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프
그래. 버스정류장이 있었지. 예나누나를 따라 옆 마을로 이사한 재혁의 집에 갔을 때도 그 버스정류장에서 아이들은 버스를 탔다. 그렇다면 재혁이는 스스로 다른 도시에 간 것일까?
“일단 알겠어. 그래서 너도 같이 할 거야?”
문교가 태호를 보며 물었다. 태호는 아직 눈물이 맺힌 눈으로 아이들을 둘러보더니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아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넌 재혁이 본 사실을 숨겼으니까 누구보다 열심히 해라.”
문교가 태호에게 일갈했다. 태호는 목을 움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뭘 열심히 해. 자는 거 말고 뭐 더 있냐?”
표건이 태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긴장된 분위기가 어느 정도 풀어지자 이모가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자. 오늘부터 각자 재혁이랑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물건을 배게 아래에 두고 자는 거야. 알았지? 이게 첫 번째 규칙.”
“두 번째도 있어요?”
문교가 이모를 향해 물었다.
“응. 깨어날 때. 꿈의 주인이 배게 아래에 넣어두었던 물건은 꿈에서 어딘가에 있을 거야. 깨어날 때가 되면 모두 그 물건을 잡고 있어야해.”
“에?”
표건이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물건을 잡고 있어야 한다고요? 그럼 꿈도 꾸고 물건도 찾아야 해요?”
“아마도?”
이모가 반문하며 대답했다.
“이거 확실한 거 맞아요? 만약에 물건을 못 찾으면요?”
표건의 질문에 이모가 난감하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잘……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각자 꿈을 꾸게 될지 다 함께 그 꿈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어. 이렇게 여럿이 함께 해 본 적이 없어서.”
“이모님. 무슨 사이비종교 같은 거 아니죠?”
문교가 의심스러워하며 물었다.
“그런 건 아니고…….”
이모는 한숨을 쉬더니 마치 비밀얘기라도 하듯 조용히 말했다.
“사실 내가 귀신을 처음 느낀 건 너희 나이 때였거든. 그때 신기해서 이것저것 찾아보기도 했었어.”
“왜?”
이모가 가은을 곁눈질로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글쎄……, 귀신을 이용해서 인생을 좀 편하게 살아볼까……해서.”
아이들은 모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모는 애써 웃음으로 무마하려고 했다.
“그랬는데…… 아무것도 못 했어. 말한 것처럼 난 그냥 느낄 수만 있으니까. 그 끔찍한 모습을 직접 볼 수 없어서 다행이야.”
“실제로 보면 끔찍한 가요?”
효민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물었지만 이모는 어깨만 으쓱할 뿐이다.
“음…… 나도 모르지. 기색만 느끼니까. 처음 느낀 사람은 할아버지였어. 근데 저승으로 잘 가셨는지 얼마 후 없어지셨더라고. 그때 열심히 이것저것 알아봤지.”
“이모, 할아버지를 이용하려고 했던 거야?”
가은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모는 자포자기 한 듯 싱긋 웃었다.
“할아버지니까 더 잘해주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그럼 그 후에 이런 일이 또 있었어요?”
효민이 물었다.
“아니. 할머니는 그 전에 돌아가셨고, 엄마나 아빠는 아직 살아계셔서. 실제로 이게 얼마만인지…….”
“그럼 이모가 느꼈다는 귀신이 재혁이인지 어떻게 알아?”
“내 느낌이 틀리지 않다면 재혁이가 맞을 거야. 지금 여기에 앉아서 같이 이야기를 듣고 있거든. 그리고 계속 너를…… 뭐랄까, 보호하려고 하는 느낌이야.”
“나를?”
가은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왜?”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네 주변을 맴돌아. 재혁이의 기색이 확실해.”
효민은 말없이 가은의 주변을 눈으로 훑었다. 이모가 손뼉을 짝! 하고 치며 아이들의 주의를 모았다.
“그러니까 어떤 것을 두고 잠들지 잘 고민하고 정해졌으면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줘. 그래야 기억하기 쉽지. 단어보다는 이미지가 기억하기 쉬우니까.”
하지만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무도 꿈에서 재혁이를 봤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매일 등교 후 아이들은 가은이가 있는 4반에 잠깐 모였다가 아무 일도 없었음을 확인하고 헤어졌다. 처음에는 의기투합해서 꼭 범인을 찾으리라 마음먹었지만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변화가 없자 투덜대는 아이들도 나왔다.
“너희 이모 역시 사이비 아니야?”
문교가 다른 아이들이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추며 가은이에게 말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닐 거야.”
가은이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가은이 이모님이 뭐 때문에 그런 짓을 하겠어?”
효민이 문교의 눈치를 보며 가은이 편을 들어준다.
이런 일이 있고 며칠 뒤, 여름 방학을 닷새 앞둔 날. 정말로 아이들은 같은 꿈을 꾸었다.
우중충한 날씨 속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물가물한 기억 탓인지 시야 끝이 어둡다. 이건 꿈일까? 그렇다면 과연 누구의 꿈일까? 아니 우리가 같은 꿈을 꾸고 있긴 한 것일까?
비가 내리고, 연일 꿉꿉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좌우를 둘러보자 반팔을 입은 아이도 있고, 긴팔을 입은 아이도 있다. 아무래도 교실에 앉아있는 모양이다. 시선을 들어 정면을 응시하자 초록색 칠판이 보인다. 정신이 없다. 지금이 언제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내려 주변을 둘러본다. 그때 옆자리에 앉은 아이가 눈에 들어온다. 1학년 때 짝이었던 아이. 지금은 다른 반인데……. 얼굴을 확인하고 새삼스레 눈을 껌벅인다. 재빨리 시선을 돌려 책상을 바라본다. 1학년 사회 교과서.
그때 옆자리에 앉은 짝이 팔꿈치로 툭하고 오른팔을 친다. 획하고 고개를 돌리자 얼른 앞을 보라는 눈짓을 한다. 친구의 눈길을 따라 정면을 바라보자 사회선생님과 눈이 마주친다.
“안효민. 너 또 자니?”
주위에 앉은 친구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효민은 이내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였다. 창피함이 느껴짐과 동시에 기억이 난다.
작년 5월. 새로 빠졌던 게임 덕에 늦게 자느라 제일 지루한 사회시간에 고개를 가누지 못할 정도로 흔들거리며 잠들었었지. 몇 번이나 이런 일이 반복되자 어쩔 수 없이 게임을 줄여야 했다. 아침마다 눈이 벌게져서 정신을 못 차리자 엄마가 휴대폰이고 컴퓨터고 싹 다 갖다 버린다고 했었지. 기억이 난다.
꿈속이지만 잠이 싹 달아났다. 그래! 맞아! 그 때야! 아직은 재혁이 실종되기 전이다. 불과 지지난주까지만 해도 재혁이와 함께 야구를 했다. 고개를 번쩍 들고 대각선 앞에 앉은 재혁이의 자리를 눈으로 찾았다. 재혁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자신을 보고 있긴 했지만 웃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무 표정 없이 뚱한 눈으로 효민을 보고 있었다. 선생님의 설명이 이어진다. 재혁은 무표정하게 앞을 응시한다.
종소리가 울렸다. 수업이 끝나면 재혁에게 갈 생각이었지만 수업 종이 울림과 동시에 재혁이 튕겨지듯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달려 나갔다. 어? 재혁이……. 어디 가는 거야? 효민은 어리둥절한 채 안절부절 못했다. 재혁이를 따라 나가야 하나? 나는 이때 뭘 했었지? 아마도 쉬는 시간 내내 책상에 엎드려 쪽잠을 자고 있었겠지. 그나저나 재혁이는 어디를 간 거지? 고개를 길게 빼고 교실 뒷문을 바라보았다. 안 되겠다. 재혁이를 찾아봐야지. 쉬는 시간은 짧으니까 어디 멀리 가지는 못 했을 것이다.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실 뒷문을 향해 몇 걸음을 옮기는데 뛰어다니는 남자 아이들과 무리지어 걸어가는 여자 아이들 사이로 재혁이 가 보인다. 그리고…….
고개를 쭉 빼자 재혁이 앞에 단발머리 여자아이가 서 있다. 걸음을 멈추고 홀린 듯이 그들을 바라본다. 대관절 저 아이는 누구지?
재혁과 여자아이는 마주보고 서있지만 서로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여자아이는 복도 창밖을 보고 있고, 재혁은 여자아이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자세히 보니 왼손에는 종이가 들러있다. 종이. 메모지인가?
궁금했다. 전혀 기억에 없던 상황이라 보다 자세히 보기 위해 걸음을 뗐다가 멈췄다. 재혁의 표정이 좋지 않다.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몇 초 뒤 여자아이가 재혁의 손에서 낚아채듯 종이를 채갔다. 또렷하지 않은 꿈속이긴 하지만 그 여자아이를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는 여자아이.
단발머리 여자아이는 구겨진 종이를 손에 넣고 재혁을 지나쳐 복도 반대쪽으로 뛰어갔다. 둘이 함께 있던 시간은 불과 몇 초에 불과하다. 여자아이가 사라진 후에도 재혁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가 수업 시작종이 울리자 겨우 고개를 든다. 내내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효민과 눈이 마주친다. 짧은 찰나 핏기 없는 얼굴의 재혁은 슬퍼보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고 눈을 피한다. 딱딱하게 굳은 몸짓으로 교실로 들어오더니 그대로 효민을 지나쳐 자리를 향해 걸어간다. 여전히 부자연스러운 몸으로. 주먹을 꽉 말아 쥔 채.
전혀 기억에 없던 이 상황에 효민은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아이들이 우루루 들어와 각자 자기 자리를 찾아 앉는 동안에도 효민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다. 꿈은 여전히 이어진다.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더니 큰 소리로 말한다. 뻣뻣한 고개를 돌리자 선생님이 보인다.
“얘! 뭐하니? 자리에 앉아라!”
영어선생님이다. 천천히 숨을 내쉬고 몸을 움직인다. 주춤주춤 뒤를 돌아 자리로 돌아간다.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들어 재혁을 보지만 재혁은 앞만 볼 뿐 효민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오직 정면만을 응시한 채 앉아있지만 굳게 다문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얕은 숨을 내쉬던 효민은 시선을 거두고 책상을 내려다본다. 데굴데굴 샤프가 굴러간다. 샤프. 재혁이와 함께 학교 앞 문방구에서 샀던 샤프. 베개 아래에 이 샤프를 두고 잠이 들었었지. 엄마에게 몇 번이나 혼났는지 모르겠다. 공부도 안하는 놈이 침대에 샤프는 왜 두고 자냐고. 자다가 찔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샤프는 굉장히 느린 속도로 책상 가로질러 굴러가고 있었다. 이정도 속도면 멈춰야 하지 않나? 손을 들어 이상하게 데굴데굴 굴러가는 샤프를 잡는다. 샤프를 집어 올리자 어두웠던 가장자리부터 시야가 점점 까맣게 타 들어갔다.
어? 왜 이러지? 금세 시야가 어두워지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 뭐야? 왜 이래? 하는 생각과 동시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눈이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