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이 들어 있는 말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보며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한 적이 있었다. 머지않아 그분이 한 사람에게 여러 개의 빵을 준 이유는 나눔, 곧 사랑하라는 그분의 메시지임을 깨달았다. 그분이 불공평해서가 아니라 나눠야 할 자들이 나누지 않음으로 해서 세상은 불공평해졌다. (twitter에서)
-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불공평한 세상은 공평한 것인지 몰라.
촛불의 사명이 자기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는 거라면, 자기 몸에 불을 지른 나무의 사명은 무엇인가. 더없이 맑고 투명하다는 이 나라의 대낮 백주에, 잎들은 왜 붉게 타고 있는가. 나는 왜 저들처럼 어둠을 인식하는 본능을 지니지 못했는가. 소외와 불평등의 얼굴은 낮에도 어둡다.
온도의 불평등
우리가 지금 평등한 온도 속에 산다고 할 수 있을까. 더운 김밥 같은 지하철을 빠져나오는 남자의 몸에 밥알 같은 땀이 여기저기 붙어 있다. 남자는 모서리가 떨어져 나간 계단에 그 밥알을 흩뿌리며 5층 꼭대기 숙소에 오른다. 폭염으로 잘 달궈진 불가마식 단칸방에 몸을 누이며 마침내 퇴근을 완료한다. 꿈꾸지 못하는 에어컨 때문에 밖이 소란스럽다. 전기료가 무서워 경로당의 에어컨이 식은땀을 흘린다고 한다. 어르신들이 따뜻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는 훈훈한 소식도 들린다. 온도의 불평등이다.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는 누진제가 어떻게 온도 불평등을 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열대야에 잠을 설칠 무렵, 서늘한 서울역 지하도에는 노숙하는 이들이 땀에 젖은 박스를 편다. 아니 왜 밖에 나와들 있는 거야? 더워 죽겠는데. 짜증 섞인 여자의 말 너머로 런닝 차림의 사내들이 모여 궐련으로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다. 행인들의 목에 걸린 선풍기에서 더운 바람이 땀을 흘렸다. 더워 죽을 것 같으니까 나왔지. 쪽방에는 에어컨이 없으니 나올 수밖에. 에어컨 실외기가 내뿜는 열기를 피하느라, 막걸리를 중심으로 후암동 쪽방촌 앞 공유지에서 다섯의 사내들이 부정형의 원을 그리고 있었다. 평등한 온도를 보장하라 말하며 실외기처럼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복지'가 결핍된 욕구가 없는 상태라 한다면, '사회복지'는 사회적 욕구가 충족된 상태를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복지사업'이란 사회 구성원 어느 누구도 욕구의 결핍을 겪지 않도록 돕는 활동을 얘기하겠지. 지금까지 나는 결핍된 그들의 욕구를 어떻게 채워 줄 것인가를 고민했지, 왜 그들이 욕구의 결핍이라는 불평등을 받아야 했는지를 고민하지는 않았다. 결국, 참된 복지(welfare)란 불평등과 소외를 유발하는 사회구조를 바꾸는 것인데, 그 점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 어느 누구도 결핍을 소망하지 않는다. 욕구 충족의 불균형을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다양성이라 말하는 사회가 문제이지, 결핍된 욕구의 합병증 때문에 장애를 갖게 된 그들이 문제는 아닌 것이다. 여기에 대한 중대한 과실이 바로 나에게 있었다.
상속 자본주의
오늘 온다던 아들은 오지 않았다. 서둘러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방바닥을 훔친다. 아들이 없는 아들 자취방에 덩그러니 30년 전의 내가 앉아 있다. 집을 떠난다는 사실만으로 들떠 있던 그 사글셋방에 혼자 앉아 있다. 혼자 있으면 쉬이 잠들지 못하는 법이다. 부양할 대상이 눈앞에 보이지 않을 때, 그동안 잠들어 있던 의식이 깨어나기 때문이라고 혼자 결론짓는다.
민주주의는 '1인이 1표'이고, 자본주의는 '1원이 1표'라고 배웠다. 자본주의는 돈이 돈을 버는 시스템이다. 눈덩이를 굴리듯, 굴리는 자본의 양에 비례해서 소득을 가져가는 구조이다. 자본주의가 굴러가면 갈수록 큰 눈덩이는 더 커지고, 더 큰 눈덩이는 더 커진다. 채 뭉치지도 못한 눈 뭉치는 구르지도 못한다. 구를 기회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다. 겨우 뭉친 작은 눈덩이는 큰 눈덩이가 지나간 자리를 굴러보지만 커지기는커녕 몸뚱이를 찢기며 파산하고 만다. 작은 눈덩이들이 부서져 눈 뭉치로 전락하고, 눈 뭉치들이 부서져 눈알갱이들로 흩어지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큰 눈덩이들은 말한다. 자본주의는 원래 그렇게 태어난 것이라고.
국제통화기금(IMF)의 '아시아의 불평등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소득 상위 10%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3년 현재 45%로 자료를 확보할 수 있는 아시아 국가 가운데 최고를 기록했다. (2016. 3. 16. 한국경제신문)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50% 이상을 소유할 때 자본주의는 붕괴한다고 배웠다. 3년 전 한국은 큰 눈덩이들이 전체 소득의 45%를 소유하고 있었다. 지금은 얼마나 가져갔을까? 현재의 소득불평등지수가 궁금하다.
세계적인 불황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가 위기에 봉착했다고 말한다. 당연하다. 너무 발전한 탓에 너무 효율적이고 너무 생산성이 높아졌다. 너무나 품질이 좋은 물건들이 너무 많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아직 쓸만한 물건을 버리고 새 제품을 구매할 넉넉한 중산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작은 눈덩이들은 부서져 바닥에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큰 눈덩이라고 소비를 많이 할까? 물론 많이 하겠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그보다 더 많은 소득이 들어온다. 그러면 투철한 자본가 정신으로 또 눈밭을 구르게 될 것이고... 작은 눈덩이는 소비를 많이 할까? 가장 소비를 잘한다. 먹고살 만하고 저축도 좀 하면서 많진 않지만 안정적인 소득도 있다. 물론 구를 눈밭이 존재할 경우다. 그럼 눈 뭉치나 눈알갱이들은 소비를 많이 할까?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소비를 안 할 순 없다. 최소한의 소비만 하려 하지만 이내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게 된다. 결국 가계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만다.
원래 자본주의는 상생 시스템이라고 배웠다.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큰 눈덩이 몇 개와 두툼한 작은 눈덩이들과 약간의 눈 뭉치들이 어우러져 선순환하는 시스템이라고. 언제 누가 과도한 탐욕을 부렸는지 지금 이 무더운 단칸방에서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내가 작은 눈덩이인지 눈 뭉치인지, 아니면 눈알갱이인지도 모르는 것처럼...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대로 가면 세상은 지구만한 큰 눈덩이 하나로 수렴될 것이고, 나도 너도, 우리는 없을 거라는 위기감뿐이다. 중산층, 중산층... 중산층을 살려야 한다고 떠드는 불순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살리긴 살려야 하겠다. 생각해보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경제학의 문외한 입장에서 보면 간단한 일이다. 지나치게 큰 눈덩이에서 눈을 좀 덜어내면 되지 않나? 큰 눈덩이를 여러 개의 작은 눈덩이로 만들고, 눈 뭉치들이 구르도록 해서 작은 눈덩이가 되게 하면 되지 않을까... 다른 나라 엄청 큰 눈덩이들은 기부를 하거나 사회환원을 통해 스스로 눈을 덜어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뉴욕의 큰 눈덩이들은 더 많은 세금을 낼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제출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한국의 큰 눈덩이들은 왜 그 영악함을 배우지 않는 걸까. 함께 가야 멀리 가는 법인데...
아들의 자취방에서 아들이 살아갈 시대를 걱정해 보다. 세상 모든 아버지가 바라는 것, 내가 살던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는 것, 아비가 물려줄 유일한 상속재산은 이것뿐이라는 생각을 끝으로 잠을 청하다.
불평등한 분노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것이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의 일에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한다. 요즘 자정을 넘기지 못하고 고목처럼 이불 위로 쓰러지는 나를 반성한다. 정의를 잊고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불평등을 직시하는 일로부터 정의가 시작되는 것이다. 정의는 신경 써서 붙잡지 않으면 달아나려는 속성이 있어, 늘 지니고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정의롭게 산다는 것은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 고통에서 눈을 떼지 않는 것, 나와 가족의 고통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 인식을 바탕으로 더 이상의 불합리한 고통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바로 정의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한다. 피곤한 잠자리, 눈을 뜨기 힘들다면 적어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자.
우리는 잘못하거나 모자람이 없는데도 응당한 대우를 받지 못할 때, 그래서 속이 상할 때, 그러다 화가 날 때. 누군가 나보다 잘난 점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보다 못났다는 사실에 대하여 항변하고 싶을 때. 어떤 이는 높은 음악을 들으며 분노를 태운다고 하고, 어떤 이는 낮은 음악을 들으며 분노를 가라앉힌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일도 마음속에 공간이 있을 때 얘기다. 온 마음이 불평등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으면 어떤 음악도 내 마음을 울리지 못한다. 이번 인사로 속이 상해 있을 후배에게 말해 주고 싶다. 우리 회사에서는 화살을 쏜 후에 과녁을 그리는 것이 원칙이라고. 공정하게 활을 쏘긴 하지만 명중되어야 할 화살을 가려 나중에 과녁을 그려 넣는 거라고. 원칙이 잘못이지 너의 잘못은 아니라고.
상대적 불평등
왜 걔는 갖고 나는 못 갖죠? 이건 공평하지 않아요. 딸의 불평에 아빠는 이렇게 말한다. 항상 다른 사람과 같은 것을 가지진 못해. 절대 공평한 경우는 없을 거야. 앞으로도 그런 일은 네 삶에 절대 없을 테니 지금 알아둬, 알았지? 잘 들어. 네 이웃의 그릇을 쳐다볼 오직 한 가지의 이유는, 그 사람이 부족하지 않나 확인할 때 밖에 없어. 네가 네 이웃만큼 가졌나 확인하려고 그의 그릇을 보면 안 되는 거야. 두 딸을 키우는 아버지의 일상을 그린 미드 '루이' <시즌 2> 1화에 나오는 아빠와 딸의 대화이다.
가난한 사람이 질투하는 대상은 백만장자가 아니라, 자기보다 조금 더 가진 가난한 사람이라고 한다. 결핍에 대한 사람의 욕구는 어느 수준 이하로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더 부족하다는 상대적 박탈감에 더 민감하다. 경제발전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오를수록 결핍의 체감도는 높아지기 마련이다. 전 국민의 생활수준에 연동되는 복지제도, 법으로 정한 최저한의 생활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향상된 생활수준에 맞추어 보장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겠다. 최저 생활수준은 언제나 최고를 향해 오르고 있는 것이므로. 불평등이 꼭 격차를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 절대적 불평등보다 상대적 불평등에 대응하는 제도적 노력이 필요하겠다. 그래야 불평등의 발전 속에서 복지제도가 진일보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보다 부족하지 않은지 이웃의 그릇을 살피는 제도를 기다려 본다.
Epilogue
나의 전진
그대가 걸으려면 한 발은 땅에 붙이고 한 발은 들어야 한다. 두 발을 다 땅에 붙이고 있으면 (지나친 보수주의자가 되면)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두 발이 다 공중에 뜨도록 하면 (지나친 진보주의자가 되면) 앞으로 고꾸라진다. (폴 클로델)
책 읽다 발견한 기가 막힌 비유의 글. 물론 깨금발로 걷는 방법이 있긴 하다. 그러나 두 발이 다 공중에 떠서 걷기 때문에 쉽게 넘어진다. 삼각지 같은 환승역에 가면 두 발을 다 땅에 붙이고 있어도 이동하는 구간이 있긴 하다. 하지만 결국 사이좋게 두 발을 번갈아 쓰지 않고는 안정적으로 걸을 수가 없다. 나는 뛰는 것도 힘들어서 싫고, 그냥 사이좋게 그 사람 손 꼭 잡고 느릿느릿 걸었으면 좋겠다. 그런 전진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