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싸움이 심해지면 흥분한 나는 생각했었지. 당신 없으면 내가 못 살까 봐? 더 잘 살 거야. 그러다가 이성이 찾아오면 정신이 번쩍 든다. 남편에게는 헤어져도 잘 살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사실 혼자서는 살 자신이 없었다. 그가 내 협박성 발언에 먼저 숙여 주었고 나를 잡아 주었기에 나는 쉽게도 그에게 져 주는 척, 용서하는 척 주저앉을 수 있었고 그렇게 부부 싸움은 끝이 났다. 우리는 거의 시댁 문제로 토닥거렸으니 결국은 그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러니 쉽게 용서라는 이름으로 감정을 조절할 수도 있었다.
그에게는 비밀이지만 사실은 언젠가 아들이 "엄마는 나와 아빠 중에 누구와 살 거야?"라는 질문에 고민도 없이 "당연히 아빠지. 아빠 없이 엄마가 어떻게 살아." 그리곤 농담처럼 덧붙였던 말 "아빠는 엄마가 쓸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이고 너는 엄마 돈을 쓰는 사람이잖아."라고 이유를 설명해 주었었다.
그가 없는 삶이 현실이 되었다. 진짜다. 이것이 진짜 내 삶이라니 인정하기 싫다. 내가 쓸 돈을 벌어 주었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서포트 해 주던 남자가 사라지고 내가 벌어서 먹여 살려야 하는, 아빠보다 잘 해 줄 수는 없지만 비슷하게라도 해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아들이 남았다. 그나마 아들이라도 곁을 지키니 위로가 되긴 하지만 삶의 무게 또한 만만치 않다.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은 어떻게 하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그의 잘못도 아닌 일에 흥분하고 화내지 말걸. 조금만 더 이해해 줄걸. 이제야 그것이 보이고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니 나는 정말 머리가 나쁘다. 한치앞도 보지 못하니 내일은 또 무슨 후회를 하고 있을까? 꽤 많은 세월을 살았다고 그래서 삶에 대해 나름의 가치관은 정립해 두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무리 거만을 떨며 살았어도 말 그대로 자만이었을 뿐이다. 아무것도 몰랐으면서. 나는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까불고 어리광부리는 늙은 여자였을 뿐이다. 남편은 그 어리석음을 가려주며 거짓 자존감을 만들어 준 존재였다. 그래서 나는 남편의 부재로 하늘이 무너졌고 내 바벨탑이 무너졌다. 나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강력한 한방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모든 걸 버려야 하는데, 머릿속을 다시 셋팅하고 이제까지의 나를 버려야 하는데 어리광 받아 줄 남편이 없는 것만 억울하고 슬프다. 나에게 생긴 빈자리는 아직도 너무 커 회복 불가능해 보인다.
잘난 척 굴던 늙은 여자는 모든 것을 잃었다. 그가 나의 모든 행동 뒤에서 보조해 주고 막아 주고 있었는데 그걸 깨닫고 보니 거울 앞에는 늙고 초라한 그래서 어디에서도 필요로 하지 않는 한 여자가 앉아 있다. 저 늙은 여자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저 여자가 책임질 아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저 여자만 의지한다. 그래서 초라하지만 아직은 힘을 내야 하는데, 아직 책임져야 하는 시간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하지? 누가 삶의 나침판을 하루만이라도 빌려줄 수 있다면 좋겠다. 방향을 모르는 길 잃은 늙은 양은 오늘도 방황 중이다.
그동안 나의 하늘이었던 그래서 모든 것이었던 남자는 내게 한 방을 먹였다. 함께 한 18년을 뒤로 한 채 미련 한 자락 남기지 않고 떠났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미련이 철철 넘쳐 주체할 수가 없다.
아닌가? 아직은 미련을 떨어야 할 때인가?
거울 속 저 늙은 여자는 여전히 미련스럽다. 돌이킬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계속 추억만 되새긴다. 추억만 기억하며 그것만 정리 중이다. 그래서 저 여자가 애처로워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