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투에 적힌 글자
택시를 탄다. 휴대폰으로 지령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도착 장소는 한 번에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서 택시 운전사에게 몇 번이나 바뀐 도착지를 말해준다. 성격 나쁜 운전사를 만나면 중간에 택시를 갈아타야 하는 경우도 있고, 의심을 받을 때도 있다.
가끔은 내가 영화에서 본 FBI나 CIA 요원이고, 휴대폰으로 본부에서 지령을 받아 테러리스트를 잡으러 간다는 상상을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여기는 외국의 어느 도시이고(나폴리가 좋겠다. 이름이 마음에 든다.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우리나라 국정원 소속으로 힘겹게 기밀문서를 빼 내 도망가는 설정을 하곤 했다.
그러면 우울한 이 작업이 조금은 즐겁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택시에서 내려 고객님을 만나면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오고 만다.
택시를 타고 이러 저리 돌아다니다 멈춰 선다.
오늘 만난 택시기사는 다행히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내리기 직전 인상을 쓰며 말했다.
“가시나 몬쓰겠네.”
휴대폰에서 얼굴을 들고 기사님을 보자 혀를 끌끌 찬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재빨리 택시에서 내린다. 이 사람이 나를 기억하는 것도 싫고, 있지도 않은 여자친구 욕을 하는 것도 불쾌하다.
택시에서 내리자 더위가 엄습해 온다.
6월의 한 낮.
해가 높이 솟아있고 지면의 열기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휴대폰 문자에 적혀 있는 건물이 저기 있다.이 근처 어딘가에 내 고객님도 있을 터여서 고개를 길게 빼고 이리저리 둘러본다.
그러다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내 눈에 들어온 사람은 할머니였다.
긴장했는지 뻣뻣하게 굳은 몸과 초조해 보이는 기색으로 안절부절 못하며 돈이 들어있을 봉투를 가슴께에 꼭 껴안고 있다. 그리고 나처럼 고개를 둘레둘레 흔들며 누군가를 찾고 있다.
낡은 하늘색 줄무늬 티셔츠, 갈색 몸빼 바지. 처음에는 고향에 있는 할매인 줄 알았다.
숨을 들이마신다. 더운 열기가 숨과 함께 훅 들이켜진다.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내리며 다리를 움직여 할머니가 있는 쪽으로 바삐 걸어간다. 기척으로 봐선 할머니도 나를 알아본 듯하다. 내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이윽고 할머니 앞에 멈춰 서자, 할머니는 손마디가 불거진 손으로 덜덜 떨면서 나에게 봉투를 내민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올린다. 어쩌면 진짜 우리 할매인지 확인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뿔싸. 눈이 마주친다. 젠장…….
“아……. X발.”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욕이 튀어 나온다. 낚아채듯 봉투를 건네받고 주머니에 넣어뒀던 요상한 영수증을 던지듯 건넨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뛰어간다. 심장이 쿵쿵 뛴다.
우리 할매가 아니다. 그러면 된 거지. 저 할머니가 이 돈을 어떻게 구했는지는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이 돈이 필요해! 우리 할매도 이 돈이 필요하다고!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되뇌면서 속도를 늦추지 않고 뛰어간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나서야 멈춰 서서 벽을 짚고 가쁜 숨을 몰아쉰다. 등줄기를 따라 땀이 흐른다. 뒤돌아보고 싶다는 욕망과 보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뒤엉켜 싸우는 느낌이다.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침을 삼킨다.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살펴본다. 낡아빠진 봉투. 우리 할매의 쌈짓돈도 이런 봉투에 들어 있었지. 귀퉁이가 닳아서 헤져있고, 봉투 가운데는 몇 번이나 접었다 폈는지 주름이 져 있다.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들놈이 노름빚을 지고, 지어미 살을 파먹은 거겠지. 할머니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을 오십 번쯤은 하지 않았을까. 지금도 아들놈은 어디선가 노름을 하고 있겠지.
다리에 힘이 빠져서 짚고 있던 벽에 기대어 섰다.
봉투를 만지작거리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봉투 반대편 한 귀퉁이에 쓰여 있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부정한 재물은 영혼을 사로잡고, 피를 말린다.>
시선이 붙잡힌다. 얕게 고르던 숨이 멈춰진다. 손 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못 박힌 듯 서서 홀린 것처럼 그 문장을 내려다본다. 눈도 깜박이기 힘들다.
부정한 재물은 영혼을 사로잡고, 피를 말린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나를 휘감는다. 가슴 깊은 곳에서 하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기분이다. 내 영혼은 이 돈에 사로잡혔나?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다가 퍼뜩 정신이 든다.
마치 부정한 것을 본 양, 봉투를 서둘러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시선은 허공을 맴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선뜻 움직이기가 어렵다. 마침내 눈을 질끈 감고, 숨을 토해낸다. 생각을 떨치듯 머리를 흔들고, 억지로 다리를 움직인다.
택시를 잡아타고, 사무실로 향한다.
실장님은 아무렇지 않게 봉투에서 돈을 꺼낸다. 나는 제법 두툼해 보이는 만원짜리 지폐 다발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팔랑팔랑 돈을 세더니 나에게 일당을 내민다.
“수고했다.”
엉거주춤 돈을 받고, 그 자리에 잠깐 서 있는데, 실장님 책상에 아무렇게나 놓인 그 봉투에 눈이 간다. 실장님은 돈을 잃은 봉투에는 관심이 없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컴퓨터에 뭔가를 입력하고 있다.
“실장님.”
무슨 말을 하려고 실장님을 부르는지 모르겠다.
“어? 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실장님이 대답한다. 나는 머뭇거리다 봉투를 손으로 가리킨다.
“이 봉투, 제가 써도 될까요?”
실장님은 책상 위에 놓인 봉투를 마치 처음 본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봉투를 집어 나에게 건넨다. 봉투를 받아들고 일당과 함께 뒷주머니에 넣는다. 뒤돌아 사무실을 나오면서 실장님께 말한다.
“실장님, 아까 뛰오다 발목을 접질렀는데 며칠 쉬어도 될까요?”
실장님은 눈을 들어 나를 보더니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젓는다.
“어. 어. 알았다.”
소주를 사들고, 달랑거리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변두리 맨션의 반지하 달 방. 생라면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는데 문득 은하가 생각난다.
“가시나야. 이캐도 내가 부럽나.”
누구한테 하는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허공에 대고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뭐가 부럽나. 내까짓게.”
해롱해롱. 술에 취해 잠들지만 오늘 밤에는 그들이 따라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다.
며칠이 지났다.
다시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그 할머니를 만나고 난 다음날은 숙취로 힘들어서 하루 종일 누워있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될 대로 되라지. 급할 것도 없고, 딱히 할 일도 없는 인생 아닌가. 이렇게 늘어져 있어도 뭐라 할 사람도 없고.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는데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호재에게 전화가 온다.
“행님! 얼굴보기 힘드네.”
나보다 한 살 어린 호재의 사정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역시 하루하루 흘러가는 인생.
별 볼 일 없는 통화를 끝내고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배가 고프다 못해 속이 쓰리다. 더 누워있다가는 몸이 방바닥에 흡수될 거 같다. 세수 비슷한 걸 하고, 집을 나서서 근처 분식집에서 김밥과 라면으로 대충 허기를 때운 후, PC방에 들어서지만 역시나 딱히 할 일이 없다.
시간을 죽이다가 슬리퍼를 끌고 일어나 계산을 하러 카운터에 간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데 뭔가 떨어지는 것이 시야 끝에 걸린다. 허리를 굽혀 떨어진 것을 주워든다.
봉투다.
무의식적으로 앞뒤를 뒤집어 보다가 그 글자들에 시선이 머무른다.
<부정한 재물은 영혼을 사로잡고, 피를 말린다.>
멍하니 봉투에 적힌 글자들을 응시한다. 제법 또박또박 쓰여 있는 글씨. 기억났다.
할매로 착각한 할머니에게 받은 봉투. 글씨로 보아하니 분명 그 할머니가 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 누가 적었지?
봉투를 손에 든 채로 급하게 내가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온다. 다시 로그인을 하고 인터넷 창을 연다. 검색 창에 그 문장을 검색한다. 검색 결과가 주르르 화면에 나타난다.
대충 눈으로 훑어본다. 여러 가지 짤막한 사설이 덧붙여 있긴 하지만 검색결과는 대부분 한 가지를 가리키고 있다.
<괴테 - 파우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