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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에도 괴테를 만난다.

그래서 나는 오늘 밤에도 괴테를 만나러 간다.

by 포뢰

은하 머리방이 있는 읍내에 도착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비가 올 것 같다고 생각했으면서 왜 우산은 안 챙겼을까? 답은 의외로 바로 나왔다. 집에 우산이 없지.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우산은 귀하다. 돈 들여 사놓고 비가 그치면 어딘가에 놓고 오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며 은하 머리방까지 달음질을 친다.


빨리 비를 피하자는 생각에 미닫이 가게 문을 박력 있게 밀어 젖힌다.

머리방 안에 있던 할머니 두 분과 은하 어머니, 은하가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 젠장맞을.

당황한 표정으로 멋쩍게 인사를 하고 열어 젖혔을 때와는 달리 공손히 두 손으로 문을 닫고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비에 옷과 운동화가 젖었다.

은하는 카운터 뒤에 앉아 있다가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며 말한다.


“우짠 일이고? 앉아라.”


나만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가게에는 은하만 있을 줄 알았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 미처 생각 못했다.

할매들은 날 궂은 날에는 파마가 안 되는 것도 모르나. 비가 와서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낡은 소파 끝에 다소곳이 앉는다. 문을 열어젖히던 박력은 사라진지 오래다.

손짓으로 은하에게 옆자리에 앉으라고 신호를 보낸다. 은하가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방을 열고 선물을 확인한다. 다행히 비닐포장지라 젖지 않았다.

주섬주섬 선물을 은하에게 내민다.

반짝거리는 포장지가 시선을 끌었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내 얼굴이 시선을 끌었는지 할매들과 아주머니가 모두 이 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거 뭔데?”


정작 은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나만 얼굴이 화끈거린다. 반응이 어떨지 궁금해 곁눈질로 은하의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본다. 부스럭부스럭 포장을 뜯는다.


“야! 이거 뭐꼬?”


웃음기 가득 실린 목소리로 은하가 말한다. 다행히 마음에 들었나보다. 나도 기분이 좋다.


“뭔데?”

“은하야, 뭐꼬?”


머리에 파마를 말고 있던 할매들이 우리가 앉은 소파를 향해 슬금슬금 다가온다.

아이고, 할매요…….

종이로 된 박스를 열자 무선 이어폰 한 쌍이 플라스틱 위에 조용히 누워있다. 은하는 내가 선물한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아본다. 얼굴에는 연신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야…….”


말도 잇지 못한다. 그때, 한 할매가 말한다. 머리를 반쯤 말고 있던 할매다.


“은하, 니 보청기 끼나?”

“잉? 아이다, 아이다. 이기 무선 이어폰이다.”


웃고 있던 얼굴 그대로 나에게 몸을 돌려 말한다.


“내 이기 갖고 싶었던 거 우째 알았노?”


막 대답을 하려는데 머리에 보자기를 쓰고 있는 할매가 다른 할매에게 말을 건다.


“이기 비싸나? 한…… 5천원 하나?”


그러자 파마를 반 쯤 말고 있던 할매가 혀를 쯧쯧 찬다.


“무신 이게 5천원이고? 만원 넘제.”


하…… 이 할매들 집에 안가나. 파마 하나도 안 나와 삐라!


“니 잠깐 이리 온나.”


은하가 벌떡 일어나 내 손목을 잡고 할매들 사이를 헤집고 가게 밖으로 나간다. 등 뒤로 할매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힉. 그럼 2만원 하나?”

“맞제. 맞제.”

“아이고. 비싸네.”


드르륵 문이 닫힌다.



가게 밖 처마 밑.

비는 계속 내리고 있고, 처마 밑은 마주 볼 수도 없을 만큼 좁다. 등을 벽에 기대고 쏟아지는 비를 바라본다. 은하는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보고 있다. 빨리 대답해 달라고 조르는 눈빛이다. 짐짓 못 본 체 하다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고맙데이. 은하야.”

“뭐가?”


은하 쪽으로 몸을 돌리니 왼쪽 어깨가 빗물에 젖는다.

실장님이 나에게 해 준 이야기. 내 앞에 있는 것을 잡으라는 말을 호재가 상기시켜 줬다.

그리고 그 말은 은하가 항상 해 주던 말이다.

괴테를 만나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입이 귀에 걸리도록 한껏 웃어준다.

내 눈이 반짝거리는 게 나도 느껴질 정도다.


“내, 검정고시 준비할라꼬.”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 젖어드는 왼쪽 어깨, 토끼 눈을 뜨고 내 앞에 서 있는 은하. 모두 핑크 빛이다. 괴테가 나에게 이런 선물을 줄 줄이야.


그래서 나는 오늘밤에도 괴테를 만나러 간다.





ep.


“은하야, 내 검정고시 통과하믄…….”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어쩐지 말하기 부끄럽다.

홍석은 오늘 머리를 자르고 은하와 처마 밑에 서 있다.


“통과하믄 뭐?”


은하가 홍석을 재촉했다.


“통과하믄…… 니…… 내랑 사귈래?”


얼굴이 빨개진 홍석을 은하가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니라꼬?”

“응. 됐다.”

“와? 니 내 좋아한 거 아니었나?”

“응? 누가 그라노? 내는 니 남자로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어딘지 익숙한 말투.


“내 없어졌을 때 걱정했다하지 않았나?”

“응. 걱정했지. 그치만…… 남자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맹세코 없다.”


강조하며 말하는 은하. 기분이 이상하다. 왜 이렇게 낯익지?


“누누이 말하지만 없다. 결단코.”


강하게 부정하는 은하. 어쩐지 웃음이 난다.


“와? 니 미쳤나? 싫다는데 와 웃노?”


은하의 어깨를 툭툭 친다. 내도 그랬다, 은하야.


“내 공부하러 간다.”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은하에게 손을 흔든다. 니도 언젠가 알게 될끼다. 우리가 똑같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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