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마라

by 완뚜
정호승 / 수선화에게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표피부터 스며드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이제야 배운다. 지금까지 나는 외로운 척, 아픈 척 감정의 사치를 즐겼다 보다. 외롭다는 것 그래서 아프다는 것은 겪고 싶지 않은 상상할 수 없던 고통이다. 차라리 병이 나서 병실에 누워 있거나 수술실로 향하던 두려움이 지금보다 덜 아프고 덜 두려웠다. 아픈 건 참으면 되고 사실 옆에서 투정 받아 줄 지기가 있기에 만들어낸 사치였다.
이제 투정받이 지기가 사라진 자리에서 나는 혼자 아프다. 외로움이 피부에 스멀거리며 기어 다닌다. 시인은 버티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길 잃은 사람을 암흑 속으로 걸어 들어가라고 하는, 그럴 수 밖에 없지 않느냐는 작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원망스럽다. 알기에, 그래야 하기에 한 발 내딛는 걸음이 더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또 이렇게 말한다. 너만 외로운 것이 아니다. 만물이 모두 하물며 하느님도 외로울 때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영원한 이별을 경험한 외로움은? 과연 모두가 알고 있을까? 뼛속까지 고통이 침범하는 절절한 외로움을 몇 명이나 경험할까? 그래서 일까? 혼자만 아픈 거 같고 혼자만 이렇게 두려운 길에 버려진 것 같다. 이해 한다고 위로하는 사람들이 정작 이해 하기는 하는 건가 싶을 때가 많다. 그들의 어설픈 위로 덕에 혼자가 되면 더 슬퍼져 눈물이 북받친다. 이러니 사람 만나기가 두려워 진다. 멈춰선 발걸음이 내 디뎌지지 않는다. 이래서는 안되는데.

병원, 심폐소생, 맥박, 장례식, 납골당 같은 것들이 화면을 통해서나 음성을 통해 들릴 때면 심장이 떨어진다. 마치 누군가 내 심장을 큰 손으로 쥐어 비트는 느낌이다. 그만큼 쥐어 짰으면 이제 형태도 남지 않았겠다 싶은 심장이 또 다시 내려 앉는다. 아이가 아프다. 자람을 많이 했던 아이라 병원을 달고 살았고 최근 꽤 건강했으니 감기 한번 쯤 걸릴 때는 되었다고 머리는 말한다. 아빠 보낸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동안 너무 씩씩한 척 하더라니. 강행군에 정신적으로 지쳤을 아이가 아프다니 더 안타깝고 미안해서 그래서 눈물이 난다. 내 심장과 눈이 두려움에 떨린다.

학교에서는 코로나 검사를 해서 음성이면 학교에 보내도 되고 검사하지 않을 거면 감기 치료 끝나고 약효과 없는 상태로 열 떨어지고 3일 후 등교가 가능하다고 한다. 어쩌지. 어찌해야 하는 건지. 혼자해야하는 결정의 무게도 무겁다. 학교를 보내지 않을 것인지 비싼 검사를 받아야 하는 것인지. 이런 것들 보다 더 슬픈 건 같이 의논하고 걱정해 줄 아빠가 없다는 거다. 아들이 아프면 출근 후에도 뭐가 먹고 싶은지 물어 중간에 사다 주고 가는 남자, 자상한 아빠가 없다. 이마에 손을 대고 정확히 아이의 체온을 맞추는 인간 체온계, 아이에게 모든 것이 맞추어져 있어서 가능한 그만큼의 크기로 사랑해 주던 그 아빠가 없다. 갈팡질팡 아직도 자기 아픔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엄마만 있다. 그래서 속이 상하고 그래서 외롭다. 아들에게 미안해서, 남편에게 미안해서 나는 오늘도 외롭고 아프다.

너도 나처럼 아프니? 나는 이제 어찌할까? 알면서도 시작할 수 없는 나는 여전히 바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