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불리는 호칭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김○○씨"라고 불리면 거리감이 10미터는 되는거 같고 "○○씨"라고 성을 떼고 부르면 약간의 존중이 가미된 친밀도의 시작점 같다. "○○야"는 모든 존중과 거리감과 조심성이 사라진 상태, 즉 경계가 허물어진 상태로 들어간다. 이때는 더 조심할 필요가 생긴다. 서로간에 상처낼 말이나 행동도 이때 시작된다. 마치 그래도 될 것 같은 승락을 받은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가족도 마찮가지다. 편안한 호칭덕에 어렵지 않게 좋은 말도 나쁜 말도 오고가게 된다.
나는 내 입을, 내 머리를 믿지 못한다. 살아오며 가까운 사람들에게 생각보다 많은 상처를 받아왔다고 느끼고 난 후부터 였을테다. 나도 그랬을 거라는 확신이 든 후부터였다. 덕분에 참 쉬웠던 인간관계와 친밀감이 어려워졌다. 교류했던 시간에 관계없이 말 놓기가 어려워졌고 오랜시간 담소를 나눈 후면 집으로 돌아가 소가 되새김질하듯 되새기게 된다. 실수를 점검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말을 놓기도 인간관계가 깊어지기도 힘들어졌다. 사람을 부르는 호칭은 의외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화번호를 저장할때 '사랑하는○○'로 바뀌놓으면 사랑이 더 확장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의 아버지,
이제 겨우 하늘나라로 떠난 지 두달이 지난 아빠는 언제나 별명을 불렀더랬다. 칠남매 모두의 별명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내 별명만큼은 기억이 난다. 별명으로 부르던 아빠의 그 운율 섞인 노래같은 음성도 기억이 뚜렷하다.
첫번째 별명은 "깜상"이었다. 많은 자녀 중 유독 외가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시키면 불만없이 그러마고 대답하던 나만 언제나 외갓집 신세를 졌고 외갓집에는 마침 낙동강의 멋진 모래사장이 있었고, 강변의 나무숲이 멋졌으며, 또 마침 그 나무숲에는 매미와 잠자리가 지천이었다. 우연이 지나치면 필연이라고 하였나? 곤충과 동물에 환장을 하던 나는 외갓집 단골 손님이었다.
한달씩 외가에 보냈던 둘째 딸이 집에 돌아오면 유독 작던 아이는 눈만 반들반들 초롱하고 온통 그을려 까맣게 변해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약간의 미안함과 반가움이 섞인 호칭이었으리라 짐작한다. 퇴근후에 깜상~ 이라고 부르던 아빠의 노래같은 리듬뒤에 뒷짐진 손에는 과자나 마론인형, 강아지 등이 들려있었고 웃으며 "깜상 이게 뭐게?"하셨지. 마치 뇌에 낙인을 찍은듯 행복했던 추억이다.
또다른 별명은 '울보짤보'이다. 작고 약했으며 마음까지 여려 잘 울었다. 치여서 울고 욕심이 차지않아 울고, 사차원 동생의 놀림에 약발도 잘 받았더랬다. 아빠가 부르는 깜상이라는 별명 뒤에는 언제나 선물이 있었고 울보짤보라고 웃으며 불러주는 호칭은 아빠와의 30분 독대가 있었다. 달래고 달래 둘째 딸이 뭣때문에 속이 상했는지 뭐가 필요했는지를 알아낸 후 다음날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거나 가지고 싶은게 내 손에 주어졌다. 그래서 나는 두 별명이 다 좋았다. 물론 "울보짤보 깜상" 이라고 부를땐 달라진다. 그건 분명 놀리는 거였다. 딸과 장난을 치고 싶은 거였다. 그러고 보면 아빠가 불러주는 모든 별명은 나와 아빠의 그리고 우리들의 사랑의 시간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별명이란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학교에 가고 친구들을 겪으며 별명이 좋은 의도만 있는 것은 아니고 누군가를 놀리거나 속상하게 만드는 용도 일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긴 했다. 그래도 다 자란 우리는 여전히 별명에 집착했고 아이들이 생긴 후에도 조카들에게 별명으로 불리는 이모들이 되었다. 아빠의 선한 영향력이라고나 할까.
아!
'울보짤보 깜상'이라고 부르는 그 노래같은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다면,
아빠가 유독 많이 보고 싶은 날이다.
그러고 보니 아빠와 많이 닮았던 남편도 별명을 참 많이 사용했다. 아들도 조카도 매번 별명을 만들어 불렀다. 문득 별명이 생각났고, 별명이 생각나니 두 사람이 생각난다. 자상하고 가족밖에 몰랐고 누구보다 나를 사랑해 주었던 그런 두 사람이.
오월의 어느 날은 유독 그런 날이다.
미디어에서 연신 긴 연휴와 가족과 부모와 아이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 오월의 어느 날.
내 기억을 들쑤시는 그런 날.
울보짤보를 달래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