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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시간을 살고 있는가.

by 그방에 사는 여자

호안미로의 그림은 간결하다.

비 논리적이며, 무의식의 세계를 유영하는 듯 상징적이고 추상적이다. 칸딘스키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림 속에서는 음악이 흐른다.

앙드레 브로통은 호안 미로의 그림을 " 전쟁이 가한 위협에 직면한 인간정신과 예술의 저항"이라고 말했다. 전쟁 이후의 인간정신을 회복하기 위한 화가의 노력일 것이다. 지독히도 혼란스럽고 어두운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화가는 밝고 다채롭고, 선명한 무의식의 세계를 펼쳤나 보다. 전쟁과 너무도 흔해빠진 죽음에의 투쟁을 위하여서,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 무구함과 원초적 정신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둠을 넘어 도달 한 곳이 단순하고 간결한 세계라면, 가볼 만하겠다. 추사 김 정희가 말했듯이 " 난을 치는 데는 법이 있어서도 안되고 법이 없어서도 안된다" 는데, 혼돈의 세상을 단순화시킬 수 있을 때까지 쳐내고 덜어낸 화가의 생각들이 궁금해진다.

니체가 말한 정신의 세 가지 단계를 거쳐 화가는, 아이의 단계에 도달한 듯하다.


니체는 인간은 정신의 세 가지 단계의 변화를 겪는다고 했다. 자신을 버리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달리는 낙타의 단계를 지나, 가장 쓸쓸한 사막에서 정신은 사자가 되어 고개를 든다고 했다. 정신의 투쟁을 겪고 온전한 자신의 주인이 되는 사자의 단계에 이르고, 순결과 망각의 어린아이의 단계에 들어서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린아이의 단계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인간만이 가진 능력인 망각 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고 니체는 말했다.


나는 어느 단계의 시간을 살고 있는가?

오랜 시간 동안, '해야만 하는'낙타의 시간을 살았다. 때론 제 몸 보다 더 큰 짐을 짊어지고 사막을 걸어갔던 시절도 있었다.

나이 오십을 넘긴 어느 날, 삶의 가장 쓸쓸한 사막에서 나의 사자가 고개를 들었다.

이 나이가 되면, 당연하게 찾아오리라 믿었던 것들은 허깨비 같아서 결코 오지 않는다는 것이 불현듯 깨달아졌다. 그동안 보낸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이지? 당황에서 허우적거려 본들 열 손가락 사이로 바람만 빠져나갔다.

묵묵히 산을 오르다, 산등성이에서 아랫녘을 돌아보니 소중한 것들을 아무렇게나 묻어 두고 온 듯 당혹스러웠다. 고향집 산마루에서 손을 흔들며 석양에 서 계셨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다. 엄마가 안 계신 시절을, 아버지 마저 안 계신 시간을 처음 살아 내느라 설거지통 앞에서 위로 없는 소주를 마셨다.


낙타의 시절을 통과해 나오기 위하여 나는 걷기를 선택했다. 어딘가를 가기 위한 걷기가 아니라 오직, 걷기만을 위한 걷기를 한지 이제 오 년이 되어간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눈이 오면 모자를 덮어쓰고 매일 두 시간씩 걸었다.

걸으면서 비로소 지나간 시간들과 화해를 하고, 이해를 하고, 용서를 했다. 매듭을 풀고, 옹이를

다듬을 수 있었다. 튼튼한 다리가 있음을 감사했다. 그리고 비로소 돌아가신 엄마와 담백하게 이별을 했다.


사자의 시간에 들어선 나는 막막한 길 위에서 오래전에 묵혀 두었던 씨앗 하나를 발견했다.

아직 그것이 있었다. 거친 발길에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아, 다행이로구나.

내가 찾아낸 것은 나였다.'하고 싶은 것'이 있는 내가 세상 한편 가장 구석진 곳에서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의 삶도 괜찮았으나, 다른 삶이 궁금 해졌다. 그리고 예전의 삶으로는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어떤 시간을 살고 있는가?

어느 날은 낙타처럼, 대부분의 날들은 사자처럼, 가끔은 어린아이처럼 살고 있다.

무얼 하든, 무얼 하지, 않던, 지나갈 시간을 살고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호안 미로의 그림처럼 간결한 삶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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