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지낸 30일, 그리고 눈물바다
“학교 가자.”
각 방의 방장들은 서둘러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30일 동안 오전에는 필리핀 사립학교에서 어학연수를, 오후에는 봉사활동을 하게 된다.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한 학생들이 영혼 없이 인사한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학생들이 등교한 후 나는 각 방을 돌며 청소 상태와 빨래 등 생활 전반을 점검한다. 마치 꼰대 기숙사 사감 선생님처럼. 그 뒤에는 현지 관계자들과 봉사활동 프로그램 관련 미팅이 이어진다.
클락, 앙헬레스에서 차로 한 시간가량 산길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아이따 부족 아이들이 있다. 그들은 작은 키, 곱슬머리, 검은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마치 아프리카 부시맨의 가족이라 해도 믿을만했다.
교실에 들어서자 아이들의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한국에서 봉사자가 온다는 소식에 산을 넘어 등교했다. 학생들 대부분이 1시간 이상 걸어야 했다. 우리 학생들은 오전에는 부유한 사립학교의 아이들을 만났고, 오후에는 시원한 에어컨 버스를 타고 산을 올랐다. 한국 학생들과는 많이 대조적인 모습으로 첫 만남을 가졌다.
학생들은 아이따 부족 아이들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오늘 재미있었어?”
“아프리카 아이들인 줄 알았어요.”
“아프리카에 가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어?”
“TV에서 봤죠, 얼굴이 까맣잖아요.”
“얼굴이 까맣다고, 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아니지.”
반문해 보지만, 피식 웃어버린다.
“선생님, 오전 학교에 오는 아이들하고 왜 달라요?”
한 아이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했다. 학생들은 오전과 오후의 온도 차를 느끼고 있었다. 관계자분께 아이따 부족에 대해 설명할 시간을 부탁했다.
아이따 부족은 오래전에 필리핀에 정확한 토착민이었다.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 지배와 필리핀의 급격한 문명화를 피해 피나투보산으로 이주를 했다. 1991년 피나투보 화산 대폭발의 최대 피해자가 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로 인해 고산지대에 살던 아이따 부족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그들은 도시로 내려왔지만, 필리핀 인구에 포함되지 못한 채, 사회의 무시와 경멸 속에 내몰렸다. 결국 그들은 다시 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그 속에서 자신들만의 마을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다. 관계자의 생동감 넘치는 설명에 학생들의 표정에서 이해하려는 기색이 보였다.
오전 수업이 한창일 때, 통역을 맡고 있던 선생님이 다급하게 나를 찾아왔다. 학생 중 한명이 수업 태도가 너무 좋지 않다며, 앞으로 수업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국에서도 장난이 심하던 녀석인데, 여기에서도.’ 쉬는 시간이 되길 기다린 후, 조용히 학생을 불렀다. 순간 화가 났지만 태연한 척 이야기 했다.
“너, 한국 가야 겠다.”
“학교에서 수업 태도가 좋지 않아서 오지 말래.”
한국에서 캠프를 신청할 때, 캠프 중 문제 행동이 생길시 바로 출국 조치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학생과 숙소로 돌아와 학생에게 캐리어에 짐을 넣으라고 했다. 단호함이 필요했다.
학생은 주섬주섬 짐을 챙기면서도 슬쩍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교실에서, 대체 어떻게 하면 선생님 눈 밖에 날 수 있는 건지.’
“선생님, 죄송해요.”
이제야 상황이 파악된 걸까.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타국까지 와서, 그것도 교실에서 쫓겨나는 상황이라니. 그런 아이를 보며 안쓰럽기보단 짜증이 먼저 치밀었다.
“뭐가 죄송한데?”
괜히 마음이 흔들릴까 봐, 쳐다 보지 않고 말했다.
‘30일중 이제 시작인데, 안전히 잘 마칠수 있을까.’
캠프를 진행하며 반복해 온 걱정들 – 누군가 다치진 않을까, 탈락자는 없을까, 학생들과 끝까지 안전하게 마칠 수 있을까- 그 고민들이 또 다시 시작 되었다.
오전 수업을 마친 학생이 화가 난 듯 다가왔다.
“선생님, 저 필리핀 사람처럼 생겼어요?”
“왜”
“어떤 애가 저보고 엄마 아빠 중 한 분이 필리핀 사람이냐고 물어봤어요.”
열변을 토하는 학생을 바라보며,
“그 영어를 다 알아들었어?”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일들이 하나둘씩 늘어가고 있었다. 그 웃음 속에는, 때로는 피로도, 때로는 체념도, 그리고 가르친다는 일의 복잡함도 함께 섞여 있었다.
“선생님, 저 화장실 가야 하는데요.”
“가면 되지.”
대답은 했지만, 내심 걱정이 앞섰다.
숙소에는 한국과 같은 양변기가 있었지만, 봉사활동을 하는 대부분의 학교 화장실은 달랐다. 아이따 아이에게 부탁해 함께 다녀오도록 했다. 불편함을 호소할 줄 알았던 학생은 급한 일을 해결하고 나니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살라맛 뽀.”
화장실을 다녀온 예준이가 말했다.
“무슨 말이야?”
“선생님 몰라요? 필리핀 말로 고맙다는 뜻이죠.”
알고도 모른 척 웃어넘겼다. 학생들이 필리핀 따갈로그어를 사용할 때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양육강식이 존재하듯, 학생들 사이에서도 각 방마다 다양한 일들이 벌어졌다. 샴푸 향이 좋다며 어린 동생의 것만 사용하는 언니, 간식 담당을 도맡은 막내들, 4명에서 5명으로 구성된 방 안에서 여학생들은 예쁜 친구를 중심으로 무리 지었고, 남학생들 사이에서도 누가 더 싸움을 잘하는지가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작은 사회 속에서 서열이 생기고, 역할이 나뉘고, 때론 갈등이 생겼다. 캠프라는 이름 아래 모인 아이들은, 그렇게 자기들만의 룰과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갈등이 심해질 때면 나도 모르게,
“선생님은 다신 캠프 안 한다. 너희처럼 이기적이고 말 안 듣는 애들하고 무슨 캠프를 해.”
지치고, 속상하고, 도망가고 싶을 만큼 힘든 순간들이 있었다. 그 말이 정말 진심이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30일이 결코 긴 시간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은 오전보다 오후의 봉사활동을 더 좋아했다. 공부보다는 놀이가 좋았으니까. 학생들은 봉사활동을 하나의 재미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더 많은 걸 느끼고 깨달아 갔다.
아이따 부족 아이들과 한국 학생들의 '큐브 돌리기'가 미션이었다. 선풍기 하나 없는 더운 교실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은 그 자체로 흐뭇했다. 서로의 언어는 달라도 아이들의 눈높이 언어는 어른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놀이처럼 시작된 봉사활동 속에서 아이들은 더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았다. 처음엔 단지 피부색이 다른 친구들과의 만남에 큰 의미를 부여했지만, 어느새 그들과 같은 아이따 아이들이 되어 가는 듯했다.
헤어지는 마지막 날 오전과 오후의 모습도 달랐다. 공부만 했던 오전 아이들과 쿨 하게 헤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아이따 아이들과의 헤어짐은 눈물바다였다. 무엇이 그렇게 슬펐을까.
봉사활동으로 돕는다는 것이 단순히 ‘주는 일’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일’이라는 걸, 오전의 교실에선 배우기 어려운 삶의 본질을 아이들은 오후에 배운 듯했다. 그 깨달음은 교과서 어디에도 없었지만, 아이들의 마음 어딘가에 깊이 새겨졌을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