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을 하기 좋은 시간들.
저녁은 헤어지기 좋은 시간이다. 지치기도 쉬운 시간이고. 하지만 제 손으로 머리칼을 털며 고갤 숙이고 있는 장면만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런 말도 가능하다. 내가 매일 현관으로 쓰러지며 쏟은 별과 모래를 아침마다 네가 예쁘게 비질한다고. (김상혁, '가정' 중)
무슨 말인가,
헤어지기 좋은 시간이 저녁이라니? 그러면 아침은 만나기 좋은 시간인가? 그리고 점심은 또 뭐하기 좋은 시간이란 말인가. 잠시, 당황하기 좋은 시간이 지나자, 마음이 차분해지는 시간이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무얼 하기 좋은 시간이 있기는 있다. 또 무엇을 하기에 좋지 않은 시간도 분명히 존재한다. 반드시 무엇을 해야만 하는 시간도 정해져 있고, 또 절대로 무엇을 하면 안 되는 시간도 예고되어 있는 것이다. 철 들어감에 따라 꽃이 피는 시간도 엄격한 순서로 정해져 있었다. 내가 목격한 바에 따르면, 눈 덮인 동백과 함께 매화가 피었다. 간발의 차이로 진달래와 개나리가 목련을 앞질렀으며, 벚꽃이 그 뒤를 따라 피었다. 이후 겹벚꽃과 서부해당화가 유채꽃, 복숭아꽃, 튤립, 철쭉 등과 개화 시간을 두고 서로 다투었다. 마찬가지로 등나무 꽃이 피는 시간도 미리 예정되어 있었고, 아이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주는 아빠의 시간도 그 스펙트럼이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흘려보낸 시간이,
흘려보낼 시간보다 많아지면, 시간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게 된다. 우리는 시간이 무엇이라도 그릴 수 있는 하얀 도화지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시간은 밑그림이 그려진 색칠하기 종이와 같다. 반드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꼬리표가 붙어 있는 것이다. 미션을 정해 놓은 대본이 따라온다는 말이다. 마치 대기 중을 떠도는 주파수가 다른 수많은 전파처럼, 각각의 할 일이 적혀 있는 시간들이 세상 가득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 온 이 시간은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일까. 모든 일은 때가 있는 게 아니라, 모든 때는 정해진 일이 있는 것이다. 사랑한다 또박또박 말하기, 아이와 단 둘이 여행 가기, 노모에게 어리광 부리기 등등 우리에게 오는 시간들의 꼬리표를 정확히 살펴야 한다. 밑그림대로 색칠하지 못하고 아쉬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할 일이 정해진 채로 오는 시간들을 그냥 흘려보내고,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바람은 이것뿐이다. 지금 내게 온 시간의 꼬리표에는 이런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적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