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가 오는 날에는 낙하산을 펴자.
비 오는 날, 나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비 오는 날 우리는 낙하산을 편 채 걸어갔다. (이수명, '낙하산을 편 채' 중)
비
오는 날이면, 비로소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게 된다. 비가 오는 날이면, 사람들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우산이 아니라 낙하산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랬다. 언제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는 비처럼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내려온 것이다. 그러니 지금 땅 위에서 지위가 낮거나, 가진 돈이 적거나, 취업을 하지 못했더라도 개의치 말자. 그건 단지 이 혹성에서의 모습일 뿐, 하늘에서 결정된 것은 아니니. 우리의 임무는, 다시 하늘로 돌아가 다른 혹성을 배정받기 전까지, 여기서 가능한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는 것이다. 잠시 불시착한 것처럼 머물게 된 이 행성에서 굳이 연료를 소진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우산 모양
낙하산을 펴자. 오늘처럼 비를 통해 하늘의 통신문이 내려오는 날이면, 서둘러 우산 모양의 낙하산을 펴고 안테나처럼 그 소식을 읽어 들여야 한다. 모스부호처럼 낙하산을 때리는 비의 전문을 모두 해독한 후에, 우리는 정해진 날에 남겨둔 연료를 한꺼번에 태워 하늘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날까지 우리의 임무는 여기서 사명을 다해 사는 것임을 잊지 말자. '비 온 뒤 세상이 맑아지는 것처럼 그대도 맑아져라.' 이것이 오늘 하달된 지령문의 내용이었다. 수요일도 아닌데 비를 보며 공상에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