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도서관
<괴테 - 파우스트>
파우스트? 술 이름 아니었나? 파우스트가…… 다른 뜻도 있었나?
가장 위에 있는 검색 결과를 클릭. 그 다음 결과를 클릭. 뭔가에 홀린 듯이 검색 결과를 쭉 읽어보고 있다.
아무래도 괴테라는 사람이 쓴 ‘책’인가 보다. 파우스트. 봉투에 적혀 있던 문장만큼이나 뇌리에 박힌다.
파우스트……. 괴테도…… 술을 좋아했나?
3주 만에 할매를 보러 고향집에 들른다.
다소 범법적인 행위이기는 하지만 고액 알바를 한 덕분에 할매에게 쥐어줄 정도의 푼돈이 아직 남아있었다. 할매에게 한껏 웃어주고, 은하 머리방으로 향한다.
더운 날씨에 가게 문이 열려있다. 슬쩍 안을 들여다보니 아주머니는 안계시고 은하 혼자 낡은 소파에 앉아
휴대폰에 코를 박고 있다. 기척 없이 들어가 뭘 보는지 슬쩍 들여다보다보니 완두콩처럼 생긴 무선이어폰을 열심히 보고 있다.
“뭔데? 이게?”
“엄마야! 놀래라!”
놀라 나자빠져있는 은하를 향해 씩 웃어준다. 은하는 여전히 씩씩거리면서도 옆자리를 내어준다.
“뭔데? 왜 왔는데? 머리 깍으러 왔나?”
퉁명스럽게 받아치는 은하 옆에 앉으면서도 히죽히죽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아이다. 니 보러 왔다. 어무이는?”
좁은 가게 안을 일부러 휘휘 둘러보며 묻는다.
“물리치료 받으러 병원 갔다.”
한 숨을 돌리고, 은하에게 단숨에 본론을 이야기 한다.
“은하야. 책 빌릴라믄 우에야 하노?”
다시 할매의 집으로 향하고 있다. 역시 뭐 하나 쉽게 되는 것이 없지만 발걸음은 가볍다.
그래, 이래야지! 쉬우면 재미가 없지.
책을 빌리고 싶다던 내 말에 은하는 내가 애를 낳았다는 말이라도 들은 양 눈이 똥그래졌다.
사진이라도 찍어둘걸. 그때의 은하 얼굴을 생각하면 입술사이로 웃음이 비집고 나온다. 하지만 결국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이름만 들어봤던 <도서관>이라는 곳을 은하가 알려줬다. 생각보다 박식하단 말이야. 똑똑한 여자야.
하지만 나에게 <도서관>이란 청와대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어디에 박혀있는지, 진짜로 존재하는 곳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대체 무슨 책을 찾느냐고, 야한 성인잡지 같은 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조금 놀랐다. 도서관이면 책은 다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떻게 가장 대중적인 성인 잡지가 없을 수 있단 말이야?
하긴, 요즘 누가 성인 잡지를 보겠나. 인터넷에 더 재미있는 것이 많은데.
하지만 아직 가보지도 않은 <도서관>에게 조금 실망했다.
은하에게는 미안하지만 어떤 책을 찾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파우스트. 고향에 올 때마다 나한테 파우스트를 말아 달라고 하면 곤란하니까.
“할매요, 아부지가 입던 양복 어딨노?”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큰 소리로 할매를 찾는다.
“양복? 그건 말라꼬 찾노?”
볕에 그을려 까맣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저 얼굴로 아직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입을라꼬 찾지. 할매도 참. 잠깐 찾아 봐도.”
“겨울 것밖에 없을낀데.”
아차.
전국에서 가장 덥다는 대구 옆에 있는 성주인데, 7월 초에 겨울 양복이라니. 그래도 성인 잡지 따위는 취급하지 않는 <도서관>을 영접하는데 양복 정도는 입어줘야지. 경건한 자세로 대출을 받으리라.
대출이라는 말이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쩌면 내가 보이스피싱 고금리 대출을 받은 고객님들만 상대해서 그럴지도 모르지. 은하가 처음에 대출 얘기를 했을 때는 단번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책 빌리는 걸 물어봤는데 대출 얘기는 왜 하나 했지.
마침내 할매가 다 헤지고, 한 눈에 봐도 작아 보이는 양복을 찾아서 내 앞에 늘어놓는다. 오랫동안 주인이 없었던 양복은 혹시 6.25 때 입었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낡았다. 책을 빌리려면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인가? 배움의 길은 역시 쉽지 않구나.
와이셔츠가 없어 임시방편으로 입고 있던 티셔츠 위에 자켓을 걸쳐 본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겨드랑이에 땀이 찬다. 바지는 더 심하다. 바지가 지나간 자리마다 후끈후끈하다.
<도서관>에 가기 전에 쓰러질 것 같다. 벌써 다리에 땀띠가 돋아나는 느낌이다.
“할매. 내 잠깐 나갔다 오께.”
“이거 입고 간다꼬?”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보는 할매가 어쩐지 너무 사랑스럽다. 할매를 껴안고 볼에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를 해준다.
“다 큰 아가 와 이라노. 징그럽게.”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할매에게 손을 흔들어 준다.
운동화를 꿰어 신고, 버스를 타러 가는 길.
날은 덥고, 옷 때문에 땀이 비 오듯 흐르지만 기분이 좋다. 설렌다.
구두가 없는 게 영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이 정도는 봐주겠지?
사실 누구도 나에게 양복을 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집 앞 PC방에 갈 때처럼 슬리퍼를 질질 끌며 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예감은 개똥이었다.
교육청 한쪽에 면해 있는 성주도서관은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으리으리하지도 않았고, 온 세상 책이 다 들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푹푹 찌는 날씨에 양복을 입고 온 사람은 나뿐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도서관 입구까지 걸어 올라가는 길을 여름철 개 마냥 혀를 내밀고 헐떡이며 걸어와야 했다.
열심히 고개를 돌리고 사람들을 둘러봤지만 다들 가벼운 옷차림으로 <도서관>에 온 것 같았다. 그들이 책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건지, 내가 뻘 짓을 한 건지 더운 날씨 탓에 가늠이 안 된다. 겉옷을 벗어 옆구리에 끼고 손부채질을 하며 2층으로 올라선다.
두리번거리면서 책을 찾는데, 역시 <도서관>이라서 그런지 책이 많긴 하다. 건물 외관만 보고 이 세상의 책이 다 있지 않을 것 같다던 생각은 섣부른 판단이었나 보다.
그런데 어디에서부터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망설이다가 카운터에 앉아있는 직원에게 다가가 조용히 책 이름을 말하고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직원은 키보드를 두드리더니 종이에 뭔가를 적어 나에게 건넨다.
852.괴.833
종이쪽지를 받고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 한참을 쳐다본다. 눈만 껌벅인다.
역시 <도서관>은 아무나 오는 곳이 아니구나. 다들 암호로 이야기하나? 혹시라도 이게 뭐냐고 물어보면 저 사람이 나를 무식하다고 생각할까 싶어 숫자와 글자를 조합해 여러 가지 해결방법을 생각해 본다.
앞으로 852 걸음을 걸어가서 오른쪽으로 돌아 833 걸음을 걸어가야 하나?
오……. 제법 보물찾기 같은데?
하지만 이건 아니겠지.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니면 전화를 걸어야 하나? 852-1833. 중간에 한글은 “괴”가 아니라 “고.1”아닐까? 전화를 걸면 직원이 책을 갖다 주나?
두꺼운 겨울 양복을 입고, 카운터 앞에서 종이쪽지를 보며 열심히 짱구를 굴린다. 분명 실내라서 에어컨이 돌아갈 텐데 해가 쨍쨍 내려쬐는 밖에서 걸어올 때만큼이나 땀이 줄줄 흐른다.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종이를 하염없이 내려 보고 있자니 직원이 나를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마치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면서 미소를 지어준다. 직원이 콧바람을 내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카운터를 돌아 나오더니 내 손에 들려있는 종이를 들고 책이 가득한 책장으로 향한다.
아니, 진작 이렇게 찾아주지. 왜 암호를 적은 종이만 덜렁 주냐고.
하지만 난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직원을 따라 간다. 나중에서야 이 사람이 ‘직원’이 아니라 ‘사서’라고 불린다는 것을 알게 됐다.
책장 한가운데 선 사서는 조그맣게 “여기요.”라고 말하고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더니 다시 자리로 돌아간다. 한걸음 다가서서 사서가 가리킨 곳을 훑어보니 과연 그 곳에 <파우스트>가 있다.
이런 암호로 잘도 찾아내네. 대단한 사람인가 보구만. 감탄이 절로 나온다.
책은 1, 2권으로 나뉘어있었다. 책을 꺼내, 이제 대출을 어떻게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주위를 둘러본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들 하나, 흉내라도 내 볼까 싶어 열심히 관찰한다.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의 손에 들린 책에 눈이 간다. 다들 손에는 몇 권의 책들이 들려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책을 쌓아서 들고 있다.
'책을…… 더 많이 빌려야 하나?'
다시 책장으로 몸을 돌려 아무거나 한 권 더 빼내어 든다. 선배님들을 따라 하기만 해도 절반은 가겠지.
이왕 왔으니 저들처럼 더 많이 빌려가는 것도 괜찮겠다 싶은 생각은 든다. 책장에 쪼로록 꽂혀 있는 책들을 보자 어쩐지 더 욕심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책을 빼들고 사서에게 걸어가는데 흐뭇하다.
아까 나를 도와준 사서에게 신분증을 내밀고 난생 처음으로 도서관 대출 카드를 만들어 받는다. 카드 양식은 원래 내가 써야겠지만 은혜로운 사서님이 모두 작성해주시고 나에게는 사인만 해달라고 하셨다.
암호해독도 능하신데 착하시기까지. 천사가 따로 없다. 캬.
얼른 내가 골라온 책을 사서님께 드렸다.
삑! 삑! 삑!
사서님이 편의점처럼 바코드를 찍더니 어쩐 일인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와 책을 번갈아 바라본다.
반납을 안할까봐 걱정스러우신가? 모든 일련의 과정이 끝나고 나자,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책을 건네는 사서에게 함박웃음을 지어준다. 땀은 좀 흘렸지만 별 것 아니었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