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로 좋은 일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 있던 조세희 작가의 말을 기억한다. 바다에서 제일 좋은 것은 바다 위를 걷는 것이고, 그다음으로 좋은 것은 자기 배로 바다를 항해하는 거라는. 그리고 그다음이 바다를 바라보는 거라고 했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하나도 걱정할 것 없다고. 지금 바다에서 세 번째로 좋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어쩌다 보니 해마다 찾게 되는 제주의 바다. 비양도가 보이는 협재해변에서 나도 세 번째로 좋은 일을 했다. 걱정은 파도에 쓸려 갔으며, 욕심은 잠시 심리적 방어선에 부딪쳤으나 이내 포말이 되어 사라졌다. 일행들이 도착할 때까지 나는 오랫동안 바다멍을 누릴 수 있었다.
마음의 멍을 회복하는 것
멍하다. 아무 생각 없이 멍청하게 바라보는 일을 말한다. 불멍, 물멍이 대표적이나 달멍이나 사람멍 같은 멍도 존재한다. 나는 보지 못하였으나 드물게는 일멍도 멍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불멍을 하는 이유는 온갖 잡다한 것들을 다 태워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불 앞에 앉아서 마음속 사념과 시름을 다 태워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불꽃이 되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시간도 연기처럼 흩어지고, 찬연히 타오르던 인생의 불꽃도 결국은 사그라지며, 결국 한 줌의 재로 남는다는 이치를 깨닫기 위함일 것이다.
물멍을 하는 이유는 온갖 잡다한 것들을 다 씻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급하게 요동치며 흘러가는 탁류를 바라보는 사람은 당장 물 위에 던져버리고 싶은 요동치는 번민이 있기 때문이다. 잔잔한 호흡으로 느리게 느리게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저 자기 마음속을 물처럼 가라앉히고 싶기 때문이다. 개골거리는 작은 개울과 심지어 어항 속 물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멍은 멍이 든 부위를 돌려놓는 일이다. 퍼렇게 멍이 든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는 일이다. 시루떡 같은 솜이불 덮어쓰고, 펄펄 끓는 아랫목에 누워 한 땀 게워내면 어지간한 아픔은 다 치유되었던 유년의 기억처럼. 멍 때리기를 하면 심장박동수가 안정되기 때문에 실제로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한다. 뇌에 주는 일종의 휴식인 셈이다.
취미는 '상상하기'
한 때 '취미'란에 '상상하기'라고 적던 때가 있었다. 전문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즐기기 위해서 하는 일이 취미라면, 상상하기도 취미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불멍이나 물멍뿐 아니라, 먼 하늘을 보거나 흘러가는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는 하늘멍도 취미가 될 수 있고, 먼 산을 보거나 울긋불긋 그라데이션으로 물드는 산을 멍하니 바라보는 산멍도 취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참 많이 힘들던 시절이었다. 여러 가지 불안한 일들이 한꺼번에 힘들게 했다. 고통을 피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상상’ 일 것이다. 그 상상의 기저에는 지금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을 것이다. 비겁한 도피나 회피가 아니라 어떻게든 생존하려는 간절함이었던 것이다. 삶은 뒤가 아니라 앞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어떤 바다를 만들 것인가
고민의 마음 알갱이 하나가 파도에 밀려갔다 밀려오기를 반복할 무렵, 바다가 소란스러워졌다. 우리 일행들이 도착한 모양이다. 그래 우리 일행이다. 우리는 나와 너로 구성된다. 복수의 나들과 너들이 모인 것이다. 그래서 시끄러운 거겠지.
바닷물도 한 방울의 물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의 일생이 순간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처럼. 바다를 보며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과 오늘을 포함하여 나의 하루들을 모아 어떤 바다를 만들어 낼 것인지를. 그동안 내가 만들어낸 바다는 어떤 모습인지를. 우리의 일생이 실개천을 이룰지, 강을 이룰지, 바다를 이룰지는 지금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을.
불에 태워버릴 수 있는 번민, 물로 씻어낼 수 있는 상처, 그리고 견딜 수 있는 고난에 감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