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명 '마음씀'에 대한 탐색 기록
마음씀, 나의 작가명이다.
마음씀(sorge, 조르게)
현존재의 존재론적 구조 전체의 형식적 실존론적 전체성이 <현존재의 존재>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해명하려고 노력해온 <현존재의 존재>에 우리는 마침내 도달했다. 또한 우리는 <현존재의 존재>를 <마음씀(Sorge)>이라고 이름 짓는다. 이 이름은 순전히 존재론적-실존론적 명칭이다. 이 이름을 걱정이나 혹은 걱정 없음 따위를 의미하는 존재자적 의미에서 사용해선 안 될 것이다. 마음씀은 그야말로 세계-내-존재를 전체로서 특징짓는 존재론적-실존론적 명칭이다. 우리가 세계의 분석에서 말했던 배려(Besorge)나 혹은 고려(Fürsorge)는 마음씀의 구체적 일상적 양상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음씀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해제), 2004., 이선일)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하이데거란 이름은 들어 보았으나 역시 잘 모르는 사람이다. 만난 적도 없다. 찾아보니,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독일의 실존철학자이고, 대표 저서는 《존재와 시간》이란다. 1889년에 나서 1976년에 세상을 떠났단다. 산 사람도 다 모르는데 어찌 타국의 죽은 사람을 알까.
브런치 작가명을 바꾸려고 한 달을 기다리며 적합한 단어에 대하여 탐색했다. 4월 10일 브런치 가입하고, 4월 13일 글 발행 권한을 부여받았다. 작가명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았다. 평소 쓰는 '4진생각'이란 닉네임을 작가명으로 하면 되겠다 생각했으니까. 그런-데-말입니다. 작가명에 숫자를 사용할 수 없다는 알람이 떴다. 당황스럽다. 미처 예측하지 못한 돌발상황이었다. 결국 그냥 이름 석자를 처넣고 설정을 마무리했다. 미리 써 놓은 글들을 발행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말입니다. 작가명 변경은 30일을 기다려야 한다고 빨간 알림이 떴다. 아... 이런. 물론 본명이 작가명인 분들도 많았다. 그래도 이번 기회에 나도 번듯한 작가명을 갖고 싶었다. 결국 한 달을 기다렸다. 5월 11일 자정을 기다려 작가명을 바꿨다. "가나림" - 떡갈나무숲이다. '가나무'는 떡갈나무의 방언이다. '가나무'를 고민했으나 나무 한 그루는 외롭고 밋밋한 것 같았다. 끝에 '수풀 림(林)'을 붙이고 '무'자를 뺐다. 굳이 세 글자를 고집했다. ganamoo-forest. 가나무숲, 떡갈나무숲. 임의로 만들어 낸 고유명사라 어느 포털 검색에도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유일무이한 단어였다. 가나다 순으로 정렬할 때 가장 앞에 나올 수 있도록 나름 설계를 했다. 좋아 보였다.
그런-데-말입니다. 가나림 작가명으로 글을 발행할 때마다 무언가 이질감을 느꼈다. 내 글과 떡갈나무는 아무 연관성이 없었다. 나무에 대한 글이 없지 않지만, 내 글이 나무를 담고 있는 건 아니었다. 한번 이런 생각을 하자 시간이 지날수록 작가명을 너무 졸속으로 정했다는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 글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글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어떤 걸 담고 싶은지, 또 글로써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내 글들 모두를 관통하고 있는 말은 '마음'이었다. 세상 살면서 이리 치고 저리 치며 힘겹게 연명하고 있는 마음들이 글 속에 들어 있었다. 때로는 내가 찍은 사진 속에, 딸아이 그림 속에 그것들이 투영되어 있었다. 아픈 마음이 글 속에서 치유되어, 건강한 마음으로 읽히는 기적을 나는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또 한 달이 지나갔다. '마음'으로 마음을 정하고 세 글자를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음을 쓰는 것이고, 마음으로 쓰는 거니까. 마음씀. 명료하다. 6월 11일 자정이 되자,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마음씀'으로 작가명을 변경했다. 그리고 자기 이름에 대하여 그럴듯한 설명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탐색해보았다. 그런-데-말입니다. 이거 장난이 아니다. '마음씀'이란 단어 하나에 응축된 개념이 내가 짐작했던 사고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저렇듯 무슨 소린지 이해조차 어려운 개념들의 나열을 보고, 나는 멘붕에 빠졌다. 이게 아닌데...
탐색을 계속했다.
심려 [Sorge, care, 心慮 ]
심려(Sorge, 염려, 마음씀)는 하이데거가 현존재의 존재 전체를 규정하는 말이다. 그는 현존재의 존재론적 구조 전체의 형식적 실존론적 전체성이 ‘자기를 앞지름'[실존성], ‘어떤 세계 안에 이미 있음'[현사실성], '퇴락'하면서 몰입해 있음'[퇴락적 존재]이라는 세 계기가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구성된다고 본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현존재의 존재>를 특히 <심려(Sorge)>라고 이름 짓는다. 그러니까 심려란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는 존재자)에 몰입해 있음으로써 세계 안에 이미 있으면서 자기를 앞지름”을 의미한다. 이 이름은 순전히 존재론적-실존론적 명칭이다. 따라서 이 이름을 걱정이나 혹은 걱정 없음 따위를 의미하는 존재자적 의미에서 사용해선 안 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심려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마음씀'은 독일어로 조르게(sorge), 한자로는 심려(心慮)라 하는 모양이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라고 할 때 그 심려(心慮)였다. 걱정을 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마음을 쓰게 했군요, 라고 하는 것처럼 '쓰다'는 적는다는 뜻이 아니었다. '사용하다'는 의미였다. 안 써도 되는 아까운 마음을 소비하게 만들었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었다.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철학자의 말이 아닌 일반인의 해석을 찾아보았다.
마음씀
하이데거의 개념 중에 '조르게(Sorge)'라는 게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근심'이나 '걱정', 영어로는 'anxiety'나 'concern'으로 번역되는데, 하이데거는 좀 다른 의미로 씁니다. 짧은 소견으로는 죽음을 염려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정도로 이해합니다. 살아있는 것은 제가 무화(無化)되는 것을 피하고자 뭔가를 한다는 것이지요. '조르게'와 같은 말은 고사하고 비슷한 말이라도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데, 철학자들은 '마음씀'이라고 번역합니다. 참 멋진 번역어입니다. 순 우리말이고, 우리가 평소에 쓰는 살아있는 말입니다. 그냥 들어도 대강의 뜻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김태균 판사, 법률신문 오피니언 2021-01-25 일자
수원지법 김태균 판사가 법률신문 오피니언에 쓴 기사를 찾았다. 죽음을 염려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하는 노력이다. 살아 있는 존재는 자기가 무화(無化), 즉 부재(존재하지 않음)로 되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한다. 끊임없이 존재하려는 노력, 이것이 마음씀이다. 무언가 모르지만 마음씀의 실체에 조금 접근한 것 같았다. 존재하는 것으로 살아 있기 위해서는 존재하는 것들을 위해 끊임없이 마음을 쓰고 걱정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마음씀을 가졌다는 말임을. 갑자기 마음이 숙연해진다.
타자들과 내가 합일이 되는 그 경지를 톨스토이는 체험했다는 것. 한 사람의 과거를 나의 미래로 통합하는 것, 타인의 실존적인 감정에 내 감정을 이입하여서 그 사람이 내 무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염려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하이데거는 이를 Sorge(조르게)라고 말한다. 심려(Sorge, 염려, 마음씀)는 하이데거가 현존재의 존재 전체를 규정하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타인에 대해서 관심과 배려의 마음을 품는 것을 Sorge라고 한다. 이 세계의 모든 갈등은 타인의 감정의 허름함에 대해서 내가 공감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발생한다. 이 감정의 허름함에 이입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일체감을 느낄 수 있고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나'라는 존재는 불안전하고, 불안한 존재이지만, 타인과 결합되어 합일될 때는 비로소 완전해진다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와 관계없는 톨스토이의 독특하고 고유한 사상이다.
[출처] 톨스토이_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의 자아확장, 구심력과 원심력| 작성자 parkingcat
하이데거는 시간을 항상 ‘무엇을 위한’ 시간으로 이해했다. 우리는 60초 1분, 60분 1시간으로 살지 않는다. 항상 어떤 것에 마음을 쓰며 산다. 인간은 세상 속에 있는 것들과 관계 맺은 채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세상에 있는 것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마음씀(Sorge)’이라고 표현했다. Sorge(독일어; 조르게): 근심, 걱정, 불안 돌보아줌, 애씀, 보호, 해야 할 일. 시간은 나 그리고 나의 삶 그 자체이다. 시간은 인간 존재 그 자체다.
[출처] 철학하는 50대는 미래가 두렵지 않다. 제16장, 17장, 18장| 작성자 최플린
조금 더 이해가 용이한 글을 찾았다. 타인이나 나 이외의 존재가 무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염려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타인에 대해서 관심과 배려의 마음을 품는 것을 Sorge, 즉 마음씀이라 한다. 갈등은 상대방 감정의 허름함에 대해서 내가 공감하지 못할 때 생기는 것이란 말에 공감한다. 인간이 세상 속에 있는 것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마음씀'이라 표현한다. 이제 무슨 소리인지 알 것 같다. 철학자들은 쉬운 말을 어렵게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쉽게 이해하는 개념도 그들에게는 결코 쉬운 개념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머리 아프고 심오한 뜻과 타협하여 쉬운 개념만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나는 여기에서 탐색을 종료했다.
작가명 '마음씀'에 대한 탐색의 결과는 이렇다.
ㅇ '마음씀'은 현존재의 존재.
ㅇ 독일어로 조르게(sorge), 한자로는 심려(心慮).
ㅇ 살아 있는 존재로서 자기가 부재(존재하지 않음)로 되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
ㅇ 나 이외의 존재를 무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염려의 대상으로 생각하여 관심과 배려의 마음을 품는 것.
ㅇ 인간이 세상 속에 있는 것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방법.
Epilogue
마음쓰며 살기
마음씀, 나도 그렇게 마음을 쓰며 살기로 했다.
무엇을 - 존재하는 마음들을.
어떻게 - 관심과 배려의 글로.
어느때 - 내가 존재하는 순간마다.
어디서 - 이 세상 속에서.
이유는 - 살아있고 싶어서.
마음에, 마음을, 마음놓고 쓰다.
마음속, 마음을, 마음으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