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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에도 괴테를 만난다.

서울에서 온 전학생

by 포뢰

한순간에 실업자가 되었다.

괴테는 운명처럼 내게 다가와 나를 백수로 만들었다. 솔직히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돈벌이는 쏠쏠했지만,

어딘가 마음이 불편했으므로.

다만…… 실장님이 너무 놀라울 뿐이다. 다시 생각해도 놀랍다.

중학생이 된 실장님이 밤마다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사실 나에게 눈물을 흘렸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이제 뭘 해야 하나. 집으로 오면서 머리가 멍해졌다. 7월의 열기도 느끼지 못 할 정도였다.


집에 도착해 씻고 컵라면으로 대충 허기를 면한 뒤, 다시 파우스트를 집어 들었다.

그래, 이거라도 끝내자.



2권 3막으로 들어서자 이게 이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발음하기도 어려운 휘황찬란한 이름들이 줄줄이 늘어서는데 이름 읽다가 날 샐 판이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바람에 메모지에(사무실에서 가져온 일수 메모지가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이름을 적고 보다가…… 이름만 적어놓으니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이름 옆에 간단하게 특징도 적어 놓았다.

<헬레나 - 절세미녀> 이런 식으로.


이렇다보니 진도가 나가지 않아 반납기한을 놓쳐버렸다. 날짜가 지난 것을 처음 알았을 때는 달력을 붙들고 어째야하나 고민을 하다가 결국 은하에게 전화를 했다.

이럴 때 내가 비빌 곳은 은하 밖에 없다.


“은하 머리방입니다.”

“은하야.”

“어? 홍석이가?”

“응. 내다.”

“우짠일이고?”

“내 큰일 났다.”


은하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응? 뭔데?”

“책 반납 기한을 놓쳤다.”

“채-액?”

“그래, 책.”


은하가 돌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가 참지 못하고 은하를 부른다.


“은하야-.”

“니 책이라꼬 했나?”

“어, 그래…… 책 말이다.”

“공부할 때 보는 그런 책 말하나?”

“응, 그래. 책이 뭐 또 있나?”


대답을 들은 은하가 자꾸 말은 안한다. 가시나가 대체 와 이라노?


“은하야, 니 듣고 있나?”

“……니 공부하나?”

“아니, 아니다. 그게 아니라…… 얼마 전에 내가 니한테 도서관 물어보지 않았나?”

“응. 물어봤제.”

“그 책 말하는 기다. 반납기한이 지났는데 우짜제?”

“니…… 진짜로 도서관에 갔나?”

“……응.”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은하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다시 공부하기로 했나?”

“와 조그맣게 말하는데?”


나도 은하를 따라서 속삭이며 말했다.


“아니, 아니다. 책은 언제 반납할낀데?”

“아직 다 몬 읽었다.”

“그럼 다 읽고 반납해라. 늘어난 날짜만큼 책 몬 빌린다.”

“그게 다가?”

“응. 무슨 책 빌렸는데?”

“……괴테.”

“응? 개테? 그게 뭔데?”

“아니다. 됐다. 끊는다.”


황급히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누른다. 은하한테 괜히 물어봤나하는 생각이 든다.

은하와 정말 오랜만에 통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강학준입니다.”


작은 시골 학교. 학준이는 서울에서 온 멀끔한 전학생이었다.

하얀 얼굴에 단정한 이목구비, 거기에 슬릭백 언더컷의 헤어스타일은 착한 남자와 나쁜 남자 이미지가 묘하게 섞여 있었다.

대체 이런 남자아이가 이 작은 학교에 왜 전학을 왔을까?

소문이 난무했지만 학준이는 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내리며 가지런한 치아가 보이도록 웃어줄 뿐이었다.


당연히 여자아이들은 그 모습에 넋을 잃었다. 은아도 그 중 하나였다.

똑같은 교복을 입어도 학준이의 셔츠는 더 하얗게 보였고, 나긋나긋한 말투의 서울말씨는 귀를 간질였다……는 건 사실 콩깍지가 쓰인 여자아이들의 말이었다.

처음 본 학준이는 허옇고 비리비리해보였다. 머리는 아침마다 손질을 하고 오는 것인지 깔끔하게 스타일링 되어 있었는데 학교 오면서 왜 저러고 오는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학생이 머리가 저게 뭐꼬?”


남자아이들의 질투 어린 시선. 하지만 솔직히 멋있었다. 도시 남자란 저런 느낌인가 싶었다.


“니는 학생이 머리는 감고 오는 기가?”



학준이의 곁에는 늘 여자아이들이 끊이질 않았다. 급식실에서는 마치 엄마가 이제 막 숟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한 아들내미에게 반찬을 올려주듯이 여자아이들이 앞 다투어 학준이의 식판에 자신들이 받은 반찬을 나누어 주기 바빴고, 눈길이라도 한 번 받고 싶었는지 몸을 베베 꼬면서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벌레 들어갔나?”


은아가 홱 고개를 돌렸다.


“어깨를 와 이리, 이리 해쌌노?”


은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은아의 옆에 앉아 있던 학준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 서울 머스마, 꼭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네.


은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몇 걸음 걸어 검은 아우라를 뿜으며 나에게 다가오더니 독수리 발톱처럼 내 왼쪽 팔에 손톱을 박아 넣는다. 그러더니 교실 뒷문으로 나를 끌고 간다.

뒷문으로 끌려 나가기 전 고개를 뒤로 돌려 학준이를 보았다. 그는 작게 미소 지으며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리 반 뒷문과 옆 반의 앞 문 사이 벽에 은아가 나를 거칠게 세웠다.

마주 본 은아의 눈은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니 미쳤나?”

“저런 머스마가 뭐가 좋노?”

“뭐? 내…… 내가 언제 좋다고 했노?”

“니 얼굴 빨개졌다.”

“야!”

“분명히 서울에서 사고치고 왔을끼다. 공부 잘하는 샌님이었으믄 중 3때 이런 시골로 와 이사 왔겠노?”

“마음대로 씨부리지 마라. 니가 학준이에 대해 뭘 아나?”

“니는 아나?”

“조용히 해라.”


은아를 눈을 부라리며 교실로 들어갔다. 은아를…… 딱히 좋아한 것도 아니었다. 여자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은아가 그 넘아 옆에 딱 붙어 앉아 등이 가려운 사람 마냥 몸을 베베 꼬고, 콧소리를 내며 말하는 게 어쩐지 눈꼴사납다.


그 둘이 눈에 거슬렸지만 은하 말대로 나는 가능하면 신경 쓰지 않았다. 서울에서 온 전학생과 소꿉친구 말고도 나는 동네 똘마니들과 몰려다니며 나름 할 것들이 많았다. 몇 달 후, 은하는 여자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나와 학준이는 일반고에 진학했다. 도대체 내 성적으로 어떻게 일반고에 갈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뺑뺑이의 위력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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