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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에도 괴테를 만난다.

털복숭이 문학소년

by 포뢰

“괴테에? 둘이 형제가? 괴테, 단테?”


어? 그런가? 난 몰랐는데……. 이 자식,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했나? 제법 날카로운데?

슬쩍 질투심이 고개를 든다.

그런데 이때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건우가 아는 척을 한다.


“내 안다! 그 사람! 단테! 안단테 아이가? 피아노 학원에서 배웠다!”


대화는 엉뚱한 방향으로 거침없이 흘러갔다.


“안단테? 그럼 이기 한국사람 아이가? 안씨 라꼬?”


호재는 반가운 가족이라도 만난 양 호들갑을 떨었다.


“응! 형아! 모르나? 애국가 작곡한 사람이다!”


마침내 호재는 깊은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책 표지를 다시 살펴봤다.


“아! 맞네! 음악가네! 신곡 발표한 거 아이가! 그래서 여기 <신곡>이라고 써 있는 거 아이가?”


책 표지에 적힌 제목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 역시 아는 것이 전혀 없어서 반박을 못하겠다.


“강홍써이. 참말로 유식하네. 이기 신곡 가사집인가 보제?”


만면에 미소를 가득 지으며 호재가 말한다. 어안이 벙벙하다. 난 맹세코 오늘 처음 본 책이라 정말 모르겠다. 진짜…… 신곡 가사집인가?


“뭔 놈에 가사가 이리 많노. 클래식은 음악도 길다카더만, 가사도 억수로 기네.”


엄지손가락 끝으로 책을 휘리릭 넘기며 호재가 말한다. 그때 실장님이 건우를 부른다.


“야, 건우야. 요 앞 편의점 좀 갔다온나.”


건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형아랑 먹게 컵라면하고, 물도 좀 사온나. 돈 여 있다.”


실장님은 건우에게 2만원을 건넨다.


“호재 형아랑 같이 가도 되나?”

“어, 그래. 남는 걸로 니 먹고 싶은 것도 사라.”


실장님에게 돈을 건네받은 건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호재에게 다가선다. 호재는 툭툭 털며 나를 보고 싱긋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건우와 호재가 사무실 밖으로 나가자 한순간 나만 덩그러니 소파에 혼자 남게

됐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그때 실장님이 나를 부른다.


“홍석이, 이 쪽으로 온나.”


왼손을 까딱까딱 움직인다. 엉거주춤 일어나 실장님이 계신 곳으로 걸어간다.


“다리는 괘안나?”

“예.”


실장님은 잠시 아무 말씀이 없더니, 이내 한숨을 쉰다.


“피아노 학원 그만 보내야겠제?”

“에?”

“니 모르나? 애국가 작곡한 사람은 안익태다. 안단테가 아이고.”


맹세코 몰랐다. 안익태든 안단테든 모두 오늘 처음 듣는 이름이다.


“공부는 영…….”


혀를 끌끌 찬다. 그러더니 잠시 틈을 두고 놀라운 말을 한다.


“<파우스트> 읽는 기가?”

“예?”


깜짝 놀랐다. 내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와 놀라노. 괴테 읽는다꼬 안했나?”

“……예. 맞습니다.”

“끝까지 다 읽었나?”

“아직…….”


마치 숙제를 안 해 와서 혼나는 학생처럼 움츠러드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나는 실장님의 시선을 피하고,

실장님은 내 눈을 바라보려고 한다. 잠시 그 상태로 있다가 실장님이 먼저 입을 뗀다.


“파우스트가 무슨 내용인지는 아나? 어려울낀데 용케 읽을 생각을 다 했네?”


내 눈은 어디를 보고 있어야 할지 모른다는 듯이 방황했다. 실장님은 그런 나를 보더니 짧게 후후 웃고 나서 내처 말한다.


“해석이 다 다른데…… 그래도 인간은 끝까지 노력해야한다. 뭐 이런 내용 아니겠나.”


고개를 붕붕 젓는다.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런 내용이 있었나 싶다. 게다가 오늘 사무실에서의 대화는 따라가기 힘든 놀라움의 연속이다.

실장님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손가락 끝을 책상에 톡톡 두드리더니, 책상 가장 아래 서랍을 열어 일수가방을 꺼낸다. 지퍼를 열자 지폐들이 들어있다. 만원짜리 서른 장을 세어 나에게 건넨다.


“받아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폐를 받아든다.


“퇴직금이다.”

“에?”

“니는 이제 그만 온나.”


매정하게 들리는 말과는 다르게 실장님은 웃고 있다. 아……. 웃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지금은 이 꼴이지만서도 문학을 좋아했다 아이가. 아까 호재가 형제냐고 물었던 괴테, 단테도 다 읽었다. 니 설마 진짜 형제라고 믿는 건 아이제?”


실장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믿을 뻔 했습니다, 실장님. 질투도 했는걸요.'


차마 입 밖으로 꺼내 말하지는 못하고 서 있다. 나는 실장님에게 혼란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내보이고 있지는 않을까?

그건 그렇고 이 남자를 다시 봤다. 두툼한 살집이 있고, 손등까지 털이 수북하게 자란 이 남자를.

외모 어디를 보나 고리대금업이 천직일 것처럼 생긴 이 남자가 문학을 좋아했다니!

실장님도 내 생각을 꿰뚫어 본 듯 말을 이었다.


“중학교 때 집에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다 아이가. 우리 어머니가 빚내서 사줬다. 호메로스와 게오르규, 어윈쇼…… 밤마다 읽었제.”


옛날 생각을 하는지 눈동자가 반짝였다. 발그레한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려있다.

이런 멧돼지 같은 사내에게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태어나자마자 이 모습이었을 것 같은데……. 중학생인 실장님이 도통 그려지지 않는다.

그때도 손등에 털이 났습니까? 라고 차마 묻지 못하겠다.

반짝이는 눈빛 그대로 나를 바라보던 실장님이 입을 뗀다.


“단테는 이탈리아 사람이고, 괴테는 독일 사람이다. 알긋나?”

“……예.”


실장님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솥뚜껑 같은 손으로 내 어깨를 툭툭 친다.


“박사장한테 니를 소개 받았을 때는 멍청한 놈이라 생각했데이. 근데 니를 써보니까 착하고 멍청하대. 내가 이 일을 하루, 이틀 했나? 별의 별 놈을 다 봤다. 돈 훔쳐가는 놈도 수두룩 했다. 니는…… 믿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놈 중에 하나였다. 니가…… 그 많은 책 중에 파우스트를 고른 건, 다 이유가 있을끼다. 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괴테처럼 살아라. 아이제, 파우스트처럼 살아라. 파우스트도 방황하다가 다시 일어나 노력했다안했나. 니도 잠깐 방황했지만 다시 시작해라.”


꼼짝도 할 수가 없다. 시선은 실장님을 향하고 있지만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파우스트에 나오제? 착한 인간은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바른 길을 알고 있다꼬. 이건 니 얘기다. 알긋나?

인나서 니 앞에 있는 거, 잡아라.”


나를 바라보는 실장님의 눈에는 ‘나처럼 되지 말아라.’ 라는 말이 담겨있는 듯 했다.

뭐…… 아니면 어쩔 수 없고.


“그리고 여는 다시 오지 마라.”


움직일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괜히 눈물이 차오르는 것 같아 눈을 질끈 감는다. 실장님은 털이 북술북술한 두툼한 손으로 내 등을 살며시 문가로 민다. 억지로 발걸음이 떨어진다. 쇼파에 널브러져 있던 가방을 챙겨 어깨에 둘러맨다. 사무실 문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뒤를 돌아본다. 실장님은 이미 자리에 다시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다.


“난중에 꼭 들리겠습니다.”


실장님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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