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나긋나긋하고 단호했다. 그리고 질겼다. 그녀를 만난 것은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다. 나는 공부는 하지 않았으나, 독서실은 열심히 다니고 있었는데, 책상 앞에 앉아만 있었지 공부는 안되고 그냥 공상만 했다. 생각의 나래를 미래로, 알 수 없어 불안한 미래로 펼쳤다. 독서실의 좁은 책상은 대서양 보다도 훨씬 넓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들을 아무리 펼쳐도 다 채워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늦은 밤, 집에 가지 않고 독서실에 남은 몇몇이 소곤소곤 수다를 떨었다.
막차가 일찍 끊기는 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독서실에서 자는 경우가 더러는 있었다.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밤이 되면 의자를 붙여 놓고 그 위에 담요를 깔고 덮고 잤다. 이틀에 한번 꼴로, 버스를 타고집에 가서 옷도 갈아입고, 씻고, 이틀 치 밥과 김치를 찬합에 싸갖고 막차를 타고 나와서 독서실 책상 위 선반에 두었다. 찬 밥을 이틀 동안 먹었다. 읍내에는 두 개의 독서실이 있었는데, 내가 다니는 독서실이 그나마 조용하고 깨끗했다. 인근 남고의 교장선생님 딸이 운영을 했고, 밤에는 그 언니가 관리실에서 잠을 잤기 때문에 안심이 되는 면이 있었다. 독서실 한가운데를 합판으로 벽을 만들어서 막아서, 남자 구역과 여자 구역을 구분해 놓았다. 위 천정 쪽이나, 아래 바닥 쪽은 틈이 있어서, 그곳으로 연애편지들이 오가거나, 며칠날 몇 시에 어느 빵집에서 만나자는 쪽지들이 날아들었다. 읍내에 두 개뿐이던 빵집에서는 토요일 오후가 되면, 언니나 형의 윗도리를 빌려 입고 나온 듯, 어설퍼 보이는 아이들이 어색하게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띄고는 했다.
같은 학교를 다니지 않는 그 아이와 나는 독서실에서 처음 만났다.
나의 무서운 이야기에 겁에 질린 그 애가 집에 가기 무섭다며 데려다 달라고 했다. 자고 일어나면 열개의 인디언 인형 중에 하나가 없어지고, 사람이 하나씩 죽어 나가던, 외딴섬의 산장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신나게 떠들었던 날이었다. 밤 11시쯤 되었을 시간, 어차피 독서실에서 자야 될 형편이었기에 나는 흔쾌히 그러마 했다. 마침 집에 안 가는 한 학년 아래의 후배가 있어서 함께 길을 나섰다. 아마 혼자였어도 그리 하였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겁이 없었다.
늦은 시간이라 사위가 깜깜했다. 상점의 불빛도 다 꺼지고, 정말 귀신이라도 나올 듯 으스스한 바람이 불었다. 앞서가는 그 아이의 등뒤에서 ' 와!' 하고 소리 지르며 등을 탁 치니, 놀라서 '꽥' 소리를 치며 달려 나갔다. 읍내에 있는 그 아이의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주고 돌아와서 의자를 붙여 놓고 잤다.
그날 이후 그 친구는 독서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두 달쯤 지난 어느 날 선배 언니가 전해준 소식에 의하면, 아파서 학교를 휴학 학고 집에 있다고 하였다. 그 아이의 집은 이사를 하여서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건너편에 살고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으레 그 친구 집에 가서 놀았다.
교회에 다니던 그 친구는,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교회 친구들이 자주 집에 드나들었다.
그 아이는 나긋나긋한 아이였다.
길을 걷다가도 오랫동안 주저앉아 있어야 하고, 간혹 누워서 맞이하는 날도 있었던 그녀였다.
한창 학교에 다니고, 친구들과 수다 떨 나이에 집에만 있는 자신의 처지가 괴로웠을 텐데, 그 아이는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세상으로 나아가 다양한 경험들을 할 동안, 그 아이는 자신의 집과 교회를 주무대로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고등학생으로 복학을 하겠다고 하였다. 그녀의 나이 스물다섯 무렵이었다.
주변에서는 검정고시를 보는 것이 어떻겠냐며 만류를 하였으나, 중간에 그만둔 고등학교 생활을, 다시 돌아가서 끝내고 싶다고 하였다.
나이 어린 동생들과 함께 공부를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그 시절을 열심히 살았다.
물론 버거운 일들도 있어서, 어쩌다 만나면 오징어 다리를 씹으며, 함께 ' 못 돼먹은 사람들을' 함께 씹었다.
대학 입학이라는 꿈을 꾸며 열심히 공부하던 친구는, 대입 시험을 한 달여를 앞두고 교통사고를 당했다. 몸이 부서진 그녀는 병상에 다시 누웠다. 동승자는 경미한 부상에 그쳤는데 그녀는, 목숨을 건지고, 큰 장애를 입지 않은 것이 천운이라고 하였다. 시험당일, 구급차를 타고 가서 누워서 시험을 보는 기염을 토했던 그 아이는, 원하던 학교에 합격하였으나, 끝내 입학할 수는 없었다. 나는 퇴근을 하면, 호떡이나 붕어빵을 사들고 병실로 찾아가서 한바탕 수다를 떨거나, 어느새 그녀의 절친이 된 병실 안의 아줌마, 할머니들의 사연에 귀 기울였다. 간혹 친구가 물리치료를 받으러 가고 없으면 따뜻한 그 아이의 침대에서 한숨 자기도 하였다. 가뜩이나
하얗던 그 애의 얼굴은 햇볕 구경을 못하니 더욱 하얐었다. 친구는 어느 날, 눈물 한 방울을 주르륵 흘리고는 그 뒤로는 울지 않았다. 친화력이 좋았던 그녀는 병실 안의 아주머니, 할머니들과 절친이 되었고, 그들은 친구가 결혼할 때 하객으로 참석했고 여러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훗날 알게 되었다.
일 년쯤 지나, 잠깐씩 외출할 수 있을 만큼 호전되었을 때, 친구는 더 큰 도시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 갔다. 먼 곳에 있어 나도 자주 찾아가지 못했다. 일 년쯤 지났을 때 결혼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남편은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알게 된 사람이었다. 친구는 결혼 후 딸 둘을 낳고, 벽장만 한 텔레비전과 넓은 아파트에서 골프 치는 남편과 살았다. 그녀가 행복해서 좋았다.
잘 해내야 하고, 아픔을 잘 드러내지 않던 친구가 멀게 느껴지던 때도 있었다. 언젠가 자정 무렵, 내 자취방에 찾아온 친구는 " 너는 내가 시체를 떠 매고 가도 나를 숨겨줄 사람"이라고 하였다. 속내를 잘 내보이는 나와는 다르게 아픔을 내보이지 않던 친구는, 병상에서 외로웠다고, 특히 멀리 있는 병원에서는 더욱 외로워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둘째 딸이 세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방송통신대공부를 시작했다. 살림과 육아와 학업을 성실하
수행하고, 정말 4년 만에, 입학보다 어럽다는 졸업 했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이고픈 소망에서 출발한 결실이었다. 큰 아이가 돌 때쯤 되었을 때. 어린 왕자 목걸이를 들고 온 그녀는 외국으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이년만 살고 온다던 말이 무색하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로 간간히 통화만 하다가 연락이 끊어졌다. 친구의 큰딸이 영국의 명문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십 년이 넘어간다.
변시지의 그림을 접하고 대번에, 나긋나긋하고 질겼던, 그녀가 떠올랐다. 쫄면 위의 계란을 먹지 않아서 "오예!" 하며 내가 날름 집어 먹던 시절이 떠올랐다. 서로의 무엇을 채워주던 시간들. 이제는 잘 해내야 하는 것들에서 놓여나, 아픔을 풀어놓으며 살고 있을까? 단발머리에 하얀 얼굴, 동그란 안경, 긴 플레어스커트, 잊었던 얼굴이 떠오른다. 그녀가 이제는 폭풍우 치는 바다에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역시 이제는 그 바다 있지 않으니.
외따로 떨어진 섬이었던 그 시절에 우리는,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나무도 되어 주고, 말없이 지켜주는 말도 되어 주었던 것 같다.
먼바다로 떠나갔던 그녀는 이제 고요한 강가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늦깎이 고등학생이던 시절 담임 선생님께서 선물로 주셨던 시집을 나에게 주며, "네가 가지고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아"라고 말했던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