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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에도 괴테를 만난다.

성주 총각

by 포뢰

소백산맥을 끼고 있는 경북 성주군. 이 곳에서 나고 자란 나는 21살, 건실한 청년이다.

아니, 사실은 건실한 청년이고 싶다.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기억에도 없는 엄마는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나를 남겨두고 떠났다.

아마도 생활고를 못 이겼으리라.


“너희 엄마 도망갔잖아.”


가끔 들었던 말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도망이란 무서운 것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죽어라 달려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엄마가 대체 뭐가 무서워서 ‘도망’을 갔을까.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곁에 없는 엄마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머리가 크고 나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병약한 몸에 일용직을 전전하던 아버지. 항상 따라다니는 가난의 그림자.

애초에 멀쩡한 엄마가 왜 아버지 같은 남자에게 끌렸는지 그게 더 의아하달까?

물론 멀쩡하다는 것도 엄마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 나의 상상의 산물이지만.


아무튼 그래서 정작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엄마는 혼잣말이라도 ‘엄마’라고 부르지만, 아버지는 어째서인지 “아빠”라는 말이 나오질 않는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던 아버지는 걸음마도 제대로 떼지 못한 아들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결국 나는 할매 손에 맡겨졌다.

아버지는 나를 할매에게 맡겨놓고 발걸음이 떨어 졌을까? 부모 중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나는 정말 이 세상에 있어도 되는 걸까?


머리가 굵어진 지금도 엄마와 아버지를 떠올리면 이런 생각들이 맴돌지만 그럼에도 할매가 있어 다행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산을 개간해서 농사를 짓던 할매에게 나는 귀여운 손자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천덕꾸러기에 불과했다.


그래도 우리 할매는 나를 버리지는 않았다. 억센 손으로 꿋꿋이 키웠다.

하루 종일 산과 들로 쏘다니며 시꺼멓게 된 얼굴을 거친 손으로 박박 문질러 닦아줄 때면 눈물이 쏟아지고, 그만 좀 닦으라며 할매의 손을 잡아버릴 때도 있지만 할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입학 한 후에도 할매는 내 예상보다 끈기 있게 버스 타는 법을 알려 주었다. 집이 산골에 있다 보니 도저히 걸어갈 수 없었다. 할매는 일주일 동안 매일 아침 함께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 그리고 학교가 파하면 항상 정문 앞에 할매가 서 있었다. 내 사춘기가 만약 초등학교 1학년 때 왔다면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허름한 옷을 입은 할매를 창피하게 생각해 도망쳤을지도 모르지만 그때의 나에게 할매는 왜 이리 반가운지.


할매와 함께 집으로 오는 하굣길이 든든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한글을 떼고 학교에 입학했지만 나는 고작 숫자만 읽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천만다행으로 버스 번호를 알아 볼 수 있었다.


“즈것이 니 동아줄이다.”


손마디가 굵어진 손으로 버스 앞에 붙은 숫자를 가리키며 할매가 말했다.

당연히 동아줄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저 번호가 중요하다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입학하고 일주일이 지나자 할매는 더 이상 학교에 따라오지 않았다. 학교가 끝난 후에도 할매는 없었다. 여기까지였다. 교문에 서 있던 할매가 보이지 않아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할매 입장에서는 큰 아량을 베풀어 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할매가 아니었다. 얼마 안 되는 우리 반 아이들 중 한글을 모르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교과서와 공책에 모두 이름을 적어 왔지만 난 아무것도 없었다.


“할매, 우리 반에서 내만 한글 모른다.”


검게 그을리고 쪼글쪼글한 얼굴을 들어 나를 보던 할매가 입을 열었다.


“다 알믄 핵교는 뭐할라꼬 다니노?”


말문이 막혔다. “할매는 와 한글을 안 알려 줬노?” 라고 묻고 싶었지만 할매의 대답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 나는 다음 날 담임선생님에게 똑같이 말했다.


“할매가…… 다 알믄 핵교는 말라꼬 다니냐고…….”


이상하다. 할매가 말했을 때는 당연한 이치처럼 들렸던 이 말이 내 입을 통해 나오자 어쩐지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눈을 깜박였다.


“부모님은?”


나는 고개를 숙이고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서울 말씨를 쓰는 선생님은 나에게 대답을 다그치지 않았다. 선생님에게 늘상 듣던 대로 “엄마가 도망갔어요.” 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 후 나는 매일 학교가 끝나고 교실에 남아 선생님과 한글공부를 해야 했다. 다행히 선생님이 예뻤기 때문에 오히려 그 시간을 기다렸다.

어쩌면 오롯이 나에게 관심을 주는 그 시간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시간이 더 지난 후에야 할매가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젊고 예쁘장했던 담임선생님이 임용고시를 통과하고 처음으로 부임된 학교의 학생이 나였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뒤돌아보니 보였던 사실들.

할매는 엄마처럼 다정하지는 않았지만 뚝심 있게 중심을 잡아주었고,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따듯한 정을 느꼈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친절한 사람도 가끔 있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불친절하고, 무례했다. 그들은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리고 지금도 모르지만 그들만의 사정이 있었겠지.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한 사람을 무시하고, 업신여겨야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들에게 “부모 없이 자란 놈”, “싹수가 노란 놈” 이라는 말을 들어야했다. 할매의 뚝심과 담임선생님의 친절은 세상을 살면서 자주 느낄 수 없는 감정이기 때문에 소중했던 것일까.



하지만 자라면서 이런 환경을 지겹도록 들어온 나는 그런 기대에 부응하듯 이러 저리 쏘다니며 나쁜 친구들과 어울렸고, 그 결과 간신히 중학교 졸업. 고등학교에 진학은 했지만 이런 저런 일에 휘말려 졸업은 하지 못했다. 그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굳이 그 생각을 바꿔 줄 마음도 없었다.

그 후 나는 나름 여러 직업을 전전했는데, 나이를 속이고 시작한 중국집 배달원부터 당구장 아르바이트까지. 성인이 된 지금은 보이스피싱 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당구장에서 일 할 때, 우연히 알게 된 사장님이 소개해준 곳인데 내 머리로 사람을 속이는 짓까지는 하지 못하고, 가끔 현장에서 ‘고객님’을 만나 돈을 수거하는 일을 하고 있다.

콜센터에서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 무슨 말로 이빨을 터는지 모르겠지만(아마도 대부분 대출이겠지.), 어쨌든 성공을 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 내 휴대폰으로 지령이 내려온다.

그러면 택시를 타고 자칭 고객을 만나 현금을 받고 이상한 영수증을 주는 게 내 업무다.

당구장 아르바이트보다 쏠쏠할 거라는 사장님의 말씀으로 옆 도시 대구로 옮겨와 일을 시작하게 됐는데, 장담했던 대로 돈은 조금 더 벌 수 있지만 어쩐지 즐겁지는 않다.


돈을 버는데도 즐겁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돈을 건네는 사람들의 표정이 한결같이 어둡기 때문이다. 나도 이 사람들이 어떤 술수에 걸려들었는지 대충 알기 때문에 일을 끝내고 일당을 받아도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아니지, 좋지 않다는 말은 내 기분에 비하면 아름다운 표현이리라!

솔직한 말로 기분 더럽다. 뭔가 털어낼 수 없는 찝찝함이 온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느낌이랄까.


지령을 수행한 하루의 끝은 항상 술에 취해 있다. 그들 대부분 눈은 번들거리고, 꾀죄죄한 옷에 기름으로 떡 진 머리, 파리한 안색을 하고 있는데 돈을 받고 희한한 영수증을 들려줄 때면 나는 가급적 그들의 눈을 보지 않으려 애쓴다.

눈을 들지 않고 발치에 시선을 잡아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에 취해 비몽사몽일 때조차 그들은 내 머릿속에 파고들고, 꿈에 나타나 나를 쫓아온다.

행색만큼이나 초라해 보이는 돈 조각을 들고……. 마음 한 구석에 묵직한 것이 들어앉아 있는 느낌.

그럼에도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돈 때문이다. 3~4주에 한 번씩, 고향으로 돌아가 할매에게 약간의 푼돈을 쥐어준다. 할매는 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내가 푼돈이나마나 벌어다 주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다. 그렇게 할매를 보고 나면 읍내로 나와 머리를 자른다.


<은하 머리방>

은하는 나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친구로, 소위 말하는 불알친구라든지, 죽마고우는 아니지만 그래도 고향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친구였다.

그리고 이런 나를 걱정해주는 단 한사람.


하지만 막역한 사이는 아니라서, 고향으로 가 할매를 만나고 머리방에 들러 이발을 하고나면 가게 밖에서 5분정도 노닥거리다 헤어지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제대로 된 또래 친구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늦둥이로 태어난 은하는 상고를 졸업하고 대구로 갈 예정이었지만, 어머니 다리가 아픈 후로 고향에 남아 같이 파마도 말아주고, 비질도 해주면서 부모님 곁에 머무르고 있다.

대구에 가고자 했던 사람은 은하였지만, 어찌된 일인지 지금 대구에 있는 사람은 내가 됐다.

사람일 모른다더니…….


그런데 요즘 고향에 갈 때마다 은하는 나에게 다시 공부를 시작해보라는 말을 잊지도 않고 항상 하고 있다.

골치가 아프다.


“니 검정고시 준비는 하고 있나?”


머리방 처마 밑, 나란히 선 채로 근황을 주고받고 있는데, 불쑥 말을 꺼낸다.


“안한다고 안했나. 됐다.”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깟 검정고시 본다고 지금 내 인생이 뭐가 그리 달라지겠나.

어차피 밑바닥 인생이고 누구하나 기대해주는 사람도 없는데……. 나는 슬글 슬금 눈치를 보며 화재를 돌리려 애쓴다.


“니 혹시…… 지금도 학준이랑 연락하나?”

“응? 안 한다. 오래 됐다.”


은하가 옛날 생각을 하는지 나를 빤히 바라본다.


“홍석아.”

“와?”

“지금이라도 공부해라. 졸업장이 있어야 취직도 할 수 있는 거 모르나.”

“됐다. 핵교 다닐 때도 공부 안했다.”


나와 은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침묵이 불편한 나는 체념한 말투로 말한다.


“내가 취직한다고 뭐가 달라지노. 됐다마. 이렇게 살란다.”


은하가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나를 바라본다.


“니는 할매가 정정하니까 그래 말하제. 내는 엄마 두고 갈수도 없다.”


은하가 이런 말을 꺼낸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머리방에 들를 때마다 반가워하는 미소 뒤에 이런 감정을 숨기고 있었나. 곁눈질로 본 은하는 땅이 꺼질세라 한숨을 쉰다.


“내는 나가고 싶다. 니가 부럽다.”


투덜대는 말투로 작게 말하고 은하는 몸을 돌려 가게 문을 열고 냉큼 들어가 버린다.

처마 밑에 홀로 남은 나는 나대로 할 말이 있다.


“니가 내까짓 게 뭐가 부럽노.”


시선이 떨어진다.


“내가 무슨 일 하는지는 아나.”


생각 안 해 본 것이 아니다. 나라고 지금 인생에 만족 하겠나. 하지만 학교 다닐 때도 공부와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내가 아니었나. 그때의 나는 공부보다는 가오가, 성적보다는 우정이 중요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때의 나를 되돌아보면 가오는 헛바람이었고, 우정이라 생각했던 감정은 휴지조각보다 못했다. 성인이 된 지금에야 깨달았지만 천성은 바꾸지 못하는지 나는 아직도 제자리에 눌러 앉아있다. 할매에게 떳떳한 돈으로 효도하고 싶다는 마음은 실현되지 못한 채 마음에서만 자라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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