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그방에 사는 여자
Nov 24. 2024
한시 오십 분, 어반 스케치 수업 교실 문을 열고 들어 갔다. 이미 도착해서 그림을 그리고 계신 쌤들과 인사를 나눴다. 누군가 포트에 찻물을 끓여 놓았다. 누군가 먼저 도착한 사람의 세심한 베려이다. 이런 배려를 받은 나는 어느 날 제일 먼저 도착하게 되면 찻 물을 끓여 놓을 것이다. 책상 한쪽에 놓여있는 차 바구니에서 제주 유기농 녹차 티백을 커내 텀블러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조금 후에 도착한 숙이 쌤이 " 김장은 하셨어요?" 묻는다. 나는 이런 소박한 대화가 좋다. 숙이 쌤은 이번주에 시댁에 내려가서 같이 할 거란다. 나는 "저희는 아직 안 했어요 아마 다음 주나 할 것 같아요"라고 대답을 하였다.
명희 쌤은 허리가 아파서 김장을 못한다고 한다.
숙이 쌤은 믹스커피를 타면서 " 커피 드실래요?" 하고 묻는다. 나는 텀블러의 녹차를 가리키고, 다른 쌤들은 차를 찾아 종이컵에 넣고 뜨거운 물을 따른다.
선생님께서 단톡방에 올린 사진에는 가을이 풍성하게 물들어 있다. 맞은편에 앉은 숙이 쌤과 명희 쌤은 손이 빠르다. 한 시간쯤 지나자 스케치를 끝내고 채색을 시작한다. 숙이 쌤의 그림은 단아하고 예쁘고, 명희 쌤의 그림은 또렷하고
입체적이다. 나는 아직 밑그림을 그리는 중이다. 누군가 선생님의 그림을 가져와서 보여 준다. 하, 아직은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깊이가 있다. 무언가 비어 있음에도 다 채워져 있다. 지나온 세월이 주는 연륜을 한걸음에 따라잡을 수는 없다.
오 개월 전 처음 스케치를 배우러 왔을 때는
낯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려고 하니 어색했다. 처음 와보는 공간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초등학생 마냥, 선 그리기부터 시작했다. 손에 힘을 빼고. 가로선, 세로선, 사선, 곡선등 다양한 선들을 그렸다. 내가 그린선들은 비뚤 빼뚤, 얇았다가 굵었다가 정신없었는데, 옆자리에 앉은 쌤은 자로 잰 듯 반듯한 선을 그렸다. 그리고 윗기수의 쌤 들은 얼마나 멋들어지게 잘 그리시는지,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와! 너무 잘 그리시네요, 그림이 엄청 이뻐요!" 실로 고수는 어디에나 있었다.
" 괜찮아요, 그림은 또 그리면 되죠! "
이번 그림이 어떤 부분이 잘 안 그려졌고, 물감이 번졌고, 구도가 잘 안 잡혔다고 하면 선생님께서는 늘 괜찮다고 말씀하신다. 그 말끝에 나는 묘한 위안을 얻는다. 아무렴, 오늘 하루 그냥 흘러갔으면 어떠랴, 내일 또 살면 되지, 그냥 연습처럼. 어쨌거나, 화가가 되려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그리다 보면 십 년 뒤쯤에는 그림을 조금은 잘 그리는 사람이 되어 있겠지. 다행히도 나는 많은 것을 시작하거나 행하지 않는 대신, 시작한 것은 꾸준히 해나가는 경향이 있다. 상상을 해본다. 이국의 거리에서 쓱쓱쓱, 그림을 멋들어지게 그린다면 좀 폼나겠지.
맞은 편의 쑥이 쌤은 멋지게 그림을 완성했다.
흐드러진 단풍잎이 단정 하면서도 풍성했다.
명희 쌤은 평면에서 살아나는 듯한 그림을 거의 완성했다. 나는 간신히 스케치를 끝냈다.
어쩌면, 색을 채우다, 그림을 망치고 스케치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다음 주에 봬요!"
각각의 방향으로 건널목을 건너며, 가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