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인 것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
뮤지컬 생떡쥐페리의 대사다. 어린왕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다.
주말 오후, 기분 전환이나 하라며 지인이 보내 준 뮤지컬 티켓을 들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벌써 가을이 깊었다. 매년 가을이면 대구 국제뮤지컬 페스티벌이 열린다. 저렴하게 다양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눈으로 보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황금 같은 기회다. 올해는 모두 잊고 있었다.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티켓을 보내 주겠다는 지인의 연락에 '아! 잊고 있었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다.
남편은 공연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로지 스포츠에 특화되어 있어 다른 것에는 관심이 전혀 없는 남자였다. 그래도 내가 표를 내밀며 함께 가자고 하면 그것이 발레공연이든, 국악공연이든 따라나서 주었고 내 옆자리에서 졸린 눈에 힘을 주며 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문화 코드가 맞지 않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공연을 보고 함께 이야기 나누고 즐기는 시간을 기대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 아들이 문화 코드가 맞아 그 자리를 대신해 주었다. 그래서였다. 언젠가부터 둘만 공연을 보러 가고 남편은 혼자 집에 남아 집을 지키는 집돌이가 되었다.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고 나면, 졸린 눈에 힘을 주는 남편일지라도 둘이 공연을 보러 다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는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여행도 공연도 남편과 함께할 시간을 은근히 기다리기도 했다. 남편이 영원히 내 옆을 지켜줄 줄만 알았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했을까?
오늘은 이미 선약이 있는 아들과 혼자 떠나 버린 남편 대신 동생과 조카들이 내 옆을 지켜주었다. 조카들은 지루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모 기분 전환을 위해 기꺼이 희생 중인 조카들에게 살짝 미안해 공연이 끝나자 "지루해서 힘들었지?" 물으니 "아니, 나름 재미있었어."라고 대답한다. 나름이라니! 약간은 미안했지만 오랜만에 기분 전환한 나는 약간 들떠서 공연장을 나왔다.
창작 뮤지컬 [생떡쥐페리]는 딤프의 창작지원사업에 뽑힌 작품이라 완성도도 높고 무대설치도 좋았다. 한국 작품은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나기 힘들었는데 뮤지컬페스티벌에서는 한두 편씩은 만날 수 있어 좋다. 이 뮤지컬은 소중함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극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어린 왕자가 주인공 생떡쥐페리에게 계속해서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말을 던진다. 후반부로 가면서 진지한 대사가 많아졌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하며 들었다. 길들인 것에 책임을 지라는 내용이 주가 되고 있었다. 사랑해서 옆에서 길들였다면 그 사랑에 책임을 져야 하고 무엇이 소중한지 고민하라는 메시지였다. 소중함, 진심 같은 단어들이 가슴에 박히며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이미 남편에게 길들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져 버렸는데 그렇게 완벽하게 길들여 놓고 정작 책임감 강한 그 남자는 없다. 너무 멀리 사라져 버렸다. 비행기를 타고 영원히 사라진 생떡쥐페리처럼. 아내 콘수엘라가 변해 버린 생떡쥐페리 때문에 상심하는 장면에서는 그녀의 가슴 시린 사랑의 고통이 전이되며 나도 아팠다. 이렇게까지 감정이입이 된 적은 없었다. 나는 공연을 볼 때 이성적인 편인데 이번 관람은 평소와 달랐다. 나도 당황스러웠다. 아직은 슬퍼서 모든 것이 정상적이지 않은 때문일 것이다.
나는 왜 남편에게 책임감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을까? 그는 나에게 항상 최선을 다했는데 나는 왜 그랬을까? 하늘을 나는 것에만 집착하는 생떡쥐페리의 모습이, 콘수엘라에게 소홀하던 생떡쥐페리가 나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참으로 이기적인 모습이 내 모습이라니 나는 도대체 그 긴 시간 동안 무얼 한 걸까? 후회와 깨달음의 슬픔이 밀려왔다. 공연장이 어두워서 다행이다. 코로나로 객석을 띄워 앉아서 다행이다. 몰래 눈가를 닦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동생과 조카가 내 눈물을 눈치채지 못해서 정말 다행이다.
요즘 나는 감정적이다. 그래서 유행가 노래 가사에도 뮤지컬 대사에도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