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언증에 속았다.
뒤척 뒤척.
밤에도 잠이 잘 오지 않는다.
호재가 내뱉은 말들이 주변을 맴돈다. 사무실을 나오고 난 뒤 연신 웃고 있었다던 실장님의 얼굴도 떠오른다. 홱 토라져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린 은아 생각도 난다.
<착한 인간은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바른 길을 알고 있다.>
실장님이 나에게 했던 말.
착한 인간은 내가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착한 인간이고, 그들이 바른 길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만들어 놓고, 다져 놓은 길을 따라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인도하는 것은 아닐까?
우매한 내가 그들의 도움으로 바른 길을 가려고 망설이는 것은 아닐까?
물론 멍청한 내가 공부를 한다한들 원하는 결과를 얻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이 생각이 지금까지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어차피 밑바닥 인생, 해서 뭐하나.
하지만 오늘 호재가 뭐라 했던가.
“망설 일거면…… 일단 해라. 시작을 하면…… 어떻게든 된다.”
나는 안 될 이유를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다시 하루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꼭 도서관에 들러 사서님도 뵙고, 은하도 보고 와야지. 겸사겸사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아침부터 하늘이 어둑어둑하다. 비가 내릴 것 같다. 가방에 무선 이어폰과 책을 넣고, 고향으로 향한다.
덜컹덜컹.
버스가 흔들린다.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굽이진 산길을 따라 버스가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생각보다 꿉꿉하다. 비가 쏟아지기 전이라 그런지 습도가 높다.
“은하야.”
“응?”
“니…… 학준이 만나나?”
“응?”
은하는 의외라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학준이? 강학준 말하는 기가?”
“응. 니 중학교 때 걔 좋아하지 않았나?”
은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아니다.”
“아니라꼬?”
“그래, 좋아한 거 아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난 은하를 여자로 본 적이 없다. 은하가 남자친구를 사귄다고 해도 괜찮다고 항상 생각했다. 다만 그 남자가 제대로 된 남자라면 말이다. 하지만 학준이는 아니었다.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학준이는 분명 나에게 은하와 만날 것처럼 말하지 않았나? 추잡한 농을 던지며 희롱하듯 말했다.
“학준이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고?”
은하는 눈을 굴리며 기억을 더듬다가 대답했다.
“암만 생각해도 졸업식 이후로 만난 적이 없다.”
우리는 은하 머리방 처마 밑에 있다. 방금 나는 머리를 자르고 나왔다. 당구장 아르바이트에 늦지 않으려면 10분 뒤에는 출발해야 했다.
은하는 고3이 되었다. 그때 학교를 뛰쳐나오지 않았다면 나도 고3이 됐을까? 은하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니랑 학준이랑 싸우고…….”
“야, 싸웠다고 하지마라. 그냥 줘 터진 기다. 그 넘아, 한 대 맞고 나자빠졌다.”
“알았다. 근데 그때 와 싸웠노?”
“야, 싸운 거 아니라고 안하나?”
“알았다. 알았다고.”
내가 화를 내는지 은하가 살펴보더니 다시 말했다.
“그때…… 학준이 와 때렸노?”
움찔했다. 은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나?
“니한테 말 안 하드나?”
“누가? 누가 내한테 말해주노? 아는 사람 아무도 없다.”
“은하야, 학준이가 서울에서 이런 깡촌으로 와 이사 왔는지 아나?”
은하가 고개를 끄덕인다. 안다꼬?
“안다꼬? 와 왔는지 진짜 안다꼬?”
“응. 어렴풋이 들었다.”
새삼스레 은하를 쳐다본다. 그 넘아가 너한테도 똑같은 짓을 하려고 했다. 그래서 때렸다. 이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말하고 싶어서 입술이 달싹였다.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는 나를 보더니 은하가 말했다.
“허언증 있어가 왕따 당했다고 안했나?”
“……뭐?”
“그래 들었다. 중 3때는 일진이랑 싸워서 퇴학당할 뻔 한 걸 전학으로 막았카더니, 고 1때는 여자애 임신시켰다고 하대. 고 2때는 무면허로 운전하다가 사람 치였다고 지가 소문내고 다녔다.”
이게 무슨 소리고?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미친 새끼. 도랐나?”
“응. 대가리 돌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사람 치였으면 그게 전학으로 끝날 일이가? 진짜 임신이믄 전학 간다고 끝날 일이가?”
“니는 어데서 그런 말 들었노?”
“여 사람 다 알고 있다. 집에 돈이 조금 있어가 일 터지면 전학 보내는 거 같더라. 니는 전혀 몰랐나?”
“지금 처음 들었다.”
“하긴…… 니 그때 없었제. 그래도…… 연락하는 애 없었나?”
“없다. 여가 지긋지긋해가 연락도 다 끊었다. 지금도 니 말고는…… 얼굴 볼 사람 없다.”
은하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다가 내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말했다.
“학준이 지금 어디 있는지는 아나?”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학준이 지금은 미국 갔다.”
“미국?”
“응. 작년 여름방학 때 가버렸다.”
“아…….”
그렇다면 그 자식은 왜 나한테 은하를 미끼로 도발을 했을까?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은하를 여자로…… 생각한 적이 결단코 없는데.
하지만 지금의 처지를 봐라. 그 정신 나간 놈은 나를 도발하고도 미국으로 건너가 잘 먹고 잘 사는데 나는 이게 뭔가 싶었다.
착잡했다.
“내 이제 간다.”
“홍석아.”
“응?”
은하가 눈을 깜박였다.
“검정고시 봐라.”
“뭐라노?”
“언제까지 이럴낀데? 공부해 검정고시 봐라.”
은하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가스나야. 니가 언제부터 내 걱정했노?”
피식 웃으며 말하자 은하의 얼굴이 벌게졌다.
“니 없어지고 나서 계속 걱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