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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방에 사는 여자 Dec 01. 2024

조금 늦게 도착해도 괜찮아!



근처 도서관에서 여행작가의 강연이 있어서 신청을 하였다. 누군지 성별도 모르고 덜컥 신청부터 해놓고, 부지런히 검색을 했다. 여행 관련 책도  여러 권 냈고, 방송에도 다수 참여한 인지도 있는 여행작가였다. 작가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알면 강의를 듣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토요일 10시부터 하는 강연이라 살짝  집에서 가깝다고는 하지만 버스로 네 정거장이라서 한 20분 정도는 될터였다. 주말의  단잠에 빠진 아이들이 느긋하게 일어나서 푸짐히 먹으라고  감자를 많이 넣고, 묶은지도 넣고 닭볶음탕을 만들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도서관 방향으로 가는 두대의 버스가 모두 이십 분 뒤 도착으로 되어 있었다. 부지런히 걸어가면 이 십 분이면 도서관에 도착할 것 같았다.

걷기로 했다.

어치피 나는, 전생에 보부상이었는지 걷는 것을 좋아하고, 날이 좋았다. 가방은 책 두 권에  

선글라스, 안경, 노트 등 각종 잡동사니로 제법 무거웠지만 걸었다.



땀나게 걸어간 덕분에 강의에는 가까스로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스물세 살부터 여행을 시작한 작가는 이십 년 경력의 여행작가라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작가는 파키스탄의 ' 훈자' 마을을 세 번을 찾아갔다고 한다. 한번 가면 그곳에서 삼 개월을 머무른다고 하였다. 인터넷도 안되고, 구경거리도 특별히 갈만한 곳도 없다는 히말라야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오지 마을이라고 하였다. 작가는 그곳이 편하고 좋아서 자꾸 가게 된다고 하였다. 그곳에 가면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어린 시절 우리가 살았던 사람 사는 향기가 나는 골목을 만날 수 있으니, 여행이란  과거로의 회귀와 같다고 하였다.  



강의를 들으며 몇 년 전 베트남 여행 중, 버스로 시골길을 이동하던 중에 들판에서 소치는 소년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버스가 잠시 정차했을 때는 집안에서 텔레비전이 켜져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흡사 내 어린 시절의 풍경과 닮아 있었다. 봄이면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훈자 마을은 애니메이션 '바람의 계곡'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헤밍웨이'를 읽으며 쿠바를 꿈꿨다고 한다. 다시 태어난다면, 밝고 어디서나 경쾌한 음악이 흐르는 쿠바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여행이란, 남들이 떠나니까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곳에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작가는 말했다.



토요일 한나절의 자유가 주어져서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어젠가는 하루를 뭉텅 잘라내어 나를 위해 쓸 수 있을 테고, 일주일, 한 달,  이렇게 적금처럼 늘어 나리라. 아직은 적금을 부어야 할 때이다. 만기가 다가오는 시간의 적금.

시간을 넘겨 이어진 열띤 강의를 듣고 집으로  와서 작가님의 책을 읽으며, 영상들을 찾아보았다. 나도 여행자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나는 방구석 여행자가 되었다.

모로코 '페지' 의 좁은 골목길에서 일부러 길을 잃어 보고 싶고, 메콩강의 아침을 흔들리는 배 위에서 맞이하며 국수를 먹어 보고 싶다.  

태국의 치앙마이에서 풍등을 날리고  촛불을 켜서 종이배에 띄우고, 사천 개의 섬으로 되어있다는 라오스 시판돈에서 강물을 골목 삼아서 아름다운 석양에 붉게 물들어 가는 매콩강을 바라보고 싶다. 밤이 되면 사막과 파란 하늘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우유니 소금사막, 그 간소하고 황량한 풍경에 서있고 싶다. 포르투갈의 포르투에서는 영화 해리포터의 배경이 된, 아름다운 서점 렐루 앤 이르마우 서점에서 책의 향기에 빠져 보고도 싶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맥도널드에 가보고 싶다.

그리고, 내가 꼭 가고 싶은 곳은 순례자의 길이다. 800km를 걸으며, 세계 각국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나를 알아가고 싶다. 나,라는 심오한 세계는 또 얼마나 넓어질 것인가.  


알랭드 보통은 '영혼의 미술관 '에서 우리의 삶은 다른 곳에 있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우리를 갉아먹는다'. 고 하였다. 나는 여행을 꿈꾸지만 다른곳을 열망하지는 않는다. 이곳에서의 삶은 축복이다.

김 영하 작가는 ' 여행의 이유'에서 ' 여행이 내 인생이었고, 인생이 곧 여행이었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며, 타인의 신뢰와 환대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여행에서 뿐만 아니라 ' 지금, 여기'의 삶도 많은 이들의 도움 덕분에 굴러간다고'  하였다.  

지나온 시간들과 앞으로의 나날들에서 나는 시간 여행자이다. 쌀을 씻다가 바라본 새벽의 하늘에서, 빨래를 걷다가 바라본 저녁 어스름의 거리에서, 낯선 하루를 발견한다.

어느 하루는 성실하고, 어느 날은 게으르고

어느 날은 기쁘고, 어떤 날은 슬프기도 하며, 생을  여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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