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사람

by 완뚜

인간은 태어나면서 모두 제 역할을 부여 받는다고 믿었다. 누구도 필요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제 역할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라며 삶에 대해 긍적적인 환상을 지니고 살았다. 열심히만 하면 먹고 사는 문제는 부수적으로 따라 오는 것이지 어떻게 사는가의 다양성만이 존재한다고 그렇게 철 없이 생각했다.

이력서를 쓸 때부터 나는 쓸모 없는 여자가 되었다. 하얀 공란에 적을 거리가 없고 빈공백을 채울 재간은 더욱 없다. 사력을 다해 쥐어 짠 이력서를 완성해 제출하고 나면 그 후에는 연락없는 전화기와 눈싸움을 벌인다. 지인이 안타까워 이것저것 알아봐 주고 정보라며 알려주는 것도 그림의 떡이다. 다들 우리에게 익숙한 자격증 몇 가지를 묻는다. 부끄럽게도 없다고 대답하는데 심장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남편은 나의 취직을 반대했다. 직장생활 안할 건데 자격증이 왜 필요하냐며 자격증 도전도 반대했다. 핑계지만 남편이 그렇게 얘기해 주는 게 좋아서 금방 포기했던 것이 지금은 후회로 돌아왔다. 너무도 절실해진 지금의 현실 때문에 그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어쩌자고 이렇게 바보, 철부지를 만들어 놓고 사라져 버렸는지. 혹시 너 엿 먹어 봐라 하는 건지 답답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점점 추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등교하는 아들의 떨어진 가방에 심장이 덜컹거린다. 아빠가 있었다면 제일 좋은 거 골라서 고민없이 주문했을 텐데 지금 나는 쪼막 손이 되어 지출을 걱정하며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있는 돈으로 당분간 버텨야 하는데 그럼 싼 것으로 구입해야 하나? 아니면 기죽지 않도록 비싼 걸 사 줘야 하나? 불쌍한 내 새끼는 이제 아빠를 잃고 삶이 참 많이 변해야 한다. 나는 그가 애지중지했던 아들에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엄마가 되었다. 혹시 내가 아들의 짐이 되는 건 아닐까? 그렇게 까지 쓸모없는 내가 될 것 같아 두렵다. 나의 길은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쓸모 없다는 것 만큼 아픈 말이 있을까? 나는 지금 스스로에게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노래하며 벌을 주고 있다. 그 동안 살아 온 모든 것을 부정하며 취직 한자락이 쉽지 않다는 이유로 앞으로의 삶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쌓아 올린 나의 인생을 내핑계 치고 짓밟는 중이다. 쓸모 없지 않았는데. 나름 열심히 살았는데. 무엇이든 내가 맡은 일은 정말 최선을 다했고 비록 취미로 머물렀지만 시작한 것은 최고가 되려고 노력했었다. 필요하다면 며칠 밤을 세우기도 했다. 그랬는데 나는 지금 현실의 벽 앞에 스스로를 단죄 중이다. 미리 준비하지 못했다는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혹독히도 단죄한다. 무력감에 빠진다.

아무일 없이 지나가는 오늘 하루도 조용하지만은 않다. 그동안 뿌려 둔 인적 자원이 꽤 된다. 쉴 만하면 안부를 물어오는 전화와 기분 전환을 종용하는 지인들 덕분에 꽤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는 중이다. 내 일처럼 뛰어 다니고 모임을 하고 밖으로 돌던 시간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이성은 그렇게 합리화 중이다. 남편과 나의 유일한 공통점은 사람을 좋아하고 모임을 좋아하고 그래서 모임이 있는 날이면 가족도 잊고 빠져 든다는 것이다. 덕분에 남편도 나도 좋은 지인이 많다. 덕을 보기도 했다. 어처구니없이 그를 보내던 날 알았다. 그와 나에게는 지인들이 재산이었다는 것을. 더는 과거를 부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제 다시 시작하면 된다. 제일 큰 것을 잃었다고 세상을 잃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아빠만큼 착하고 여린 아들이 내 손을 잡아주고 있는데 이제 용기를 내야겠다. 아들과 나는 서로 의지하며 살아 보아야 겠다. 아들이 호되게 아프고 나니 정신이 조금 돌아온다.

낯선 번호의 전화벨 소리에 뜬금없는 기대감이 불쑥 올라온다. 전화를 받았다. 몇군데 보내 둔 이력서의 첫 회답이다. 꽤 기다리고 있던 연락이라 목소리가 높아진다. 이틀 후 면접을 보러 올 수 있겠냐는 전화였다. 당연히 되지 안 되어도 되어야지 물으나 마나한 일이다. 출퇴근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비교적 깔끔하게 오랫동안 일 할 수 있는 곳이다. 마음에 두고 있던 곳에서의 연락이다. 전화를 끊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긴장되니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뛴다. 기분이 좋았다. 어쨌든 영 쓸모없는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뭘 좀 준비해야 할까? 지금부터 뭘 하지? 갑자기 희망의 싹이 움튼다. 어찌되었던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나는 쓸모있는 사람이다.' 라며 자기 최면을 건다. 청년기에도 자주 써 먹던 방법인데 자기 최면은 시간이 갈수록 확신처럼 자리를 잡으며 자신감이 생기기도 해서 좋아하는 방법이다. 전화 한 통에 희망이란 녀석이 시간을 두고 자라기 시작한다. 서류 전형 통과만으로도 나에게는 대단한 발전이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더 희망적인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최종합격이 되지 않는다면 아쉽겠지만 그래도 고마울 것이다.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자격지심을 누르고 조금은 자존심을 지킬 수 있으니 그러면 되었다. 시작으로 이 정도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