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인간은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바른 길을 알고 있다.
시간이 빨리도 흘러 할매를 보고 온지 거의 한 달이 다 됐다.
호재와 헤어진지도 3일이 지났다. 그날 호재는 술에 취해 덥고, 좁은 우리 집에서 자야했다. 잠들기 전까지 나를 위한다며 애국가를 불러줬지만 다행히 고맙게도 다음날 말짱한 정신상태로 돌아왔다.
나는 호재를 붙들고 무선이어폰에 대해 물었다. 호재는 선심 쓰듯이 자신이 산 무선이어폰 최저가 사이트를 나에게 알려주고 갔다.
“행님, 진짜로 공부하는 기가?”
“그게……, 그게 와 그리 궁금하노?”
“행님이 그 날 가고, 실장님이 싱글벙글 하대. 희한하제? 그래 웃는 거 처음 봤다. 그래서 물어 봤제. 실장님, 기분 좋은 일 있습니까?”
호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없다고 카대. 그리고 행님은 일 그만 뒀다 카대. 그래서 또 물어 봤제. 와예? 와 그만 뒀습니까?”
줄곧 나를 바라보고 있는 호재가 시선을 내렸다. 어디를 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눈길로 호재가 이어 말했다.
“가는 이제 안 올끼다. 실없이 웃으며 말하대. 근데 실장님은 와 이리 기분이 좋습니까?”
나는 눈을 깜박였다. 과연 실장님이 뭐라고 말했을지 궁금했다. 호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기다리다 결국 내가 물었다.
“뭐라…….”
“뭐라 했는지 지금은 기억이 잘 안 난다. 이상한 말만 했다. 착한 인간은 충돌해도 똑바로 간다 캤나, 빨리 간다 캤나?”
“뭐꼬? 그게…….”
“내도 모른다.”
호재가 배시시 웃더니 이어 말했다.
“근데 행님, 요즘 달라진 거 아나? 전에는 썩은 동태 눈깔이었는데 요즘은 아니다. 분명 똑같은 행님인데 다르다. 실장님이 그라대. 저 넘아 곧 정신 차릴끼라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그렇게 보였나?
“그리고 그건 공부밖에 없다고.”
<착한 인간은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바른 길을 알고 있다.>
호재가 실장님한테 들었지만 제대로 기억하지 못 한 그 말은 아마도 파우스트에 나오는 이 문장일 것이다.
내가 과연 착한가? 잘 모르겠다.
바른 길을 알고 있나?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은하가 누누이 말했던 공부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니 뭔가 혼란스럽다. 바닥을 치는 내 인생의 남은 시간을 변함없이 이렇게 소비해도 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고민을 하던 중 한 가지 확신이 선다. 괴테가, 파우스트가 내 안의 무엇인가를 잡고 흔들었다는 것.
주문을 하고, 이틀 뒤 어제 택배를 받았다. 역시 우리나라는 택배 강국이다. 근 10년 만에 동네 문방구에 가서 포장지를 사왔다. 삐뚤빼뚤하지만 드디어 포장을 마쳤다.
가만 생각해보니 은하는 나에게 바른 길을 알려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성주 고향집에 들를 생각이다.
오랜만에 할매도 보고, 은하에게 선물도 주고, 반납 기한을 놓쳐버린 책도 반납해야지.
가방에 주섬주섬 선물과 책을 챙기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호재다.
“여보세요.”
“행님!”
“응, 호재야.”
“점심 먹었나?”
“아……, 시간이 벌써 이래 됐나?”
“그럴 줄 알았다. 실업자 양반, 내 근처다. 같이 밥이나 먹자.”
나는 전화를 귀에 댄 채 멀끄러미 가방을 바라보았다. 약속 한 것도 아니고, 내일 가도 괜찮겠지?
호재는 집 근처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방을 메고 매장 안으로 들어선 나를 보고 씩 웃으며 손을 흔든다. 며칠 전에 봤지만 반갑다. 딱히 받은 것도 없는데 밉지 않은 녀석이다.
“햄버거 먹고 싶었나?”
“응, 행님 생각나서 왔다.”
햄버거가 담긴 트레이를 앞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호재야, 니…… 혹시…….”
“응? 뭔데?”
내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을까? 정리되지 않은 두서없는 말들이 허공을 떠 다녔다. 나는 시선을 내려 손에 들고 있는 햄버거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었을까?
내가 말이 없자 호재는 햄버거를 한 입 물고 우적우적 씹더니 감자튀김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말해라, 뭔데?”
나는 망설이다 입을 연다.
“니…… 고등핵교 나왔나?”
“응. 작년에 졸업했다.”
호재의 시원스러운 대답에 오히려 놀란 것은 나였다. 내가 너무 놀랐는지 호재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와?”
“니 핵교 나왔나?”
“응. 좋은 학교는 아니지만 졸업은 했다. 와?”
왜냐고 묻는 호재의 질문에 말이 막혔다. 나는 눈을 껌벅이다 호재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라믄 와 여기서 일하노?”
“돈 벌라고 하제. 당연한 거 아이가?”
뭐 이런 걸 다 묻느냐는 표정으로 이제 호재가 눈을 껌벅인다. 머리가 복잡했다.
학교를 졸업하든 안하든 하는 일이 똑같다면 공부를 왜 해야 하지?
공부를 시작하기도 전에 사기가 꺾이는 기분이다.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재는 크게 햄버거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아삭아삭. 양상추 씹히는 소리가 난다.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호재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내는 졸업 몬했다. 그래서……고향에 있는 친구가 공부해서 검정고시 보라꼬…….”
“친구? 여자가?”
“응……. 응?”
“이쁘나?”
“응?”
얼떨떨한 기분으로 되물었다. 호재는 입 안 가득 햄버거를 넣고 웃고 있었다.
“아니다, 그런 거.”
“알았다.”
아삭아삭. 뒤이어 호로록 하며 콜라를 마시던 호재가 컵을 내려놓더니 말했다.
“한다던 게 음악 공부가 아이고, 그 공부였나?”
“아직 잘 모르겠다. 한다고 해도 막막하다.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행님.”
“어?”
“내는 지금 어떻게 할 건지를 묻는 게 아이다. 행님이 진짜 할 건지를 묻는 기다.”
침을 삼켰다. 호재는 어느새 햄버거를 내려놓고 진지하게 나에게 묻고 있었다.
“……잘 모르겠다.”
“행님 인생인데 모르면 우짜노?”
호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행님, 우리 아버지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이 하나 있다. 내 인생이지만서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마치 명언을 이야기하듯 말하는 호재의 말투에 피식 웃음이 난다.
“뭐꼬? 그게?”
“내가 여서 일하는 건 돈 벌라꼬 하는 기다. 얼마 전에 독립했다.”
“아……, 그랬나?”
“학교를 졸업해도 인생이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다들 학교는 졸업하지 않나. 그제?”
나는 대꾸 없이 호재를 바라보았다.
“행님은 출발선이 다른 기다. 공부를 해야, 그래야 겨우 출발선이 맞춰지는 기다.”
호재가 훅- 하고 콧바람을 내쉬더니 이어 말했다.
“와 망설이노? 공부한다고 해서 행님이 변호사 되고, 의사 될 거 같나? 아니다. 그건 택도 없다.”
“와……. 와 나는 안 되노…….”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호재에게 반론하지만 내가 들어도 개미 기어가는 소리보다 작다. 호재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더니 말했다.
“행님, 내는 행님보다 어리지만 그래도 꼰대 같은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우리 아버지는 한량이었지만 말은 또 억수로 많았다. 철학자가 따로 없었제. 그래도 가끔은…… 뭐 맞는 말도 했다.”
어깨를 으쓱하며 호재가 다시 말했다.
“망설 일거면…… 일단 해라. 시작을 하면…… 어떻게든 된다.”
호재는 다시 햄버거를 들어 한 입 먹었다. 나도 얼떨결에 호재를 따라 햄버거를 베어 물었지만 무슨 맛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입 안에 고무찰흙이 굴러다니는 느낌이다.
“행님.”
“어?”
“어떻게 할지는 그 다음이다. 알았제?”
“……그래. 알았다.”
“공부하다가 어려우면 내한테 연락해라.”
……어라?
“니 공부 잘 했나?”
“미쳤나?”
“그럼 와?”
호재가 웃으며 말했다.
“누나가 공부 잘 했다.”
후두둑.
손에 들고 있던 감자튀김이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뭐라고?
“누우나? 니 지금 누나라고 했나?”
“그래, 누나.”
“누나가 있었나?”
“응, 와 놀라는데?”
눈, 코, 입이 모두 벌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호재가 턱짓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더니,
“요…… 요 근처 대학교 댕긴다.”
“어?”
키득키득 웃는다.
“야! 니…… 니 진짜 이 일 와 하노?”
“돈 벌라고! 몇 번을 말 하나.”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말하는 호재. 티를 내지 않으려 하지만 아무래도 이 자식은 누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다.
“집이 어려워서가 누나는 고등학교 졸업 몬 했다. 행님처럼 고민하다…… 검정고시 봤다.”
아…….
나는 호재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호재는 가끔 전화도 걸어주고, 사무실에서 마주칠 때 마다 반가워 해줬는데…….
나는 호재에게 참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 한 내게 공부를 하는데 있어 왜 망설이지는 물었던 호재에게 이런 누나가 있었다니. 다정한 성격의 호재는 누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나를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 했을지도 모른다.
우연이 쌓이긴 했지만 근래 들어 자주 만나게 된 것도 호재가 꾸민 일이 아닐까?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재는 계속 말했다.
“올해 입학 했다. 내가 졸업하기 전까지 누나가 고생했제. 그래도 가시나가 독하게 공부하대. 이제는…… 내가 도와줄끼다.”
호재가 다시 보인다. 아무 생각 없어 보이고, 항상 실없이 벙긋벙긋 웃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기특해 보일 수가 없다.
“누나는…… 누나는 대학에서 무슨 공부 하는데?”
“성악.”
“……이쁘나?”
“뒤질래?”
호재의 누나를 본 적은 없지만 남동생과 참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성악이라니.
패스트푸드점에서 나와 호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떻게 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생각에 잠겨 있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