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아
1학년 1학기를 거의 마치고 여름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학준이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가지런한 치아를 내보이며 웃고 있었다.
“은아.”
“뭐?”
“연락해?”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 자식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은아와 학교가 달라진 후로는 거의 연락을 하고 않고 있었다. 이렇든 저렇든 내가 은아와 연락을 하든 말든 이 자식은 왜 그런 걸 묻는 걸까?
학준이가 미소 지은 채 말했다.
“내가…….”
일부러 말을 끝내지 않고 궁금하게 만들려는 건가? 학준이는 내 눈을 마주 보며 말을 아끼고 있었다.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여자들을 후리는 눈동자.
“그 아이랑 좀…… 해보려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고 있지? 라는 표정으로 눈썹을 찡긋 올리며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난 은하를 한 번도 여자로 인식 해 본적이 없고, 꿈에서조차 좋아한 적 없다. 하지만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이 새끼의 면상을 어쩐지 두들겨 패 주고 싶다는 생각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 치고 올라왔다.
“내한테 와 얘기하는데?”
학준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글쎄. 우리 학교에, 이 손바닥만 한 학교에 강씨가 너랑 나 둘 뿐이라서?”
입 꼬리를 올려 웃더니, 그는 뒤 돌아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눈꺼풀을 깜박이는 것도 잊은 채, 눈에 힘을 주고 그의 뒷모습을 쫓았다. 왜 분노하는지, 왜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은하와 나는 맹세코 아무 사이도 아닌데.
하지만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와의 짧은 조우가 끝나자 머릿속에는 온통 은하와 학준이의 모습으로 가득 찼다. 다음 수업시간이 무슨 과목이었는지, 선생님이 언제 교실에 들어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학교가 끝날 때까지 둘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상했다. 내가 왜 이렇게 과민 반응하는지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서 피어난 상상은 항상 은하가 피해자였다. 허연 얼굴과 말끔한 헤어스타일로 하얀 건치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학준이는…… 가해자였다.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며 일방적인 관계가 떠올랐다.
그 날 수업이 끝날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수업이 마치지 못하고 학교를 나왔다. 씩씩대며 운동장을 걷고 있을 때 마지막 남은 이성이 나에게 말했다. 저 개자식의 말을 믿지 말라고. 은하에게 확인하라고. 나는 은하 머리방으로 달려갔다.
“은하야!”
미닫이문을 열며 억지로 헤어진 연인을 찾는 것처럼 은하의 이름을 불렀다.
가게 안에는 깜짝 놀란 은하의 어머니와 파마를 말고 있는 동네 아주머니뿐이었다.
“홍석아, 은하 아직 안 왔는데?”
“은하 언제 와요?”
머리방까지 뛰어오느라 숨이 찬 나는 헉헉대며 말했다.
“아직 멀었다. 니는 와 벌써 왔노? 핵교 끝났나?”
아뿔사.
“……할매가 아파가 일찍 왔어요.”
“할매가? 아까 여 지나가던데? 어데가 아프노?”
은하의 어머니가 파마 말던 손을 멈추고 나에게 급하게 말했다.
“할매가 아픈데 니는 와 여기 왔노?”
파마를 말던 아주머니가 말했다. 학준이였다면, 동네 양아치였다면 나는 얼마든지 둘러대거나 여의치 않으면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런데 아주머니 둘이 나에게 다그쳐 묻자 내 머릿속은 하얘지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 궁지에 몰린 나는 뒷걸음치다가,
“아닙니다.”
하고 문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었다.
아, 젠장.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불 보듯 뻔했다.
파마를 말던 아주머니의 표정. 크고 작은 사고를 칠 때마다 익히 보아왔던 표정.
“지금 몇 시고? 학교도 안 끝났는데 자는 와 저러고 다니노?”
“부모 없는 애들은 어디서든 티가 난다.”
“동네 아들하고 우르르 몰려다니매 사고 칠 때부터 알아봤다.”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고 입이 아프게 설명하고, 해명해도 그들의 눈에는 고작 변명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 알고 있다. 내도 알고 있다고! 그래가 더 이상 말 안하는기다.
집에 돌아온 나는 거칠게 방문을 열어젖히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화가 났다. 이 화가 첩처럼 내 귀에 대고 은하에 대해 속살대는 학준이 때문인지, 편견으로 나를 싸잡아 말하는 아줌마들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뚜렷한 대상 없이 무작정 화가 났다. 그 날은 결국 방 안에 틀어박혔고, 은하를 만나지 못 했다.
다음 날 학교에 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학준이가 나를 보고 실실 쪼개며 다가왔다. 나는 다리를 달달 떨며 학준이를 쏘아보았다.
“어땠어?”
“뭐가?”
“그 애……. 넌 이미 알 거 아니야?”
나는 대답 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학준이가 싱그러운 미소를 날리며 말했다.
“해 봤잖아. 그렇지?”
“니…… 내한테 와 이라노?”
학준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책상 끝을 잡고 바들바들 떨어야 했다. 학준이가 곁눈질로 내 손을 보더니 더 환하게 웃으며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서울에서…… 여자애 하나를 임신시켰지. 작년 이맘때.”
학준이가 나에게 몸을 떼더니 허리를 펴고 이어 말했다.
“벌써 1년이나 지났네. 그때 너 같은 애가 있었다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이 새끼가 미쳤나!”
잊으려고 했던 기억이 갑자기 물밀 듯 쏟아져 들어왔다. 갑자기 왜 옛날 생각이 났을까.
어찌됐든 은하와 통화를 끝내자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 미친 새끼는 지금 뭐하고 있을까?
그 자식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다. 여자아이들이 소리를 지른다. 정말…… 정말 별 것 아니었다. 내 예상에 맞았다. 이 새끼는 고작 비실이었다. 고작 주먹 한 대 맞고 이리 맥아리 없이 쓰러지나?
“부모님 연락처 뭐꼬?”
담임의 한 마디에 더 화가 나고 급기야 눈물이 나오려했다. 대답이 없자 담임이 다시 말했다.
“홍석아, 부모님한테 연락해라. 일 커지기 전에 연락해야 한다.”
침을 삼키기가 어렵다. 울화통이 터진다.
“없다! 없다고! 느그들 다 있는 부모가 내한테는 없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우리 부모님의 연락처를 애타게 찾고 있는 담임도 내가 부모 없이 할머니 손에 자랐다고 하면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을 할지 뻔했다.
“제가 연락하고 오겠습니다.”
뒤돌아 교무실을 나와 그 길로 학교를 빠져나왔다. 교실에도 들르지 않았다. 그리고 학교에 다시는 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어떤 처분이 내려왔는지 모른다. 나는 집에도 가지 않았다. 얼마 안 되는 친구 집을 전전하며 지내다가 나이를 속이고 일자리를 얻었다.
할매를 다시 본 건 1년 넘는 시간이 지난 후였다. 사실 다시는 집에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할매가 마음에 걸렸다. 나에게 피붙이란 할매뿐이었다.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주섬주섬 챙겨 성주 시골마을로 향했다.
그 사이 할매가 죽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할매가 보고 싶었다.
농한기 겨울.
할매는 집에 있었다. 겨울바람이 마치 방 안에서 불어오는 것 같았다.
“뭐하노? 불도 안 때고.”
바닥은 냉골이 되어 있었고, 놀란 눈으로 나를 보는 할매는 더 늙어 있었다. 울지 않을끼다.
태연하게, 자연스럽게 행동하기로 다짐했는데 할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물이 흘렀다.
“홍석이가?”
“그럼, 내지. 여 올 사람이 또 누가 있노?”
발음이 뭉개진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은하 머리방으로 향한다. 성주 할머니 집에 들렀다가 은하 머리방을 찍고 오는 건 이때부터 시작된 습관이다. 은하가 가게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 보인다. 손에는 장갑을 끼고, 목도리를 했다. 고개를 숙이고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온다. 숱 없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낀다. 본 적 없는 코트를 입고 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 있다. 인기척을 느낀 은하가 고개를 들고 나를 본다. 은하의 눈이 커진다.
“……야, 니…… 홍석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