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혹스러운 술자리
내가 오늘 미쳤나보다. 왜 자꾸 옛날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지 모르겠다.
맹세코 말하지만 난 한 번도 은하를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결단코.
흠, 어디까지 했더라. 두리번거리니 손에 들고 있는 책이 보인다.
아, 파우스트.
어차피 지나버렸는데 느긋하게 읽지 뭐. 라는 생각에 방바닥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는 날이 늘어나게 되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씁쓸한 미소가 떠오른다. 나는 이미 늦었는데.
1막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문장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2막이 3막이 되고, 3막이 4막이 되자 안개가 걷히듯 이해가 되고 점차 속도도 붙었다.
그리고 실장님의 말씀이 맞았다.
파우스트는 죽는 순간까지 노력했다. 버러지처럼 되는 대로 살아온 나로서는 타인을 위해 노력하고, 좌절하고, 행복해하는 파우스트의 삶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모르겠다.
마지막에 악마 메피스토에게 팔려갈 뻔 한 영혼을 천사들이 가로채가는 것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런 사람을 지옥에 보내서는 안 되지.
그렇게…… 책을 덮고 나니 할 일이 없다. 내 주변에는 등장인물의 이름과 특징을 빼곡히 적어놓은 메모지들이 널려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면서 책을 봤을까 싶은 생각에 다소 허탈한 웃음이 지어진다. 그래도 기분이 좋다. 무언가 끝냈다는 만족감이 나를 휘감았다.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냥 앉아만 있을 수가 없어서 작은 방 안을 둘러봤다.
왜 설레는지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서랍을 열자 실장님이 쥐어준 돈 30만원이 나왔다.
그리고 그 전에 벌어놓은 돈이 조금 남았을 뿐이다.
날씨는 덥고, 탈탈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가 힘겨워 보인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책을 끝까지 읽었으니 나에게 상을 줄까싶어 호재에게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연락을 한다.
사무실에서 호재를 마지막으로 만나고 열흘 만에 보는 것 같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막창 집에서 호재를 기다린다. 나는 분명 현실로 돌아왔는데 머릿속에는 아직도 파우스트가 남아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공감을 끌어내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났다.
파우스트에 대해, 괴테에 관해 말하고 싶다. 하지만 호재가 과연 알아들을까?
가게 문이 열리고 호재가 들어온다. 나를 알아보고 웃으며 내 앞자리에 앉는다.
“행님! 어쩐 일 인교?”
사무실에도 안 오고…… 라는 말을 하면서 호재는 귀에서 무선이어폰을 빼낸다. 내 눈이 그 물건을 따라간다. 은하가 보던 것과 색깔만 다르고 모양이 똑같이 생겼다.
막창에 소주를 곁들여 호재와 느긋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1시간 정도 노닥거리자 취기가 올라오고 기분도 좋아진다. 매케한 연기 속에서 호재도 연신 방긋거린다.
“행님, 이제 사무실 안 온다카대?”
“응. 짤렸다.”
웃으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인다. 노곤노곤해지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호재가 한 템포 쉬고 말을 이어간다.
“진짜로…… 공부하기로 했나?”
입가로 가져가던 소주잔을 잡은 채로 손이 멈췄다. 살짝 흐리멍덩해진 시선을 들어 호재를 새삼 바라본다.
“니 어데서 그런 말 들었노?”
여전히 벙긋벙긋 웃으며 호재가 대답한다.
“실장님이 그러대. 그래서 이제 행님 여 안 올 거라고.”
소주잔을 그대로 내려놓는다.옆구리 아래로 팔을 늘어뜨린다.
실장님은 나를 그렇게 봤나?
나한테 잡으라고 했던 것이 그것이었나?
나도 잘 모르겠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개가 도리질을 친다.
“그제? 아니제? 나만 두고 안 오는 거 아니제?”
호재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한다. 흠칫 놀란 눈으로 호재를 보니 어느새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내고 있다.
퐁퐁퐁.
눈물이 얼굴을 따라 흐른다.
“……니 취했나?”
“아이다!”
군인처럼 짧게 대답하고 거만한 표정을 짓더니 한순간 또 무너져 내린다. 눈썹이 여덟 팔(八)자로 변한다.
“참말로 내만 두고 안 오는 거 아니지예?
“니 소주 세 잔 마시면 취하나?”
당황스러버서리.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던 호재는 테이블 위를 손으로 더듬어 소주잔을 찾는다. 나는 얼른 손을 뻗어 잔을 치운다. 내 손을 본 호재는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본다.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고, 뺨에는 눈물 흐른 자국이 그대로 보인다.
“행님! 홍석 행님 아인교?”
마치 오늘 나를 처음 본 것 같은 얼굴.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이다.
“야! 니…… 술 몬 마신다고 말을 하지 그랬노.”
“아이다! 못 마시는 거 아이다! 지금 배우고 있는 기다!”
그러더니 배시시 웃는다. 검지로 나를 가리킨다.
“행님처럼.”
예상 못한 이 상황에 어처구니가 없어 할 말을 잃는다. 호재는 좌우로 몸을 흔들더니 겨우 내게 다시 시선을 맞춘다. 그리고 또 배시시 웃는다.
“음악공부 하는 기제?”
“음악?”
“그래, 음악! 안단테처럼 될라꼬 하는 거 아이가? 내 알아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