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외래생활 1
나: "교수님. 그럼 앞으로 어떤 증상이 생기면 다시와야 하나요?"
교수: (바쁘다는 듯이) "안내문 나눠드릴테니까 보세요"
옆에 있던 전공의: (황급하게 손을 저으며) "환자분, 그런 건 저랑 이야기 하시면 돼요"
교수: (전공의를 쳐다보며 황급히 자리를 떠난다.
망막 박리 및 망막 열공[ retinal detachment, retinal tear ]
요약 망막의 두 층, 즉 안쪽의 감각신경층과 바깥쪽의 색소상피층이 분리되거나(망막 박리), 망막에 구멍이 생긴 상태(망막 열공)
출처: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서울대학교병원
어제 밤 오른쪽 눈 실핏줄이 갑자기 터져 회사 근처 안과를 찾았다.
현미경으로 상하, 좌우를 열심히 살피던 의사는 지금 터진 실핏줄은 큰 문제가 없는데, 망막 가장 자리에서 열공 자국, 막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 같은 흔적이 발견된다고 했다.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하는 응급질환은 아니지만, 나중에 망막변성이나 망막박리가 되면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안과 전문 병원을 찾아 가급적 빨리 레이져 치료 받는 것을 권유하면서, 강남에 학교 동문 선후배들이 운영한다는 병원을 소개해 줬다.
갑자기 안과 수술을 받아야 한다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차피 수술을 받을 바에는 큰 병원에서 받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나는 집 근처 삼성서울병원 외래를 알아봤다. 삼성서울병원 초진 예약은 병원 홈페이지에서 진료과와 담당교수를 선택하면, 전문 상담사가 다시 전화를 해서 예약 일자를 잡는 방식이다.
오후 6시, 퇴근을 막 앞두고 있던 시간, 삼성서울병원 콜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상담사는 내일 오전 강XX 교수님의 외래가 9시 20분에 가능하다고 했다. 종합병원, 그것도 삼성서울병원 외래를 바로 다음 날 받을 수 있다니, 나는 상담사에게 여러 차례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회사에는 연차를 냈다.
안과는 진료 전에 미리 진행해야 하는 검사가 많다.
간단한 시력 검사는 물론이고 산동검사라는 것을 하는데, 안약을 넣고 동공을 크게 확장시킨 뒤 여러 검사를 진행했다. 나는 이번에 처음 해 봤는데, 안약을 투여하고 10분 정도 지나니까 앞에 있는 물체가 흐리게 보이기 시작하고, 앞에 적혀 있는 글자를 읽는 것도 힘들었다. 간호사 말이 6시간 정도는 지나야 정상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담당교수는 망막이 얇아진 자리는 있으나, 구멍까지 뚫린 것은 아니니, 레이저 치료는 필요없다고 진료 결과를 설명해 주었다. 다만, 정상적인 망막과는 분명히 다르고, 앞으로 구멍이 생길 가능성이 있으며, 박리가 진행될 수도 있다고 부연했다.
여기까지는 '슬의생'에 나오는 의사들 수준은 아니지만, 나름 교수의 진료도 꼼꼼하고 말투도 친절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걱정했던 열공이 아니라니 기분도 좋았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에 교수에게 질문을 하나 한 이후 오후 내내 떨떠름한 기분을 혼자 감내해야 했다.
다음은 문제의 마지막 대화이다.
나: "교수님. 그럼 앞으로 어떤 증상이 생기면 다시와야 하나요?"
교수: (바쁘다는 듯이) "안내문 나눠드릴테니까 보세요"
옆에 있던 전공의: (황급하게 손을 저으며) "환자분, 그런 건 저랑 이야기 하시면 돼요"
교수: (전공의를 쳐다보며 황급히 자리를 떠난다.
현실에는 '슬의생'에 나오는 조정석이나 유연석 같은 의사가 없는 걸 알면서도, 순간 꼭 저렇게 밖에 대답을 못하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다행히 전공의는 꽤나 친절하게 내 망막의 상태를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고, 교수님이 매우 꼼꼼하게 체크하셨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또한, 앞으로 생길 수 있는 여러 질환, 특히 비문증에 대해서는 일 주일에 최소 한번은 한쪽씩 눈을 가리고, 눈 앞에 떠다는 물질이 많아졌는지 확인해 보아야 하고, 이상이 생기면 그때 다시 방문하라고 했다.
그나마 상냥한 전공의를 만난 걸 위안으로 삼아야 하나?
아무래도 드라마를 너무 열심히 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