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뜬금없이 진짜로 가끔,
그의 체향이 코를 스친다. 긴가민가 할 만큼 약한 향이지만 분명히 깨달을 만큼 오랫동안 머문다. 그의 체향을 맡고 나면 옆자리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훅 밀려온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도 그는 없다. 아니 보이지 않는다. 느낌만이 존재 할 뿐이다. 분명 옆에 앉아 짠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하는 그가 있을 것만 같다. 다른 이들이 알면 미쳤다고 말하겠지?
죽은 이가 산 이를 찾아오고 산 이는 그가 온 것을 깨닫는 뭐 그렇고 그런 사랑 영화들이 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작가의 상상력에 박수를 보내곤 했었지. 영화적 상상력을 나는 완전히 창조된 어떤 것으로 치부했었다. 내가 작품 사진을 찍거나 영상을 만들고 글을 쓸 때, 한마디로 창작 작업을 할 때, 어디선가 본 것이나 들은 것 또는 어떤 작품을 참조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완벽한 창작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나의 작업은 그랬다. 그렇게 무언가에 소재를 얻고 창작하던 나는 남들의 작품을 볼 때도 예전보다는 깊이 들여다 보기 시작했고 어느 작품에서 본 듯한 설정도 분명 찾아낼 수 있었다. 소재를 찾는 과정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보다는 유에서 고민하고 깊이 있게 관찰하면서 만들게 된다. 그것이 남의 작품이든 남의 인생 이야기든 간에. 그래서 창작 작업을 시작한 뒤 유령이 나오거나 SF적인 류의 영화도 완벽한 창작품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분명 어딘가에 모티브가 되는 것이 존재할 것이다. 그래서 실감나는 영화관람도 가능해졌다. 분명 어딘가에 저런 상황에 대한 모티브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짜릿해진다.
'사랑과 영혼'이라는 오래 전 영화에서는 사고로 죽은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찾아 온다. 찾아 온 그를 느끼고 슬퍼하는 여자주인공. 사실 그 영화를 보던 어린 시절만 해도 허무맹랑하지만 아름다운 사랑 영화라고 생각 했다. 적어도 내가 남편을 보내 후 문득 그의 체향을 맡고 옆자리의 존재감을 느끼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마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작품으로 승화시킨 건지도 모를 일이다.
허무맹랑하겠지만 사실이다. 특히 그의 체향을 느끼는 때는 아이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같은 날들이었다. 최근에 그의 체향을 느끼고 놀라 달력을 보니 그가 떠난지 100일이 다가오고 있다. 연애를 시작한 지 백일, 태어난 지 백일, 결혼한 지 백일 등 행복한 백일 기념일이 아니라 남편을 보낸지 백일, 슬프고도 아픈 그 백일을 알려 주려고 왔나? 길지도 않은 백일 동안, 미친듯이 살았던 나의 고달픔이 마음에 쓰여 찾아 온 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가 너무 보고 싶었던 내 정신 세계의 장난일 지도. 그냥 그의 체향을 맡고 그의 존재감이 느껴지는 것이 좋아서 내가 미친건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가 다녀간 것이라고 믿고 싶을 뿐이다. 이렇게라도 그가 우리 곁에 있으면 좋겠기에 상상인지 현실인지 오락가락하는 나는 오늘밤에도 그의 향기를 맡고 싶다.
유행가 가사처럼 그립고 그립고 그리워서 나는 냄새까지 상상해 내는 여자가 된 건가? 남들이 어떤 의심하며 나를 걱정하더라도, 나는 나의 후각과 감각을 믿는다. 코 끝을 스치는 그의 체향과 여전히 우리를 걱정하는 그를 느끼는 순간의 따스함을 잃고 싶지 않다.
예전에는 알지 못했다. 나중에 좀 더 삶이 안정된 후 그 나중에 그와 도란도란 연애하며 살아야지 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지금처럼 가슴시린 절절한 사랑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리고 주지 못했던 사랑이 아쉬워 가슴을 친다. 오히려 그를 보낸 뒤 아쉽고 절절해지는 감정에 나도 속수무책으로 망가지는 중이다.
이럴때 하는 말이 있었지. '있을 때 잘 하지 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