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온 첫 날 인사를 나눈 어르신이 오늘도 볕 따뜻한 곳에서 느긋한 오수를 지낸다. 이제 기운이 빠져 사람의 기척에도 눈만 째려 볼 뿐 도망치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나이만 해도 8년이나 된 이 녀석의 이름은 냐옹이.
이 녀석은 사실 이름이 없다. 그냥 아들과 내가 그리고 조카가 부르는 이름이다. 아마 다른 이들은 또 다른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내가 사는 동 입구에서만 어슬렁거리며 다니는 것을 본 것이 8년이나 되었고 첫 만남에서의 모습은 힘 펄펄 넘치는 청년이었다. 잽싸기가 누구 못지 않아 근처 길고양이들은 감히 이곳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근처에 접근하다 이 녀석의 사나움에 발작을 일으키며 도망가는 것을 목격한 나는 잠시 녀석을 무서워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에게만은 한없이 관대하고 무심해 멀뚱한 눈빛으로 쳐다볼 뿐 행동이 없다. 관리사무실 앞에 배를 깔고 누워 지나가는 차를 관리한다. 주차해 두었던 차를 출발시키기 위해 녀석이 비키기를 기다리면 세상 느긋하게 도도한 걸음걸이로 걸어간다. 성질 급한 사람은 화를 낼만 한데도 아직은 다들 기다려 주는 것을 보면 필시 사랑받는 길고양이다. 어느 날은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입주민 아가씨와 배를 보이며 놀고 있는 냐옹이를 보았다. 목을 쓸어주는 아가씨와 냐옹이의 폼이 예사롭지 않다. 친밀도가 마치 냐옹이 주인처럼 보인다. 사실 이녀석은 길고양이인데 이런 애교를 부리며 입주민들을 사로잡아 만인의 고양이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 동 옆에는 18층 아파트 높이의 삼분의 일은 족히 되는 나무가 가늘고 길게 하늘로 뻗어 있다. 그 꼭대기에는 가끔 까치의 둥지가 만들어지고 어김없이 시끄러운 까치가 이사를 온다. 몇 년 전, 요란한 까치의 울음소리가 심상치 않아 고개를 들어 살피니 냐옹이녀석이 까치집까지 올라가는 기행을 벌이는 중이다. 움직임이 별로 없는 녀석이 슬로우 비디오를 튼것 마냥 느리게 나무를 오르고 있다. 둥지에 거의 다가가고 있는 냐옹이를 보며 근처를 배회하며 날고 있는 까치의 울음소리가 발악하듯 날카롭다. 힘이 넘치는 냐옹이 녀석의 이런 만행도 삼년 전에 멈췄다. 그나마 차 밑에서 더위를 피하다가 사람이 오면 어슬렁거리며 비켜주던 것이 이제는 차밑에 들어가지 않는다. 최대한 구석진 곳에 엎드려 시간을 죽인다. 이렇게 엎드린 체 냐옹이는 시간을 죽이는 것인지 자신을 죽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유난히 느려지고 털이 퍼석해져 몰골이 볼품 없어진 냐옹이는 이제 눈 조차 마주치지 않는다. 대화를 하듯 녀석과 눈을 맞추는 시간이 좋았는데 이제 눈동자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눈이 나빠졌나? 녀석이 나이를 먹는 동안 나도 나이를 먹었으니 같이 늙어가고 있는 것인가? 나도 시간을 죽이고 나를 죽이고 있는 것인가?
오늘 오전은 이사가 많다고 미리 차를 빼 달라는 관리실 방송이 흘러 나온다. 이런 날은 냐옹이가 있을 곳이 그리 많지 않다. 동 앞의 주차공간 한쪽의 구석진 곳이나 관리실 옆 낡은 의자 앞이 녀석의 자리였는데 트럭이 몰려들면 그곳도 안전하지 않으니 녀석이 걱정이다. 차의 위치를 옮기러 나갔다 돌아오는 길, 동 뒷길에서 녀석을 마주쳤다. 이곳에서 녀석과 마주하기는 처음이다. 낙엽을 쓸어모아 넣어둔 마대자루 위에 걸터 앉아 눈을 감고 명상 중인 녀석에게 다가가도 미동도 없다. 조용히 명상하듯 볕을 쬐는 냐옹이는 오늘이 조금 더 늙어 보인다. 가끔 나는 생각한다. 녀석은 천재거나 득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사람에게 너무도 초연하고 언제나 볕 좋은 곳을 잘도 찾아 휴식을 취한다. 이럴때는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날이 갈수록 초취해지는 냐옹이가 걱정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아 보이는 녀석이 애달퍼 가슴이 징하다. 꼬맹이 조카는 냐옹이 덕에 고양이는 무섭지만 수의사가 되고 싶단다. 어린이집 하원 길에 냐옹이와의 인사를 즐겼던 경험은 아이의 좋은 추억이 된 것 같다. 우리에게 녀석은 그런 존재이다.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 심지어 냐옹이는 길고양이에 이쁘지도 귀엽지도 않다. 그런데 녀석이 시선을 외면하고 마주 바라보지 않으니 왜 이리도 저릿한 마음이 생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것도 정이라 불러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