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예술을 시작하다
맞는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늘 느끼는 것은 나의 남편이란 이는 참으로 직업 선택을 잘한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문과에 강한 사람들은 이과에 약하고 이과에 강한 사람들은 문과에 약 하다고들 하고 내가 여지껏 살며 보아온 생각도 같다. 남편은 예술성이나 문학적 소양은 전혀 찾기 힘든 기계나 컴퓨터 종류의 가젯들을 보면 눈동자가 한 없이 커지는 유형의 사람이다. 애플에서 신제품 나오기가 무섭게 사들이고 시계 점포를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으며 여행 중에도 하드웨어 스토어 구경을 좋아하고 패이보릿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디스커버리 터보의 자동차 관련 프로그램들이다.
뭐, 취향이 확실한 것은 좋은 일이만서도 예술 쪽 소양이 눈곱 만치도 안 보인다. 그덕에 우리 집 거실에는 발리에서 남편이 홀딱 반해 사온 어릴 적 시골 외가에 가면 사촌 언니들 책상 위에 놓여 있었던 시 한 구절 적히고 마른 꽃잎 붙인 액자 수준의 커다란 그림 한 장을 걸어 놓고 살고 있다.
그런 그가 오십 대 '지천명'에 하늘의 뜻을 계시받았는지 '예술'을 시작했다. 그것도 여행 중에...
이야기는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의 취항지인 시애틀에서 호텔로 체크인하고 방을 찾아 들어간 몇 분 후 시작된다. 방에 들어서 트렁크를 한쪽으로 밀어 놓고 발코니 커튼을 막 여는 순간 방의 초인종이 울린다. 뭔 일인가 하고 뒤 돌아보는 순간 남편은 커다란 박스를 들고 서서 입이 찢어질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가 바로 침대 위로 올려 놓더니 나더러 뜯어 보란다. 이쯤 되면 내 머리엔 여행 중에 나를 위해 준비한 깜짝 선물인가 하고 기대 가득 되는 거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박스를 열고 보니 그 안에서 등장하신 물건은 잼스틱이라는 애플 앱을 사용해 기타 연습을 하는 악기였다. 여행 몇 주 전부터 인터넷 서핑을 하시다가 발견하고는
"이거 괜찮은 것 같지 않아? 내가 전부터 기타를 배우고 싶었는데 말야~. 이건 작아서 휴대도 간편하고 자리 차지도 안 하겠는걸."
하면서 살까 말까 물어 오던 그 물건.
그때는 속으로
'오죽 재능이 없었으면 시어머니께서 안가르치 셨을까.'
하면서 한귀로 듣고 흘렸는데 며칠 유튜브로 관심을 갖다가 조용해지더니 그사이 온라인으로 시애틀 호텔로 배달을 받아 놨던 것이겠다. 깜짝 선물 기대고 뭐고 크루즈 여행 동안 저것을 튕겨댈 남편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오는 것.
크루즈 선에 올랐다. 기타 비스름한 물건을 끌고.
아니나 다를까 크루즈선 방에서 쉴만한 시간이 되면 아이패드를 앞에 두고 잼스틱을 안고 딩딩거리는데 막 시작한 초보 수준이라서인지 일초에 한 번씩 딩딩 거리는 소리가 난다. 중간에 말을 걸면 집중이 안된다며 짜증을 내는 바람에 내 눈은 저절로 스르륵 감기며 쉬는 시간은 잠자는 시간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 밴쿠버 공항에서 어이가 상실되는 장면을 본다. 짐을 싸면서 잼스틱을 비행기에 들고 탈까 트렁크에 넣어 갈까 이랬다 저랬다 고민하길래 거추장 스러우니 트렁크에 집어 넣으라는 나의 야멸찬 한마디에 트렁크에 집어 넣어 부치고 비행기 체크인을 한 것인데 비행기 기다리는 동안 들어간 공항 라운지에서 리얼 기타를 들고 있는 젊은이를 보더니
"저 사람 봐, 기타를 비행기에 들고 타네. 나도 들고 탈걸 그랬잖아."
하고 나를 나무라듯 하는데 기타든 젊은이가 그 소리를 듣고는 남편에게 말을 건넨다.
"기타 비행기로 부치셨어요? 이걸 들고 탈려하니 200 달러를 추가 지불하라고 하네요. 여행 여기저기 다니면서 기타 항상 들고 탔는데 이런 경우 처음이에요."
하고 열이 좀 받은 듯 상기된 목소리다.
"제꺼는 트렁크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소형인데 들고 탈까 하다 트렁크에 넣어 부쳤지요."
이러는 거지.
"아예~, 음악 하세요?"
라는 젊은이의 한마디에 어떤 대답이 남편에게서 나올지 귀를 쫑긋 세워 봤다.
"아니요, 아직은 아마추어 수준이죠."
라고 하는 순간 목구멍 까지 치솟는 한마디...
'그냥 며칠 전 배우려고 샀다고 해~!'
집에 왔다.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 돌리고 청소도 대충하고 니콘 서비스 센터에 맡겼던 렌즈를 찾으러 시내로 나가는데 남편은 자동차 시동 걸어 주러 간다고 한다. 서비스 센터에서 번호표 들고 순서를 기다리는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온다.
"내가 지금 악기 점인데 말이지."
자동차 드라이브 하고 오겠다며 거긴 왜 가 있는 것인가. 겁나는 순간.
"여기서 기타 세일을 하네. 이런 기회가 별로 없는데 말야"
이건 뭔 시나락 까먹는 소린가.
"잼스틱이 별로 성능이 안 좋아?" 하고 묻는 나.
"그건 아닌데 배우는 데는 잼스틱이 좋지만 세일할 때 기타 장만해 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발리 하드 록 호텔에서 본 기타 같은 그런거야."
이런 거지.
한번 꽂히면 사들일 걸 알기에 이왕 살 것 기분 좋게 사라고 오케이 해주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니 거실 한편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일렉트릭 기타.
"내가 전부터 기타를 배우고 싶어 했지. 늘 이어폰 끼고 음악을 들으며 다녔는데 말이지 이젠 내 안의 음악성을 분출하고 싶더라고."
기가 차서 기절 직전 나의 한마디.
"기타 치면 치매 예방에 좋다기에 사도 좋다고 한 거야."
예술가인척 너스레 좀 떨고, 예술 한다고 돈 좀 들이고, 연습 한다고 내 귀의 신경 좀 건드린들 어떤가. 오십이 훌쩍 넘도록 변변한 취미 생활도 없이 열심히 일만하던 사람이 취미에 흠뻑 빠진 모습도 보기 좋은데다가 치매 예방이 된다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열심히 일한 당신 즐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