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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비 정 Sep 07. 2015

찬란히 빛나는 것

홍콩이 나를 지치게 할 때

나의 초등 학교 6학년 여름 방학을 시골 외가에서 보내면서 텔레비전에서 주말에 해주는 주말의 명화에 비비안 리와 로버트 테일러 주연의 '애수'라는 외화를 보며 내 인생 처음으로 영화에 감명을 받았다. 늘 해피 앤딩으로 끝나는 동화와 어린이 소설책을 주로 읽던 내가 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에 얼마나 눈물을 쏟았는지 모른다. 이후 주말이면 늦은 밤에도 외화를 보기 위해 깜깜한 밤 텔레비전 앞에 붙어있게 되었었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담뱃 꽁초를  질겅거리며 눈을 꼬누고 황야를 바라보던 서부  영화에서부터 이국 적인 배경의 역사물, 바람과 함께 사라진 클라크 게이블과 바다를 가르던 종교 영화까지 일주일을 주말의 영화 보는 기다림으로 버텼다고나 할까?

그중 또 다른  이루어질 수 없는 애달픈 사랑의 영화가 '모정'이라고 번역되어 방송된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이다. 야무지게 생긴 혼혈 여의사와 끝내 한국 전에서 생을 마감하는 호주인 종군 기자의 홍콩에서의 사랑을 그린 한 수인이라는 여주인공의 자전적 소설을 그린 영화였다. 이 영화의 감동을 배로 올려 준 것이 영화의 배경음악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카데미 영화제 음악상을 수상하였다는데 요즘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자주 배경음악으로 사용하는 마음을 애련하게 해주는 맛이 있는 음악이다. 철이 좀 들기  시작할 때 유행하던 홍콩 르와르의 윤발 오빠, 덕화 오빠, 국영 오빠 보다 이 옛 영화와 음악이 나의 중년 홍콩 인생을 이끌어주는 인생의 양념이 되어 주고 있다.

'a many splendored thing'의 작가 한 수인(1917~2012)

한 수인은 중국인 아버지와 벨기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로서 홍콩 퀸 메리 병원에서 여의사로 근무하는 중국의 국공 내전(1927~1949, 두 차례에 걸친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내전으로 이로 인해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은 대만으로 옮긴다.)으로 중국인 장교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다.

이언 모리슨은 타임스의 호주인 종군 기자로  호주인 아내와 이혼을 결정한 아직은 유부남이다. 이 두 사람은 홍콩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언 모리슨의 한국 전쟁 취재로 인한 이별, 그리고 사망 소식을 받고 언덕에서 서글퍼하는 한 수인의 모습을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언 모리슨(1913~1950)

영화 로케이션이 홍콩인 만큼 내가 사는 곳에서 페리를 타고 30분도 안돼 도착하는 홍콩 섬의 페리 터미널, 친구들과 모임에 약속을 잡는 미드레벨, 주말이면 남편과 함께 드라이브를 하기 위해 차를 모는 홍콩 섬 남부 애버딘과 리펄스베이, 지금은 주상 복합 아파트 단지를 건설 중인 옛 카이탁 공항 등등 홍콩의 옛 모습이 담긴 영화다. 영화 속 한 장면이 된 그곳들에서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수다를 떨 때 내  머릿속으로는  '아~! 그 당시 초라한 그 곳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던 연인들이 있었지...' 하는 회상을 가끔 한다.

영화 속 에버딘(지금의 점보 선상 레스토랑과 타이 팍 선상 레스토랑을 이어주는 선착장)
그때의 씨 팔레스 선상 레스토랑(지금은 다른 나라로 팔려감)
뒤에 옛 완차이,  코즈웨이가 보인다.

해외 생활을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때때로 홍콩에 대해 묻는다. 대체로 홍콩 생활에 만족들 하지만 그래도  못마땅해하는 것이 좁은 집과 습하고 더운 날씨다. 이에 타국 생활이 처음인 사람들은 향수병이 겹치면 우울해진다.

 나 역시 블로그라는 취미 생활로 우울증을 극복했고 SNS를 통해 한국인들과의 소통으로 향수병을 달래지만 숨 막히는 습한 공기와  반복되는 일상으로 가끔 지칠 때가 있다. 그럴 때 유튜브를 열고 모정의 장면들과 함께 흐르는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을 들으며 그 애절한 사랑이 있던 곳에 지금 내가 있고 하루 하루를 찬란히 빛나는 순간들로 그때의 슬펐던 영화의 끝을 해피앤딩으로 마무리 하고 있는 중이라는 주문을 건다. 지치고 우울해 하며 이 아름다운 시간들을 보낼 수 없다며 금새 힘이 돋는다. 아마도 멀지 않은 홍콩 어느 동네에선 검은 피부 색의 한 수인이 있을 지도 모르고, 바닷가 건너편 마을에는 금발의 한 수인이 있을 지도 모른다. 나의 상상 속엔 한국에서 온 키 작은 한 수인이 호주인 남편을 위해 파스타를 삶는 해피 앤딩을 바라보는 모습이 있다.  

물론 이 상상을 깨고 옆을 보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아이 패드를 들고 이 좁은 집을 채울 그 무언가를 온라인 쇼핑몰에서 고르고 있는 자니 잉글리시가 눈을 꿈뻑이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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