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가 여름비처럼 내리는 날,
태풍처럼 바람이 불고 앞이 보이지 않는 빗발이 들이치는 오후. 나는 '파란 하늘만큼 비도 참 좋아했었구나.' 하는 각성이 든다. 하늘이 비를 던진다. 베란다 창에 내리 꽂히는 빗줄기가 요란하게 창을 두드린다. 배관을 타고 내려가는 빗물이 속도를 높인다. 코앞도 보이지 않는 비의 행태에 길 가던 자동차도 주춤거린다.
아이는 학교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아직도 마음을 졸이는 시간일까? 남편의 납골당에 꽂은 조화는 무너지지 않았을까? 거추장스러운 걸 싫어하는 남편이 어질러진 주위를 보며 인상 찌푸리지는 않을까? 그런데 정말 영혼이 있어 그의 존재가 영원히 사라진 것이 아닌 게 맞을까? 흔적도 없이 모든 것이 사라졌다면 못견딜 것만 같다.
그렇게 좋아하던 비의 시원한 향연에도, 청명하게 귀를 울리는 빗소리에도 나는 이런 어리석은 걱정으로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근본부터 달라진 삶은 자주 나를 당황시킨다. 내가 이미 내가 아닌 상태가 되어 껍데기로 앉아 있다. 알맹이까지 야무지게 챙겨간 나쁜 남자는 알고 있을까? 껍데기로 미래를 준비 중인 나의 힘겨움을 눈치는 챌까?
남편이 응원하며 보냈을 거라 믿는 하트구름에 힘을 얻으며 어제는 무사히 면접을 보았다. 평생 그렇게 긴장되고 대답이 어려운 질문을 받았던 것도 처음이다. 남편의 부재를 물을 때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여기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어 깨문 어금니와는 모순되게 입가에 미소를 만들었다. 곤란한 질문에 버벅거렸다. 나는 꽤 언변 좋다는 말을 듣던 여자다. 남편과의 말다툼에는 남편이 "내가 너한테 말로 어째 이기겠노?"하며 끝이 났었다. 그랬던 내가 질문에 더듬거리다 나왔다. 대답을 잘 했는지 못 했는지 보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 내게는 더 충격이다. 매일 달라진 나를 발견한다.
달라진 내가 하나도 반갑지 않다. 아! 안되겠다. 창밖에 쏟아지는 비를 보며 커피라도 한잔 해야겠다. 비에는 커피가 제격이다. 예전에는 비가 오면 꼭 커피를 찾았는데, 오늘은 허전한 마음에 기억을 더듬다가 커피가 생각나 내리는 중이다. 집안에 커피향이 퍼진다. 오랜만이다. 그렇게 좋아했던 커피도 잊어버리고 살았다. 이것도 최근 변한 모습 중 또 다른 하나이다.
오후가 되니 비가 멈추고 하늘이 요동을 친다. 빠른 속도로 모양을 바꾼다. 낮게 내려 앉았던 구름이 하늘로 승천하는 중이다. 저 구름은 남편에게 닿을까? 다행히 비가 그쳤으니 납골당 앞은 다시 평화를 찾았을까? 아들의 하교길은 불편하지 않겠네. 다행이다. 쓸데없는 생각들로 오후를 보낸다.
오랜만의 커피 탓이었을까? 잠을 설쳤다. 새벽 이른 시간 깬 잠에 무료해진 시간, '마더'라는 드라마의 재방송을 시청했다. 펑펑 울었다. 드라마가 슬프다는 핑계를 대며 텔레비젼 옆에 둔 남편의 사진을 보았다. 따가워지는 눈을 닦으며 거실로 나왔다.
이른 아침, 화려한 하늘에 눈이 부신다. 여명이 시작된 시각.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구름의 무리가 오늘도 바쁜 하루를 예감케 한다. 무엇이 저리도 바쁜지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는 그 잠시의 시간에도 형태를 바꾸고 있다. 열심히 움직이라고 멈추지 말라고 외치는 듯 요란한 몸부림이다. 해가 떠 오른다. 밝아오는 산 너머의 빛을 끝내 이기지 못한 먹장구름이 붉은 빛을 머금고 격렬히 움직인다. 아직은 빛과 먹장구름 중 누가 이길지 가늠하지 못하겠다. 눈을 떼지 못한다. 한참을 화려한 퍼포먼스에 눈을 빼앗겼다. 알람소리가 요란하다. 이제 현실로 돌아가 아들을 깨워야겠다. 오늘은 아빠가 떠나고 처음 맞는 아들의 생일이다.
오랜만에 바라 본 하늘.
그곳에 어제와 다른 하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