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었다.
난생 처음 나는 오로지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직장인이 되고 의무로 참여하게된 침묵피정. 바쁘게 교육이다 묵상이다 하며 끌려다닐 줄 알았다. 함께온 친구가 이렇게 오롯이 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행사라며 무조건 쉬었다 갈 수 있다고 좋아한다. 우리의 직업 특성상 시간의 제약이 많고 내 시간을 보내기 어려운데 그 속에서 유독 이 프로그램이 팍팍하지 않고 여유롭게 진행되고 강제도 없으니 쉴수 있을거라나.
사실이었다.
오후에 입실해 2인실을 독방으로 배정받고 짐을 풀었다. 가볍게 오리엔테이션을 하고(간단한 주의사항을 알려주는 시간이었다.) 식사를 제공받고짧은 산책을 즐긴다. 해가 기울어가는 팔공산 높은 언덕위는 멀리로 산이 층층이 물결치고 가까이는 억세가 키보다 높이 쏟은 채 간드러지게 흔들린다. 태양빛을 머금은 억새가 예쁜 색으로 자랑질이다. 휴대폰의 카메라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행복하다.
너무나 조용한데 무료하지 않았고 충만하고 행복하다. 수녀님들이 지어주신 맛있는 저녁식사와 간들어지는 억새풀 사이로 유유자적 걸었던 산책과 혼자만이 이용하누 쾌적한 숙소에서 샤워후 침대위 전기장판으로 뜨듯하게 지지는 몸, 조금 열어둔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산 공기, 완벽하게 노곤하다.
결심했었다. 이번 피정에서는 휴대폰을 버리자. 책과 그림에 집중해 보자고.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책을 꺼냈다. 비교적 쉽고 재미있게 읽히리라는 판단으로 선택한 소설책이다. 예전에는 펼쳐서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하루이틀만에 끝내던 책이 그래에는 자꾸 느려지고 밀려지더니 끝내지 못하고 포기했던 책의 수가 늘었었다. 그만큼 시간의 여유도 없어졌고 집중력도 떨어진 탓이었다. 그런데 오늘 오후부터 시작한 소설책 한권이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잠들 시간 전에 끝이 날 책을 깨닫고 만족감에 입꼬리가 올라간다. 등 따시고 배부르니, 바쁜일은 모두 저 아래 도시 한복판에 버려두고 왔으니 이보다 더 충만할 일이 있을까.
수십명이 한방씩 차지하고 들어 가 있는 이 건물이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지금 이 저녁시간이 차분하게 마음을 채우는 중이다.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각종 소음을 걷어내고 제대로 시간을 즐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