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
할매 집으로 돌아와 허물 벗듯 양복을 벗어던진다. 찬물을 대충 끼얹고 나니 살만하다. 팬티 바람으로 방바닥에 벌렁 누워서 오늘 대출 받아온 책을 집어 든다.
파우스트.
이렇게 두꺼운 책을 내가 읽다니. 세상 참 별일이 다 있다.
파우스트는 총 5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글자가 가운데에만 있고 여백이 많다. 차례를 보고 다짐을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1막까지는 읽어보자!
파우스트가 술이 아니라 사람 이름이었다니. 처음 알았다. 그리고 괴테는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이렇게 방대하게 쓸 수 있다니!
단어, 단어는 알겠는데 문장으로 읽으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신통방통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지금까지 책을 멀리 했으니 어쩌면 이해가 안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같은 줄을 또 읽기도하고, 이해가 되지 않아 첫 줄부터 다시 읽어보기도 한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휴대폰으로 검색까지 해 본다. 그렇게 어렵사리 처음 다짐했던 대로 1막을 읽었지만 더 혼란스러운 느낌이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읽어서인지 전체적으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어렴풋이 알겠다.
파우스트가 뭔가에 실패한 듯하다. 그리고 이름이 일곱 글자나 되는 악마와 내기를 한다는 것. 정말 한시가 급할 때는 이 악마의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 잠깐 고민도 했었다.
이렇게 1막을 끝까지 읽고 잠깐 쉬어준다. 앞으로 길 잃은 강아지는 절대 집에 데리고 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메피스토가 강아지로 분해 파우스트를 따라옴)
내친 김에 2막을 읽어본다. 할매 집에서 대구로 넘어오는 길에도 책에서 손을 떼지 않는다.
이런 내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우습다. 내가 언제부터 이랬다고. 목구멍에 물이 넘어가듯 술술 넘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1막을 읽고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인지 2막은 그래도 수월하게 읽어졌다.
파우스트는 악마와 마녀의 도움으로 젊어지고 사랑에 빠지는데 이야기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봉투에 적혀있던, 내 눈을 사로잡았던 그 글귀가 2막에 나온다.
그레트헨이 악마에게 받은 상자!
파우스트가 그레트헨의 환심을 사기 위해 보석을 넣어 그녀의 어머니 몰래 건네는 상자.
<부정한 재물은 영혼을 사로잡고, 피를 말린다.>
내가 주목했던 이 문장은 사실 전체적인 줄거리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문장을 구성하고 있는, 단어가 아닌 의미조차 없는 글자 하나하나가 나를 꾸짖는 것 같았다.
어찌된 일인지 나는 너무 동화되어 갔다.
내가 손에 쥔 돈이나 그레트헨이 악마에게 받은 선물 모두 부정한 재물일까? 생각이 많아진다.
흔들리는 버스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이렇게 책을 몰두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눈에 힘을 주고 책을 읽지만 의외로 책장을 잘 넘어가지 않았다. 어려운 단어들, 처음 보는 문장들이 책장을 넘기지 못하도록 내 손을 묶어 놨다.
그럼에도 찔끔찔끔 전개되는 이야기가 파도처럼 흘러가 내가 제대로 읽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정신 줄을 놓고 미쳐버린 그레트헨이…… 자신의 아이를 죽였다. 그리고 믿고 있던 파우스트마저 옆에 없다.
이럴 수가.
그레트헨이 파우스트의 선물을 받아서 인생이 꼬인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나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내 인생도 이렇게 흘러가버릴까? 더러운 것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처럼 부정한 재물 역시 정말…… 영혼을 사로잡나? 나는 어느새 책에 푹 빠져있었지만 뜻밖의 전개에 허탈해졌다. 착한 그레트헨이 왜 이렇게 되어야 하나…….
뭔가 혼란스러운 마음에 다음 내용이 궁금해져서 책을 한쪽으로 밀어두고 휴대폰으로 검색을 해본다.
결과를 알고 싶은데 책으로 읽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분명 누군가 줄거리를 올려놓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쩐지 이 모습을 책이 보면 섭섭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책을 등지고 몰래 <파우스트>를 입력하고 검색을 하려는데……
붕-. 붕-
전화기가 울린다. 깜짝 놀라서 휴대폰을 손에서 떨어뜨린다.
와씨-.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화면을 보니 실장님이다. 멈칫. 너무 오래 쉬었나. 숨을 고르고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아. 홍석아. 다리는 괘안나?”
뜬금없는 다리 얘기에 잠시 어안이 벙벙하다.
“……에.”
의문형인지 긍정인지 알 수 없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발목을 다친 적이 없지만 다시 일을 시작하기가
왠지 껄끄럽다. 그들의 초라한 낯빛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사무실 한번 들리라.”
대답이 없자 실장님은 전화를 끊었다. 입안에 말라가는 느낌이다. 검색하려던 휴대폰을 내려놓고, 억지로
일어나 바지에 다리를 꿰어 넣는다. 항상 메고 다니던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선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오후 4시가 다 되었다. 바로 들어갈 수가 없어 근처에서 잠깐 배회하다가 마음을 먹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하던 일인데, 왜 이리 발길이 안 떨어지는지 모르겠다.
소파에는 호재와 실장님 아들이 앉아있었다. 호재는 휴대폰을 보고 있고, 실장님 아들 건우는 숙제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책상에 있는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실장님이 문 여는 소리에 고개를 든다.
“어, 왔나.”
꾸벅 인사를 하고 소파 한쪽에 앉는다. 아직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는데 어쩐지 실장님의 눈치를 보게 된다. 호재가 휴대폰에서 고개를 들고 나를 본다.
“행님! 오랜만이네.”
웃으며 알은체를 해 준다. 어색한 사무실에서 이런 잡담이 고맙다. 그런데 이내 요상한 표정을 짓더니 “행님! 얼굴이 와 이리 상했노?” 하며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들갑을 떤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됐다. 잠을 좀 몬 자서…….”
“괘안은 거 맞나?”
나름 진지하게 걱정해주는 표정에 순간 마음이 따듯해지려는 찰나, 음흉한 미소를 띤다.
“밤에 안자고 혼자 뭐하는데?”
“응?”
“적당히 해라. 적당히”
멍하니 호재를 바라보다가 정신이 든다.
“아이다. 그런 거 아이다.”
“그럼 사무실도 안 오고 뭐했는데? 그카고 얼굴은 또 와 그라는데?”
그렇게 얼굴이 상했나? 생각해보니 꼭 책 때문은 아니지만 제대로 먹은 적이 언제인가 싶기도 하다. 쑥스러운 마음에 양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 마른세수를 한다. 그리고 흘끗 호재를 곁눈질로 본다.
이해할 수도 없는 책을 읽는다고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하면 호재는 뭐라고 할까? 무시하고 싶진 않지만 이 녀석이 괴테를 알기나 할까? 불과 얼마 전까지 나도 몰랐는데……. 일부러 흘리는 말투로 이야기한다.
더 이상 묻지 않기를 바라면서.
“괴테 봤다.”
대답을 들은 호재는 눈이 커진다.
“괴뢰? 북한 간첩 말하나?”
이번에는 내가 어안이 벙벙해진다. 이 녀석,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요즘에도 그런 게 있나?”
“아니, 책.”
아- 설명하기가 귀찮다. 그래서 눈짓으로 가방을 가리켰다.
그런데 무엇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는지 모르겠지만 호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가방을 낚아채더니 지퍼를 열고 안을 들여다본다.
뭐하나, 이 자식. 가방에 있는 책은 집에 두고 왔는데…….
“이거 말하나?”
호재가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괴테는 집에 두고 왔는데, 저 책은 뭐지?
<단테 - 신곡>
아…….
이 책은 뭐지? 머릿속을 바쁘게 헤집는다.
아! 그러고 보니 성주도서관에서 괴테 말고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한 권 더 빌려 온 책이 있었지. 가방에 쑤셔 넣어 뒀던 책. 그 책이 단테의 신곡이었나 보다. 나도 오늘 처음 본다.
“그거 아인데……. 내가 본 건 괴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모두 얘기한다. 반은 쑥스럽고, 반은 포기상태로.
호재는 책 표지를 유심히 살핀다.
“괴테에? 둘이 형제가? 괴테, 단테?”
어? 그런가? 난 몰랐는데……. 이 자식,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했나? 제법 날카로운데? 슬쩍 질투심이 고개를 든다.
그런데 이때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건우가 아는 척을 한다.
“내 안다! 그 사람! 단테! 안단테 아이가? 피아노 학원에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