성이 있는 가설을 검증해 출판된 논문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겨우 5%? 물리학에서는 기겁할 수치지만, 균질하지 않은 인간에 대한 연구라는 주제의 특수성 때문에 심리과학에서는 적당히 간과되어 왔다. 아니, 간과된 게 아니라 p<0.05는 논문 출판의 하나의 기준으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논문 출판에 성공한다면 연구비가 들어온다. 나의 '직장-과학 딜레마'와 동일한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그 0.05의 경계에서, 연구자들은 논문을 출판하기 위해 데이터 조작이나 연구 조작이라고 말하기 좀 애매한 것들을 저지른다. 교수님, 0.051이 나왔습니다. 그래? 피험자를 좀 더 모집해서 좀만 실험을 돌려 봐. 그리고 피험자 15번은 좀 아웃라이어 같지 않나? 데이터에서 제외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럼 짜잔, p=0.048이 나온다. 그래, 이 가설은 4.8%의 확률로밖에 틀릴 가능성이 없으므로 우리의 가설은 진리야.


그러니까, 과학자 사회가 추구하는 과학이란 것도 이미 누더기인데 과학자도 아니고 과학자 사회에 속해 있지도 않은 내가 왜 과학적이어야 할까? 정답은 없고 나 스스로도 정답을 얻지 못해 방황하고 있는 중이므로 이에 대한 결론을 굳이 내려고 하진 않겠습니다. 책이요? 책의 저자가 천문학과 출신이라 천문학 이론과 지구온난화 가설에 대한 매우 자세하고 재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그 부분에 있어서 머리써가면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또한 저자의 커리어 자체도 훌륭했던 게, 인문학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던 대학 커리큘럼을 과학과 수학이 포함되도록 혁신한 노력도 빛났다. 저자는 책 초반에 '과학의 속성'이라는 챕터에서 과학에 대한 열 가지 속성을 제시했는데, 물론 이성적으로는 매우 이해가고 맞는 말들이지만 결국 나의 '직장-과학 딜레마'에 대한 생각 때문에 감정적으로는 공감이 잘 가지 않았다. 1. 과학은 통한다? 직장에서는 잘 안 통하더라. 2. 과학은 허튼 소리를 뿌리 뽑는 데 대단히 효과적이다? 내가 허튼 소리 전문가로 등극하더라. 3. 과학은 확실성을 내놓기 위해 애쓴다? 확실하지만 오래걸리더라. 프로젝트 일정 못맞추더라. 등등등. 아 너무 불평불만만 가득한 글이 되었습니다. 나의 불만은 임금으로 보상되었으므로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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