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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씀 Oct 26. 2022

뜸, 마음이 익을 때까지

# 난생처음으로 <발문>이란 걸 쓰다.


인생의 뜸을 안내하는 지침서



각별한 후배이기도 한 정웅구 시인의 시집, <뜸, 마음이 익을 때까지>를 읽고,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가 이미 자신의 방식으로 '인생의 뜸'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조용히 심지를 낮추고 자기만의 밥을 완성하고 있는 중이란 것을.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이 오는 거지만, 시인은 각별하게 맞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쌀알이 푹 퍼져 뜸이 들 수 있도록 불을 줄여야 하는 시간을. 지금껏 들끓기만 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의 심지를 내려야 하는 시간을. 하긴 이 나이 되도록 여전히 끓고 있다면 그 밥은 타버리고 말 것이다.


          

급하게 서두른다고, 더 빨리 가는 게 아니라, 천천히 간다고, 더 늦는 게 아니라,
숨 고르며 느긋하게 가다 보면, 부끄럽지도, 후회하지도 않는, 구수한 삶의 냄새가 넘쳐 난다.
(정웅구 시, '뜸 3' 전문)



누구보다 높이 뛰었고 누구보다 앞서 달렸던 시인이었기에, 속도를 줄이고 심지를 내리는 것이 쉽지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그럼에도 그의 사색과 고뇌들이 이렇게 시집을 이룰 만큼 깊은 '뜸'을 들였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시들을 읽으며, 나의 인생의 심지가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절반도 남지 않았을 마음의 심지를 뜨거운 청춘이라 오해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곤로'라고 불렀던 석유풍로를 사용해 본 사람이면 알 것이다. 화력을 높이려고 뿌리 끝까지 심지를 올리면 그을음만 난다는 것을. 불이 꺼지지 않을 만큼 심지를 내리고, 구수한 삶의 냄새가 날 때까지 인생의 뜸을 들이자고 시인은 말한다.


그의 말처럼, 인생은 급하게 간다고 빨리 가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간다고 늦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와 함께 했던 지난 시절을 돌이켜 보면 그렇다. 한 때, 조직의 부패한 부분을 덜어 내어 잘 발효되도록 돕는 일을 같이 했었다. 그때는 앞만 보기에도 숨 가쁜 청춘, 아니 열정의 장년들이었다. 그는 불합리와 부조리를 찾아내는 남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마 정의로운 그의 본성 때문이리라. 업무상이라지만 한 기관에서 그렇게 많은 부조리를 지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마도 태생적으로 부패한 상태를 못 견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정 시인은 재주가 많다. 그는 서양화를 그린다. 전시회도 몇 번 했던 걸로 알고 있다. 그림을 먼저 그렸는지 시를 먼저 썼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림과 시 둘다에 욕심이 많은 건 분명하다. 무엇이든 어설프게 하는 것은 안 한 것보다 못하다는 그를 기억하는 나에게, '사다리'란 시는 현재의 그를, 그의 심중의 마음을 가늠하게 한다.



올라갈 숫자뿐만 아니라, 올라왔던 숫자를 위로하고,
디딘 발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잡은 손의 소중함도 알게 될 때,
끝까지 사다리를 오를 수 있으리.
(정웅구 시, '사다리' 전문)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던 그가 '발'이 아닌 '손'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사실과 여기까지 오는 동안의 수고를 위로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르막이 아닌 내리막을 준비하는 시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정웅구 시집, <뜸, 마음이 익을 때까지>는 인생의 뜸을 생각하게 하는 지침서다. 인생은 골인지점까지 전력을 다하는 100미터 경주와는 다른 것이라 말한다. 앞만 보고 달려가면 되는 줄 아는 이들에게 모든 요리는 가열보다 뜸과 숙성으로 완성된다고 말한다. 그동안 열을 가했던 삶들이 차분히 하나의 요리로 완성될 수 있도록 기다려야 하는 시기라고 알려주고 있다. 내 인생을 잘 익게 만드는 일도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 마지막까지 콤콤하게 잘 익어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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