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멍도 좋아하지만,
물멍도 엄청 좋아한다. 많은 비가 내리면 강둑으로 차를 몰아 물구경을 즐기곤 한다. 얼마 전, 코로나19 관련하여 보건의료인 웰니스 지원 프로그램으로 남설악을 다녀왔다. 강원도 양양은 남도에서 바라보기엔 꽤나 멀었다. '엽전 위조 골짜기'라 칭하는 주전골 아래, 오색약수가 샘솟는 곳이었다. 최근 입산통제가 풀렸다는 흘림골과는 다음에 꼭 오겠다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오랜만에 호텔에서 온천욕과 찜질방을 경험했다. 몸은 다 풀어졌고 마음은 흐물흐물해졌다. 그랬었지, 옛날엔 온천을 자주 다녔지. 어린 딸 아토피에 좋다는 팔도 온천을 다 찾아다녔었지. 그 많던 한국의 온천들은 지금 어떻게 연명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주전골 선녀탕을 오르다가 그만, 지독한 물의 풍경에 빠지고 말았다. 거기에, 아침의 빛나는 햇살들이 물속에서 까르르 웃으며 헤엄치고 있었다. 물이 빛을 가둔 것이 아니라 빛 속에 물이 갇힌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물속에서 빛들이 빛나고 있었다. 물속의 햇살은 차랑차랑 하였고, 나도 모르게 그 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굴절(屈折)이다.
물속에서 햇살이 빛나는 건 모두 빛의 굴절 때문이었다. 물속에 빠진 햇살을 보고 생각이 왜곡되었다, 사상이 달라졌다, 그래서 흔들리는 창살 속에 갇힌 변절자라고 비난하면 안 된다. 우리는 뭐가 물인지 세상인지 모르고, 뭐가 파동인지 입자인지도 모르니.
굴절되지 않으면 빛나지 않는 것이다. 굴절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고 나는 굴절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굴절을 도모하고 노력해야 한다. 어쩌면 굴절은 나의 생각이 아닐 수도 있겠다. 알다시피 물은 자신이 품은 모든 것을 굴절시키는 버릇이 있으니까. 어쩌면, 물속의 빛은 물의 꿈이 아니었까? 물이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던 그 꿈.
뭐가 잘못인가,
주어진 환경에 맞게 자신의 입장을 바꾸는 것이. 한 번 품은 생각과 가치관은 불변해야만 하는가? 굴절이 굴종은 아니다. 굴절은 빛의 변절이 아니다. 그것은 물의 동요에 기반하는 것이다. 흔들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세상이란 말이다. 굴절을 통해 나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도 변하는 것이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바뀌는 것이다.
열매가 달라지길 바란다면 먼저 뿌리가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보이는 것을 바꾸고 싶다면 먼저 보이지 않는 것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남의 결점은 잘 보지만 나의 왜곡은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쓰고 있는 안경만 닦아도 세상이 맑게 보이듯, 나를 바꿔야 남이 변하고 세상이 달라지는 거다.
바다에 떠 있는 빙산 그림, 자주 보아왔던 그 삼각형의 도해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수면 아래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크다는 걸 안다. 또한 내게는 아직도 변화시켜야 할 보이지 않는 부분이 많다는 것도 잘 안다. 드러내 보이지 않고 조용조용 하나하나씩 바꾸어 나가자.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끊임없이 굴절을 시도하기로 하자. 굴절이란 정당한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