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다는 것에 대한 상상.
인간은 왜 꼬박꼬박 살아야 하지? 띄엄띄엄 살 수는 없을까? 한 일 년쯤 살다가 또 한 일 년쯤은 죽는 거야. 그러면 사는 게 재미있지 않을까? 아니면 한 일 년쯤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사는 거야. 어차피 우리는 비슷한 인생이잖아. (영화 '버스, 정류장' 중 재섭의 대사)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어떨까.
"넘 오랜만이다. 왜 그렇게 안 보였어?"
"어디 갔다 온 거야?"
"으응. 나 일 년 동안 죽었다 왔잖아. 넌 계속 살고 있었던 거야?"
"나도 내가 지겨워서 딴 사람 인생으로 일 년 정도 살았잖아. 이제 그것도 식상하네."
"나도 잠깐 몇 달만 죽었다가 올까?"
"그러던가."
아마 이런 대화를 주고받겠지. 이승을 떠나 잠시 저승을 다녀오는 여행이 허용된다면 어떨까.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절실한 삶을 살게 되겠지. 불현듯 우리 사는 모습을 아득한 곳에서 내려다보면 어떨지 궁금해졌다. 저 인간은 왜 저렇게 힘없이 앉아만 있지? 쟤는 또 왜 사람을 괴롭히는 거야. 그래, 저 인간처럼 씩씩하고 생기 있게 살아야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마냥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마도 나도 저들을 따라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알림장 속 숙제를 떠올리게 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냥 웃게 된다. 분명 산다는 것은 죽을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거지만,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나도 저들처럼 뜨겁게 살고 싶다는 결의를 갖게 된다. 그래 어쩌면 우리는 사람 때문에 사는 것인지 모른다. 그사람 때문에 오늘을 견디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세 들어 살고 있다고, 황지우 시인은 말했다.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이라 했다. 그래, 산다는 건 거주기간을 따로 정하지 않은 임대차 계약 같은 거다. 세상을 사는 대가를 우리는 상처와 고통으로 지불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소유자에게 매월 또는 비정기적으로 비용을 주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오겠지만, 그때는 '아, 집주인이 월세를 한꺼번에 청구했구나.'라고 받아들이면 되겠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들 그렇게 세상을 한 달씩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청구되지 않은 월세를 미리 내지는 말자.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하여 미리 걱정하고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땅한 대가를 지불하며 살고 있으니, 좀 더 떳떳하고 당당하게 세상을 살았으면 좋겠다. 누가 뭐래도 계약기간 동안 여기는 내 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